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_창업을_응원해] <9> 아버지 공장 물려받아 매출 10억 '뷰티 놀이터' 만든 사연

허문숙 아바마트 대표

파독 광부 출신 아버지와 파독 간호사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돌이 지나 고국으로 돌아왔던 터라 독일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 사업 아이템을 찾던 아버지가 화장용 브러시를 제조해 독일로 수출하면서 사업에 나섰다. 중학교 때까지는 집 근처에 자리한 공장에서 부모님 일손을 도왔다. 아버지는 인건비 때문에 중국으로 공장을 옮겼지만 사업 환경이 급변하면서 판로를 찾지 못해 애를 먹었다. 어렸을 때부터 유달리 당찼던 둘째 딸을 믿음직하게 여겼던 아버지는 브러시를 활용해 사업을 해보라 권했고, 24세 젊은 나이에 창업의 길로 들어섰다. 지금은 화장용 브러시를 비롯해 립스틱, 아이새도우 등 색조 화장품으로 품목을 넓히며 연 매출 10억원 규모의 ‘뷰티 놀이터’를 만들어가고 있다.

국제시장’의 한 장면처럼 맺은 부부의 연

허문숙(33·사진) 아바마트 대표의 특별한 창업 스토리다. 그의 부모님 이야기로 들어가면 더욱 특별해진다. 마치 영화 ‘국제시장’ 속 한 장면 같다. 1970년대 초반 독일로 건너가 광부로 취직한 아버지, 간호사로 일했던 어머니는 현지 한인들이 세운 독일어 교실에서 선생님(어머니)과 학생(아버지)으로 만나 사랑을 키웠다. 당시 독일어에 익숙하지 않은 광부들이 간호사들에게 언어를 배우며 현지에 적응했다고 한다.

타향살이의 아픔을 서로 보듬어주면서 사랑을 키웠고 1980년 먼 이국 땅에서 백년가약을 맺었다. 없는 살림에 결혼식은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살림을 합쳤다. 그리고 이듬해 첫 딸을 얻었다. 허 대표보다 3살 많은 언니다. 허 대표가 태어났을 즈음 아버지는 오랜 광부 일로 건강에 문제가 생겨 한국과 독일을 오가며 할 수 있는 사업 아이템을 찾았다. 손톱깎이부터 플라스틱 장난감, 과자, 양념장, 양말 등 당시 인건비가 저렴했던 한국에서 제조해 서독으로 수출할 수 있는 아이템이면 손을 댔다고 한다.

파독 광부 출신의 아버지와 파독 간호사 출신의 어머니는 머나먼 독일에서 만나 부부의 연을 맺었다. /사진제공=허문숙 대표
그러다 화장용 브러시를 하는 게 어떠냐는 독일인 사업가의 제안을 받고 합작회사를 세운 후 1985년 고국 땅을 밟았다. 마땅히 기거할 곳이 없었던 그녀의 가족은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에 자리한 친할머니 댁에 들어갔다. 3형제 중에 장남이란 이유로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돈 벌러 독일로 떠났던 큰 아들에게 애틋할 만도 했지만 할머니는 아버지보다는 대학 나와 번듯한 직장 다니는 삼촌들이 더 귀한 것처럼 보였다.

“아버지가 깊은 갱도에 들어가 목숨을 담보로 번 돈으로 삼촌들을 교육시킬 수 있었는데도 할머니가 유달리 아버지한테는 인색한 것처럼 보여 어린 제 눈에 무척이나 야속했어요. 게다가 아들을 낳은 삼촌들과는 달리 딸 둘만 낳은 어머니에 대한 할머니의 구박이 유별났어요.”

아버지의 브러시 공장, 그리고 어린 시절



견디다 못한 아버지는 가족을 이끌고 단칸방을 얻어 나왔다. 당시 아버지의 브러시 공장이 자리를 잡아가던 시기라 허 대표의 어린 시절은 공장 마당 한 켠에 앉아 햇볕에 브러시 솔을 말리거나 솔의 빠짐 상태를 확인했던 기억이 많다. 독일 현지법인은 ‘바바라호프만’, 국내 제조공장은 ‘한서화장품기구’라는 법인명을 썼다.

“아버지는 독일을 오가며 일을 하셨는데, 합작법인을 세운 호프만 할아버지와 가족처럼 지내셨다고 말씀하셨어요. 호프만 씨가 첫 딸을 유달리 예뻐해서 딸의 이름인 바바라를 회사명에 붙였을 정도였으니까요. 유치원 다닐 때는 수출하는 공장을 처음 본다며 동네 사람들이 몰려와 구경을 했었죠. 물건을 싣고 항구로 향하는 컨테이너가 오가면 모두들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곤 했죠.”

