완벽한 승리와 기득권 포기...무진전쟁

‘바람의 검심(劍心), 신선조(新選組·신센구미)’. 청소년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일본 드라마와 애니메이션이다. 영화로도 나왔다. 공통분모는 칼잡이(武士). 시대적 배경은 무진(戊辰·보신)전쟁 전후다. 무진전쟁은 1868년1월3일(일본력) 시작돼 이듬해 5월 말까지 이어진 일본의 내전. 왕정체제로 복귀하려는 유신파와 도쿠가와 막부(바쿠후·幕府)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막부군 간 내전으로 8,200여명이 죽고 5,000명 이상이 중상을 입었다.

경제적 타격도 컸다. 패전 측인 일본 동북(東北·도호쿠) 지방의 영주(大名·다이묘)들이 몰락했다. 승자인 메이지 신정부도 막대한 전비에 빚을 지고 1870년대 초중반까지 재정난에 시달렸다. 인명과 재산상의 손실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무진전쟁으로 비약적인 성장의 날개를 달았다. 미국 페리 제독의 무력 시위에 의한 강제 개항(1854) 이후 바쿠후 세력과 국왕·유력 영주(雄藩) 간 권력 다툼이 끝났다. 무진전쟁 종결 이후 현대국가를 향해 내달렸다.

싸움의 배경은 15대 쇼군 요시노부와 왕정복고파인 사쓰마·조슈번간 알력. 왕에게 전권을 내준다는 대정봉환(大政奉環)에 이미 합의한 상태지만 속셈은 서로 달랐다. 요시노부는 총리와 같은 지위를 얻을 것으로 기대한 반면 사쓰마와 조슈의 연합체인 삿슈는 지지부진한 권력 이양에 불만을 품었다. 삿슈를 핵심으로 하는 존왕파(尊王派) 5개 번은 급기야 1867년12월9일 이른 아침, 교토 왕궁의 주요 출입문을 점령하고 왕정복고를 선언했다.

교토 인근에 머물던 쇼군 요시노부는 오사카로 일단 물러나 전투 준비를 가다듬었다. 이미 근대식 해군을 보유하고 있던 쇼군은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포문을 열었다. 막부 군함이 시쓰마 번의 기선을 포격하고 지상군 병력을 움직였다. 운명의 1월3일, 교토와 오사카 사이의 도바(島羽)와 후시미(伏見)에 첫 전투가 벌어졌다. 교토와 오사카 상인들은 가게 문을 닫았다. 어느 쪽이 이길 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왕정복고 쿠테타를 일으킨 샷슈 연합군도 내심 떨었다. 객관적 전력이 열세였다. 우선 병력이 적었다. 성희엽 박사의 역저 ‘조용한 혁명’에 따르면 도바 지역에는 사쓰마군 2,000명, 후시미 지역에는 죠수군 1,800명, 도사군300명, 예비대로 사쓰마군 400명이 투입된 반면 막부 연합군은 두 지역에 1만5,000명을 깔았다. 막부군에는 신선조 같은 무술 고수집단도 있었다. 구 일본제국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히토츠바시대학 사회학부 교수를 지낸 고(故) 후지와라 아키라(藤原彰)의 ‘일본군사사사(日本軍事史·번역 서영식 육사 교수)’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만약 막부군에게 패할 경우 (삿슈는) 국왕을 여인으로 변장시켜 빼돌린 후 재기를 모색하는 방안까지 계획했다.’

무기의 질은 양쪽이 비슷했다. 유럽의 신식 소총으로 무장하고 미국제 캐틀링 기관총도 몇 문씩 갖고 있었다. 막부 직할군 일부는 1분당 2발이라는 당시 소총의 발사속도보다 훨씬 빠른 분당 10발을 쏠 수 있는 프랑스제 소총을 장비했다. 막상 전투의 양상은 달랐다. 전투 첫날 막부군이 밀렸다. 둘째 날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다 셋째 날부터 샷슈의 교토군이 승기를 잡았다. 나흘 간 이어진 전투의 말미에서는 막부 연합군을 배신하는 번(藩)도 나왔다. 결국 승리는 열세였던 왕정복고파 교토군에게 돌아가고 오사카성도 떨어졌다.


