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만여 장의 목판이 하나같이 똑같은 모양으로 제작돼 7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리 곁에 머물고 있는 고려 대장경은 세계적 문화유산이다. 세련된 곡선과 아름다운 장식이 특징인 가야의 철판 갑옷, 15세기 당시 그려진 세계 지도 중 가장 훌륭한 지도로 평가받는 혼일강리역대국지도 또한 반만년이나 되는 역사를 지켜 온 우리 민족이 자랑할 만한 과학 문화재다.
이렇듯 우리의 과학 문화재는 굳이 나서 뽐낼 필요가 없을 정도로 우수하지만 정작 우리는 어떤 과학 문화재를 가졌는지, 그 문화재는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에 대해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있을까. 스스로 자문해볼 필요가 있는 물음이다.
고려 대장경 목판./사진제공=사이언스북스
문제는 서유럽의 과학 기술 문명에 빠져 정작 우리의 우수한 과학 기술은 잊고 지내는 일들이 많다는 데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과학 문화재의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은 더욱더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60년 세월 동안 발로 뛰고 눈으로 보고 확인하고, 측정하고 머리로 생각하고 격렬하게 토론하고 자료를 찾아 고증하는 작업을 이어 온 이가 있다.
‘우리 과학 문화재의 한길에 서서’는 제목처럼 우리가 물려받은 과학 문화재에 천착한 저자가 우리 과학 문화재의 역사를 온몸으로 기록한 과학 문화재 백과사전이다. 오랜기간 문화재 위원으로서 ‘천상열차분야지도’, ‘혼천시계’ 등 15개의 과학 문화재가 국보와 보물로 지정되는 일의 기획과 실무, 그리고 연구 책임을 맡아 과학 문화재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던 저자가 이번엔 한국 과학 기술사 전체를 아우르고자 하는 야심을 이 책 한 권에 고스란히 담아냈다.
한국 과학 기술사 연구의 역사 전체를 다루는 만큼, 청동기 시대의 과학 문화재를 시작으로 삼국 시대와 통일 신라 시대, 그리고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의 과학까지 통사적으로 다룬다.
혼일강리역대국지도./사진제공=사이언스북스
저자는 단순히 역사를 기술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과학 기술사에 대한 지평을 넓힐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우리나라의 청동기 시대 기원을 과감하게 기원전 15세기 이전으로 올려 볼 수 있지 않겠냐는 제안은 눈여겨 볼 부분이다. ‘한반도의 청동기 기술이 중국이나 중앙아시아에서 건너온 기술만이 아니라 한민족이 활동 무대로 삼던 한반도 북부와 요동과 만주 지역의 문명권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기술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추정도 흥미롭다. 아울러 고대인이 봤을 별자리가 새겨진 고인돌들을 하나의 과학 문화재로서 재인식하자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동안 학문적으로 제대로 규정조차 되지 못했던 고구려, 백제, 가야의 과학 기술사를 다룬 장을 통해서는 고대 한국의 과학 기술사를 동아시아 과학 기술사로 확대하는 장대한 전망을 엿볼 수 있다. 고구려의 고분 벽화 곳곳에 숨어 있는 흔적들에서 고구려의 과학 기술을 읽어 내고, 일본까지 흘러간 가야와 백제의 철기 유물에서 고대의 철기술을 찾아내고, 일본 교토와 나라의 청동대불과 거대한 불탑들에서 고대 백제의 요업 기술과 수학, 그리고 건축술을 읽어 낸다.
가야의 철판 갑옷./사진제공=사이언스북스
저자는 “내가 쓴 이 글들은 그 한 조각이고 흩어진 고리들 중의 하나”라고 스스로를 낮추면서 이렇게 강조한다. “어찌 보면 근대 서유럽의 과학 기술 유산처럼 화려하고 정밀하지 못한 것들이 많다. 그러나 우리가 물려받은 유산은 결코 격이 낮거나 세련되지 못한 것이라 할 수 없다. 반성하고 새롭게 조명하고 재인식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3만5,000원
/박성규기자 exculpate2@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