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영국은 죄수를 수용하는 데 골머리를 앓았다. 인구 급증과 산업혁명, 급속한 도시화를 거치며 각종 범죄도 늘어났으나 수용 시설이 마땅치 않았다. 감옥이 부족해 웬만한 중죄(重罪)는 사형에 처하고 퇴역 군함을 개조해 선상 감옥으로 활용해도 밀려드는 죄수를 수용하기 어려웠다. 공리주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이 1명의 간수로 수많은 죄수를 감시할 수 있는 원형 감옥(Panopticon)을 구상한 게 바로 이 시기다. 감옥이 그만큼 부족했다.
영국은 아쉬운 대로 북미 지역에 감옥을 세웠다. 17세기부터 18세기 후반까지 뉴잉글랜드 지역에 영국이 보낸 죄수는 약 6만 여명. 영국은 수용 시설 부족과 신대륙 개척에 필요한 노동력 제공이라는 두 가지 목적에서 죄수를 내보냈다. 그러나 13개 식민지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1776)한 뒤부터는 송출할 통로가 막혔다. 고민하던 영국의 대안은 호주. 땅덩이 크기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호주를 유형지로 삼았다.
영국 정부가 당초 눈여겨 본 후보지는 캐나다와 남아프리카. 미국 독립전쟁에서 영국 편에 섰던 왕당파 식민지인들을 정착시키고 죄수들을 수용할 땅으로 캐나다를 점찍었다. 하지만 생각은 바로 바뀌었다. 프랑스와 끊임없는 영토 분쟁을 벌이는 마당에 영국 죄수들이 프랑스 편에 붙을 수도 있다고 염려했기 때문이다. 남아프리카는 네덜란드의 영향력이 강한데다 향토병과 농업 부적합 지역이라는 이유로 후보지에서 탈락했다. 영국이 마지막으로 선택한 지역이 바로 불모의 호주 대륙이었다.
거리가 너무 멀다는 지적이 나왔어도 영국은 밀어 부쳤다. 대신 식량과 신선한 식수를 공급받을 수 있는 중간 기착지 3곳을 끼어 넣었다. 카나리아 제도의 산타 크루즈항과 브라질 지역의 리우데자네이루항,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을 거쳤다. 기항할 때 마다 충분한 휴식을 취한 덕분에 선단은 비교적 큰 희생 없이 호주 대륙에 닿았다. 포츠머스 항구를 출발할 때 1,420명이 호주 도착 시에는 1,336명으로 줄었으나 항해 도중에 죽은 사람 수는 예상보다 훨씬 적었다. 제 1선단의 승객 가운데 죄수는 절반을 약간 웃도는 정도였다.
보타니만에 정박한 선단은 여장을 채 풀기도 전에 뱃머리를 북쪽으로 돌렸다. 지형이 험난해 정착촌 건설에 부적합하다는 견해가 나오고 프랑스 선박이 출몰했다는 첩보에 따라 터전을 옮기기로 의견을 모았다.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간 제 1선단은 26일 시드니만에 짐을 풀었다. 영국의 호주 식민경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제 1선단을 파견하는 비용으로 8만4,000 파운드의 예산을 들인 영국은 이듬해 제 2선단을 보냈다. 죄수 유배가 중단된 1868년까지 호주로 온 영국 죄수는 약 16만2,000여명. 오늘날 호주 인구 2,433만명의 20%는 이 시기에 도착한 죄수들의 후손으로 추정된다.
경범죄라고 하지만 죄인들로 넘쳐 나던 호주는 청정 선진국가로 손꼽힌다. 1인당 국민소득이 5만 달러를 초과(51,642달러)하고 환경 보호에도 앞장서고 있다. 호주의 성공 비결은 크게 두 가지. 먼저 ‘사면’을 통한 사회 화합책이 성과를 거뒀다. 1808년 술의 정량 보급을 요구하며 시작된 병사들의 반란에 죄수들이 호응한 ‘럼주 반란’이 계기였다. 당시 뉴사우스웨일스 총독은 바운티호 선장 출신인 윌리엄 블라이. 선원들을 함부로 대해 선상 반란(바운티호의 반란·1789)을 야기했던 인물이다.
권위주의와 불통의 상징이던 블라이가 해임되고 새로 임명된 라클란 매쿼리 총독은 수습과정에서 죄수들의 죄를 사면하고 관리로 등용하는 우대정책을 썼다. 런던은 죄수를 공무원으로 임명한 매쿼리의 결정에 경악했어도 호주는 빠르게 커졌다. 죄수들이 희망을 갖게 된 덕분이다.
두 번째 동기는 1851년 시작된 골드 러시. 절정기에는 매주 2t의 금을 쏟아내던 호주에는 더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44만명을 밑돌던 인구가 금광 발견 10년이 지난 1861년에는 자발적 이민 급증 덕분에 115만명 이상으로 불어났다. 유입된 인구는 호주의 경제 성장에 불을 붙였다. 섬 전체가 감옥이나 마찬가지였던 호주는 이 때부터 유형지로서의 이미지보다는 경제 성장지역으로 세인의 뇌리에 새겨졌다.
산업혁명의 찌꺼기, 인생 낙오자들을 본국과 격리하려고 건설한 호주는 처절한 자기 부정을 통해 성장할 수 있었다. 전과자 격리와 차별 정책이 계속됐다고 가정해보자. 호주는 갈등과 분열의 대륙으로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호주의 초기 역사가 우리에게 말을 거는 것 같다. 권위의식과 오기로 뭉쳐진 블라이 같은 리더는 파국을 가져오기 마련이다. 블랙리스트 따위의 감시와 차별보다 우대와 격려의 힘이 훨씬 크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