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와치] 전문경영인 모신 기업, 소통 원활하고 매출 쑥쑥 "오너 갑질? 딴세상 얘기죠"

중기업계 전문경영인 전성시대
한샘·바른컴퍼니·한글라스...
과감한 투자·혁신 성장 이끌어
올해에도 코스맥스 등 속속 영입
기업 지속성·일자리 창출 위해
전문경영인이든 오너 가족이든
체계적 승계시스템 뒷받침 필요

윤영호 바른컴퍼니 사장.


결혼을 앞둔 직원이 사장실에 찾아간다. 인생의 선배인 사장님에게 결혼 생활의 조언을 구하고 고민을 털어놓는다. 사장님은 직원에게 ‘5가지 사랑의 언어’라는 책을 선물한다. 매달 생일인 직원들도 사장님을 만난다. 함께 밥을 먹으며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사장님은 직접 쓴 생일편지를 직원에게 전달한다. 파주 본사 내에 마련된 카페와 체육관은 직원과 가족까지 모두 이용할 수 있다. 청첩장으로 유명한 바른컴퍼니의 이야기다.

지난 2014년부터 KT 출신 윤영호 사장이 전문경영인으로 회사를 이끌면서 따뜻한 사내 문화가 만들어졌다. ‘직원들이 행복하지 않으면 회사의 미래는 없다’는 윤 사장의 철학 덕분이다. 올해로 경영 4년 차를 맞은 윤 사장은 사내 문화 개선뿐만 아니라 기업 영업구조도 바꿨다. 기존 오프라인 유통 구조를 온라인으로 전환시키면서 비용을 낮추고 수출 시장 확장에도 총력을 다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미국 문구박람회에서 바른컴퍼니의 제품이 베스트 신상 카드 상을 받기도 했다. 윤 사장은 “두바이를 비롯한 중동·아프리카 등 다양한 시장을 눈여겨보고 있다”며 “태국에는 온라인 사이트를 개설해 본격적으로 영업을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바른컴퍼니는 주력인 청첩장 사업에 더해 신사업으로 웨딩 선물용품·답례품 쇼핑몰 사업도 시작했다. 이를 통해 종합 웨딩플랫폼 업체로 도약하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다.

◇전문경영인 영입 후 성장하는 기업들

최근 들어 중소기업계를 중심으로 업종이나 규모와 상관없이 회사를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고 전문경영인에게 맡기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전문경영인이 사업을 운영하면서 실적이 좋아지는 경우가 많아 이들에 대한 직원들과 업계의 평가도 좋다.

최양하 한샘 회장.


한샘이 대표적인 사례다. 최양하 한샘 회장은 국내 최장수 전문경영인으로 꼽힌다. 대우중공업에서 엔지니어로 직장생활을 시작한 후 한샘으로 자리를 옮겨 이후 공장장과 영업이사 등 요직을 거쳐 1994년 대표에 취임했고 지금까지 한샘을 이끌어왔다. 대표 취임 당시에는 한 해 매출이 1,000억원대에 불과한 조그마한 가구회사였지만 현재는 1조7,000억원대의 종합 홈 인테리어 회사가 됐다. 한샘은 전문경영인 체제를 굳힐 것으로 보인다. 2015년에는 강승수 한샘 사장이 부회장으로 승진해 최 회장에 이어 두 번째로 부회장 자리에 올랐다. 한샘은 조창걸 창업주이자 명예회장이 자녀들에게 준 지분이 총 2.92%에 불과하다. 최 회장의 뒤를 이을 ‘한샘 2기 경영’도 전문경영인이 맡을 것으로 예상되는 이유다.


커피전문점 할리스커피도 2013년 회계사 출신인 신상철 대표를 전문경영인으로 영입한 후 3년 만에 매출과 영업이익이 모두 늘었다. 신 대표가 단기적인 외형 성장 대신에 내실 경영 강화에 주력한 덕분이다. 소비자에게 맛있고 신선한 커피를 선보이기 위해 자체 로스팅 센터와 물류센터를 구축하고 직영 사업장을 늘렸다. 또 교육 아카데미 시설을 설립해 기존에 만들어진 브랜드 이미지를 새롭게 바꿨다. 이에 따라 지난해 1·4분기에 할리스는 최대 이익을 기록했다.

이용성 한글라스 대표.


유리 제조업체 한글라스도 2014년 이용성 한국다우코닝 사장을 전문경영인으로 선임한 후 6개월 만에 흑자기업으로 탈바꿈했다. 구원투수로 등장한 이 대표는 과감한 투자와 혁신으로 성장을 이끌어냈다. 총 550억원을 투입해 국내 최대 규모의 코팅유리 가공공장을 완공해 기능성·친환경 유리를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 한글라스는 5분기 연속 흑자 행진을 기록하며 지난해 상반기에는 1,343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올 들어서도 전문경영인을 전진에 배치하는 기업들이 줄을 잇고 있다. 화장품 전문 생산 기업 코스맥스에서 올해 승진한 임원은 모두 전문경영인이다. 김재천 코스맥스 사장은 부회장으로 승진해 수출을 비롯한 경영 전반을 총괄하고 최경 코스맥스차이나 총경리 겸 사장도 부회장으로 승진해 중국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업무를 책임진다. 또 김준배 코스맥스비티아이 부사장은 사장으로 승진해 해외 영업 외에 계열사 관리를 담당한다. 전문경영인에게 책임과 권한을 부여하고 이경수 코스맥스 회장은 그룹 전반 총괄 경영을 맡을 방침이다.

홍준기 경동나비엔 사장.


1998년부터 쭉 전문경영인 체제를 유지해오고 있는 경동나비엔은 올해 홍준기 전 코웨이 대표를 신임 사장으로 영입했다. 홍 사장이 정수기 중심의 코웨이를 생활환경기업으로 변모시키며 브랜드 이미지를 확장한 만큼 해당 노하우를 기반으로 보일러 기업에서 생활환경 에너지솔루션기업으로 성장하겠다는 계획이다.

◇경제 성장기 이후 경영권 승계 시스템 부재

전문경영인이 늘어나는 것은 국내 경제 구조상 당연한 흐름이기도 하다. 경제 성장기였던 1970년대 이후 창업한 오너들이 이제 은퇴를 준비해야 할 시점인데 자녀들에게 사업을 승계할 시스템이 마련돼 있지 않다. 중소기업은 대기업과는 달리 최고경영자(CEO) 1인 위주로 경영이 이뤄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경영권 승계의 주된 채널인 오너 2·3세들이 승계에 별 관심이 없거나 제대로 경영 수업이 이뤄지지 않아 적임자가 없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다 상속세 부담 때문에 가업 승계가 잘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것도 전문경영인 체제를 가속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 중견기업 관계자는 “회사를 키우는 동안 아버지가 고생한 모습을 지켜봐서인지 가업을 물려받지 않으려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며 “승계를 고려한다 해도 장인정신과 가업의식이 강한 일본과 달리 국내 중소기업 2·3세들은 주력사업 전환을 고려하는 경우가 더 많다”고 말했다.

김세종 중소기업연구원장은 “2000년 초반 정보기술(IT) 버블이 꺼진 뒤 이를 회복하는 데 10년이 넘는 시간이 걸리면서 국내 중소기업의 경영자 중 30~50대 허리세대에 공백이 생겼다”며 “60~70대의 중소기업 CEO들이 가족이든 전문경영인이든 후계구도를 만들 수 있는 시스템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기존 기업의 지속성은 물론 일자리 문제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백주연기자 nice89@sedaily.com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