사업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허 대표 가족은 단칸방에서 벗어나 단독 주택으로 옮겼다. 하지만 온 가족이 공장 일에 매달려 지냈던 탓인지 ‘우리 집이 잘 산다’ 혹은 ‘우리 아빠는 사장님이니까 우리 집은 부자’라는 등의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88 서울올림픽을 치르면서 대한민국의 경제 규모가 커졌고 인건비도 덩달아 올랐다. 해를 거듭할수록 인건비가 높아지자 이를 견디지 못한 아버지는 1990년대 후반 한국 공장을 정리하고 중국 심천으로 건너갔다. 허 대표는 “당시 중국 공장에서는 주력 제품인 화장용 브러시는 물론 장난감 등 다양한 품목을 제조했다”며 “아버지가 항상 해외 출장을 다녔기 때문에 유년 시절을 가족들이 함께 했던 기억이 거의 없는 것 같다”고 회상했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독일 파트너인 호프만 씨가 세상을 뜨면서 회사를 자녀들에게 넘겼고, 호프만의 자녀들과 아버지 사이에 분쟁이 생기면서 사업 자체가 흔들렸다. 독일 수출 라인에 위기가 발생한 데다 설상가상으로 심천 공장의 동업자와도 문제가 생기자 아버지는 톈진으로 넘어갔다. 법인명을 ‘한서코스메틱기구’로 정하고 브러시 한 품목에 올인했다.

화장을 즐겼던 여고생, 압구정에서 패션을 만나다



어린 시절 허 대표는 공장 일을 도우며 자란 평범한 소녀였다. 중학생 때도 완제품 검사를 하거나 퍼프 조립을 하면서 일을 도왔고 공장이 중국으로 이전한 후에는 용돈을 벌기 위해 패스트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사고 싶은 게 있으면 부모에게 손을 벌리기보다는 직접 벌어 사야 한다는 경제 관념이 일찌감치 자리를 잡았던 것. 외모에 관심이 높아지는 중고등학교 시절엔 공장에서 생산한 브러시를 활용해 화장도 많이 했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미술을 유달리 좋아해서인지 브러시를 활용해서 화장하는 게 너무 재미 있었어요. 저희 집에 놀러오는 친구들도 브러시로 화장하곤 했는데, 그때도 너무 화장이 잘 된다며 좋아했던 기억이 납니다.”

패션과 화장에 유달리 관심이 많던 그는 2003년 한양여대 패션디자인과에 입학했다. 대학 다니는 동안에는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 편집샵에서 일했다.

“그때만 해도 로데오 거리가 패션의 중심이었어요. 연예인들이 많이 찾는 데다 패션 트렌드의 중심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옷 가게들이 잘 됐지요. 당시 아르바이트를 하던 매장 사장님이 편집샵으로 세 곳을 운영했는데, 제가 대학을 졸업하니까 한 곳을 맡기셨어요. 제 센스가 마음에 든다면서 직접 운영해 보라고 권하신 거죠. 그게 저한테는 첫 번째 사회 생활이었던 셈이죠.”

그때가 2006년이었다. 일상은 단순했지만 육체적으로는 힘들었다. 하루 종일 하이힐을 신고 서서 고객 대응을 했고, 저녁 10시쯤에는 물건을 고르러 동대문으로 건너갔다. APM, 디자이너클럽, 청평화시장 등의 단골 거래처를 돌면서 팔 만한 제품을 골랐고 새벽까지 커다란 옷 꾸러미를 끌고 다녔다. 2년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정신 없이 지냈다.


대학을 졸업한 허문숙 대표는 남다른 패션 감각과 끼를 살려 압구정 로데오 거리의 편집샵에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사진제공=허문숙 대표
“몸이 많이 축났어요. 하루 종일 서서 일을 하니까 몸도 많이 부었고, 건강도 나빠졌지요. 좀 쉬면서 해외에도 나가고 싶었습니다. 언니가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갔다 온 게 너무 부러워서 저도 해외에 보내 달라고 부모님을 졸랐어요. 아버지가 인도로 가는 건 어떠냐고 하셨죠. 인구도 많고 시장도 뜰 것 같으니 가서 시장조사나 할 겸 거기서 학교를 다니라고 권하셨던 거죠.”