교토군이 예상 외의 승리를 거둔 요인은 크게 두 가지. 무엇보다 명분이 교토군에게 있었다. 둘째 날부터 교토군은 국왕의 금 깃발을 내걸고 싸웠다. ‘천황의 금기(金旗)를 지닌 군대와 싸우는 막부 연합군은 큰 충격을 받았다. 천황군에 대한 저항은 자신 뿐 아니라 자손 대대 역적으로 찍히는 불명예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교토군은 조직에서 앞섰다. 막부 연합군의 사무라이들은 칼을 들고 용감하게 돌격했으나 교토군 농민 출신 소총수들의 탄알 세례에 속절없이 쓰러졌다.

결정적으로 리더의 처신이 승부를 결정지었다. 나름대로 현명한 군주로 인정받던 쇼군 요시노부는 부하들에게는 결사항전을 외쳤으나 정작 전황이 불리해지자 야음을 틈타 오사카성을 빠져나가 미국 군함과 막부 해군 함정을 타고 도망친 뒤 더 싸울 게 없었다. 막부 연합군은 뿔뿔이 흩어졌다. 초전에서 승리한 교토군은 다른 수확도 얻었다. 관망하던 주변 영주들이 잇따라 교토군 휘하로 들어왔다. 일본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오사카와 교토의 거상들도 군자금을 내놓기 시작했다. 교토군은 적어도 서부 일본의 지지를 받으며 상대적이나마 재정적 안정을 누렸다.

서전의 승리는 두 진영의 처지도 바꿔 놓았다. 이전까지 대내외적으로 일본을 대표하던 막부는 역적으로 몰린 반면 왕정복고파 교토 군대는 새로운 정부군으로 자리 잡았다. 유신 정권이 수립된 것이다. 대세가 기울었어도 동북(도호쿠) 지역의 대다수 다이묘들은 막부를 지지, 전쟁은 이듬해 5월 중후반까지 이어졌다. 5만여 병력으로 불어난 새로운 유신 정부군은 이들을 차례 차례 물리쳤다. 우세한 해군력으로 북해도로 도망간 막부 잔존세력은 에도공화국(蝦夷共和國)을 세우며 항전했어도 전쟁의 와중에서 신형 함정을 사들인 유신정부군 해군에게 끝내 무너졌다.

주목할 대목은 전후 처리. 쇼군 요시노부는 근거지인 에도성(오늘의 도쿄)에서 최후의 일전을 벼르다 메이지왕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내전이 계속되면 중국과 인도처럼 외세의 발굽 아래 들어갈 것’이라는 설득에 정권을 내놓은 것이다. 메이지왕과 유신 정부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에도성에 들어갔다. 32세 한창 나이에 모든 권력을 포기하고 초야에 파묻힌 쇼군 요시노부는 근신조치 해제에도 정치와 담을 쌓고 사진 촬영과 낚시, 사냥, 바둑, 사이클 등에 몰두하며 76세에 생을 마쳤다.

유신 정부는 끝까지 저항했던 세력들의 영지를 몰수하고 주민을 이주시키는 강경책을 펼치면서도 관용을 베풀었다. 19개 번의 영주 목숨을 살려주는 대신 주요 가신(家臣·참모)을 처벌하고 상징적으로나마 영주의 지위와 가문의 승계도 인정했다. 유신 정부로서는 화합을 위해 관대한 처분을 내린 셈이나 이들 지역에는 아직도 지역 감정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일본 혼슈(本州)의 약 30%를 차지하는 도호쿠 지방의 경제개발이 늦어져 오늘날까지 낙후지역으로 남게 된 이유를 무진전쟁 패배로 인한 소외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일본을 통일한 유신 정부는 개혁의 길을 달렸다. 전국 260개번의 영주들이 영지를 국왕에게 도로 바치는 판적봉환(版籍奉還·1869)을 실시한 데 이어 아예 번을 폐지해 중앙집권화하는 폐번치현(廢藩置縣·1871)까지 단행했다. 얼마 뒤에는 무사 계급의 특권(신분 보장·녹봉 지급)도 없애 버렸다. 당시 2,000만명인 일본 전체 인구 가운데 지배층인 사족(士族)의 수는 약 30만명. 근대국가로의 개혁을 위해 이들은 스스로 특권을 버렸다.

일본이 아시아권에서 유일하게 서구화와 근대화에 성공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기득권 계급의 특권 포기. 일본이 수차례 내전이라는 진통을 겪으며 자신을 변혁하는 동안 조선은 잠잤다. 권력층이 자신과 가문의 배만 불리는 동안 나라의 힘은 점점 약해지고 조선은 결국 망국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오늘날은 다를까. 대한민국 기득권층의 인식과 행태가 구한말과 얼마나 다른지 모르겠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