2년간 정들었던 압구정동과 작별하고 2008년 초반 인도로 건너갔다. 뭄바이 인근 뿌네(Pune)에 자리한 인터내셔널 스쿨의 랭귀지 과정에 들어갔는데, 한인 학생들은 대부분 허 대표보다는 어렸다. 자연스럽게 또래의 외국인 친구들과 친해졌고, 그들과 남인도 지역을 여행을 다니면서 자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8개월 정도 지나자 귀국 시기가 돌아왔다. 아버지는 한국에 들어가기 전 톈진 공장에 들르라고 당부했고, 그때 처음으로 중국 공장을 직접 봤다. 허 대표는 공장에 들어섰을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지난 2008년 인도로 어학연수를 떠났을 당시 학교 친구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사진제공=허문숙 대표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도 열악하고 힘든 환경에서 아버지가 지냈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았어요. 아버지한테 그 동안 너무 고생하셨다고, 이제는 고생을 덜 하셨으면 좋겠다고 하니까 아버지가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나도 이제 너무 힘이 드는데 네가 브러시를 팔아서 사업을 꾸렸으면 좋겠다구요. 너무 뜻밖이었죠. 아버지 사업을 이어 받을 생각은 전혀 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게다가 바이어도 많이 끊겨서 사업 자체가 어떻게 될지 불확실했거든요. 하지만 아버지가 모든 것을 다 바친 공장을 그냥 저렇게 놔둘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 자신도 공장에서 브러시 제조를 도우면서 성장했으니까요. 가업승계라는 거창한 의미보다는 좋은 제품이니까 ‘한 번 제대로 해 보자’는 아집 같은 게 들었던 거죠.”

‘뷰티 놀이터’ 아바마트, 세상에 나오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사업자 등록부터 했다. 2008년 10월 ‘아바마트’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아바마트라는 사명은 아버지가 지었다. 알파벳 A와 B를 조합한 것으로 전세계 누구라도 ‘아바(ABBA)’라는 이름을 들으면 읽기 쉽고 기억하기 쉬운 브랜드로 기억하길 바란다는 희망을 담았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이미 바비 브라운이나 맥 등 외국 브랜드가 메이크업 전용 브러시 시장을 독점하고 있었던 시절이라 쉬운 사업은 아니었다. 허 대표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화장을 했고 압구정동에서 편집샵을 하면서 패션 감각만큼은 남들 못지 않다고 자부했기에 자신 있었다.
허문숙 대표가 중국 톈진에 자리한 부친의 브러시 공장에서 공장 관계자와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제공=허문숙 대표
“우리 집이 브러시 사업을 하니까 일상적으로 메이크업 도구를 다뤘지만 친구들 중에서도 브러시 자체를 생소하게 여기고 사용법조차 모르는 친구들이 태반이었어요. 저희 집에 놀러와서 처음으로 브러시를 만든 애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요. 외산 브랜드는 하나에 5만원을 호가하니 10~20대 젊은 여성들에게는 가격적인 부담도 됐던 거죠. 가격 부담을 낮추면서 손쉽게 쓸 수 있는 메이크업 브러시로 자리를 잡으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가격대를 확 낮춘 만큼 로드샵이 아닌 온라인 몰에서 승부를 걸어야 했다. 그는 포토샵 학원 새벽반부터 등록했다. 새벽에 학원을 다녀온 후에는 컴퓨터 앞에 앉아 제품 사진을 하나씩 등록했다. 처음에는 사진이 원하는 스타일로 나오지 않아 유명 스튜디오에 가서 눈 동냥을 하면서 테크닉을 익혔다.

“초창기에는 하루에 주문이 한 건조차 없을 때도 많았어요. 택배사의 운송장을 계약할 때 다음 날 출고되는 물건 개수가 25개를 넘어야 주소지를 출력해 주거든요. 그게 아니면 제가 수기로 일일이 써야 하구요. 그래서 그땐 매일 밤마다 주문이 25개만 넘게 해달라고 기도하기도 했었죠. 주문이 들어오면 기분이 너무 좋아서 손 글씨로 감사하다고 편지를 써서 제품에 동봉해 보내기도 했었구요.”(웃음)

외국산에 비해 5분의 1 수준의 저렴한 가격에다 품질까지 좋다 보니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1년쯤 지나자 매출이 상승 곡선을 그렸고 2년차에 이르렀을 때 1,500만원 넘는 돈이 모였다. 그 정도면 작은 사무실 하나 빌릴 수 있고, 두 세 달치 직원 월급을 줄 정도는 됐다 싶었다.
허문숙 대표가 고객에게 아바마트가 생산한 브러시 사용법 등을 시연하고 있다. /사진제공=허문숙 대표
2010년 10월 신대방삼거리에 사무실을 얻고 법인으로 등록한 후 본격적인 사업에 나섰다. 이제는 보다 적극적으로 사업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유명 뷰티 블로거들에게 제품들을 보냈다. 블로거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가성비 높은 브러시라며 호평이 쏟아졌고, 2011년말께 매출이 1억원으로 껑충 뛰었다. 하지만 브러시만으로는 규모의 경제를 유지할 수 없었다. 그는 브러시와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아이템으로 색조 화장품을 선택했다.

화장품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다



“화장품은 공장에 주문해야 하는 초기 물량이 일정 규모 이상은 돼야 하기 때문에 돈이 많이 들어요. 화장품 OEM(주문자상표부착) 기업과 협업을 통해 가장 손쉬운 립스틱부터 시작해서 아이새도우 등 색조 화장품을 다양하게 갖춰갔지요. 기존 한국의 뷰티 시장은 핑크색 공주풍 제품들이 대부분이라 저희는 차별화 콘셉트를 ‘건강한 아름다움’으로 잡고 이미지를 차별화했습니다. 저처럼 평범하지만 개성을 중시하는 여성들을 위한 뷰티 제품으로 포지셔닝하고 싶었던 거죠. 특히 우리나라는 화장품 자체의 퀄러티는 좋은 편이라 콘셉트를 차별화하는 게 포인트라고 판단했거든요.”

2015년 프랑스에서 개최된 뷰티박람회에 참가했을 당시 아바마트의 부스 전경. /사진제공=허문숙 대표
지난해 매출은 10억원에 달한다. 화장품 비중이 55%에 달하며 이미 브러시 비중을 넘어섰다. 이밖에도 퍼프와 브러시 거치대 등 메이크업 툴이 20% 가까이 차지하고 있다. 올해는 글로벌 시장 진출에 박차를 가할 생각이다. 카페24를 통해 구축해 놓은 영문 사이트에 각국 소비자들이 들어오는 만큼 5% 수준인 해외 고객 비중을 늘려나가는 것도 중장기적인 목표다.

글로벌 시장에 박차를 가하면서 허 대표는 연초부터 분주하다. 이달 중순 필리핀에서 K뷰티 기업들을 중심으로 열리는 뷰티 파티에 참여하는 데 이어 2월에는 미국 대형 백화점 체인인 노스트롬에 마련되는 한국 화장품 뷰티전에도 참가한다.

허 대표가 그려가고 싶은 아바마트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아바마트는 누구나 쉽게 예뻐지는 ‘뷰티 놀이터’를 지향하고 있어요. 전문적으로 메이크업을 배우지 않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젊은 여성들이 화장을 쉽게 따라 하려면 가격 진입 장벽이 낮고 화장하는 재미가 있어야 하거든요. 그건 화장품 자체에 디자인적인 요소를 부여하는 것은 물론 요즘 젊은이들에게 친숙한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을 통해 다양한 화장 팁을 제안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고 있어요. 저희의 주력 고객들이 한 살 두 살 연령대가 높아지는 데 맞춰서 프리미엄 브랜드도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는 창업에 나서는 후배들에게는 ‘긍정의 에너지’를 주문했다. 그는 “1차적으로는 사업 아이템과 그에 맞는 타깃 고객층을 설정하는 게 중요하지만, 그 모든 과정을 끌고 가는 힘은 바로 긍정의 에너지인 것 같다”면서 “처음에 사업을 시작했을 때는 ‘버티는 게 중요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 솔직히 몰랐다. 사업을 하면서 지치고 힘들어서 그만 두고 싶을 때가 반드시 생기는데 그럼에도 스스로에게 긍정의 에너지를 불어 넣어주면서 그 순간순간을 버티고 견뎌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더불어 최고경영자(CEO)로서 자신의 결정과 판단에 자신감을 가지라는 조언도 덧붙였다

“CEO는 어떻게 해서든 정답을 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혹여 그 선택이 틀릴 수도 있지만 (정답인지 오답인지 결과에) 연연하다 보면 결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요. 항상 플랜B와 플랜C를 세워 놓고 직원들과 끊임 없이 커뮤니케이션을 하면서 이들을 격려하고 이끌어가야 합니다. 내가 이끌어주는 방향이나 방식이 재미있고 즐겁다면 혹여 당장의 일이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함께 위기를 극복해 나갈 수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정민정기자 jminj@sedaily.com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