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대목 사라진 유통가]"가격 묻는 손님도 없어...이런 설은 생전 처음"

백화점 정육·청과매장 최대 40% 할인에도 개점휴업
대형마트 설연휴 직전 의무휴일까지 겹쳐 '노심초사'
전통시장도 대부분 가게 텅텅...K세일행사 효과 없어

연휴를 1주일 앞둔 지난 22일 서울 남대문 시장이 한적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이지윤기자
청탁금지법(김영란법) 시행 이후 첫 설 명절을 앞두고 서울 롯데백화점에서 한우, 전복 등 고가의 선물 코너가 썰렁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송은석기자
지난 21일 찾은 에잇세컨즈 명동점 매장 2층 여성복 코너. 직원만 매장을 정리하고 있다. /박윤선기자
지난 21일 서울 명동의 한 백화점 설 선물세트 매장. 설이 한 주 앞으로 다가오며 개인 손님들이 몰려야 할 시기였지만 ‘명절 특수’를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이날 오후 10여분간 선물 매장 전반을 살폈지만 백화점의 3대 주력 선물세트인 정육·수산·청과 매장에는 가격을 묻는 손님마저 없었다. 기간 중 소비자의 지갑이 열린 곳은 5만원 이하 상품이 주류인 차 선물세트 매장이 유일했다. 저녁 시간으로 갈수록 고객이 늘어나며 백화점 전반이 북적였지만 주요 선물세트 매장은 여전히 손님보다 직원이 많아 보였다. 지난주 백화점들이 사상 최초로 국내산 대표 선물세트를 최대 40%까지 할인 판매하기 시작했지만 상황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시행 및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 등의 영향으로 설 선물시장 전반이 신음하고 있다. 소비 및 선물 자체를 꺼리는 분위기가 형성되며 최대 선물시장인 백화점은 물론 대형마트와 전통시장 전반에서 기대했던 설 특수가 실종되는 분위기다.

백화점 주요 선물코너에서는 매출이 절반 이상 줄었다는 한숨이 잇달아 터져 나왔다. 한 백화점 정육 선물코너 직원은 “가격이 지난해보다 확실히 내렸다고 입을 모으지만 문의만 간혹 있을 뿐 구매까지 이어지지 않는다”며 “이번 설처럼 명절 분위기가 안 나는 설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청과 업체 직원은 “며칠째 헛장사 수준으로 절반 이상 매출이 줄었다”며 “사과·배 구매가 끊기며 대표 품목마저 5만원대 한라봉으로 바뀌었다”고 눈물을 글썽였다. 그나마 고객이 모이는 전통 건강식품 매장도 큰 차이는 없었다. 매장 직원은 “단체 고객이 끊긴데다 50개씩 구입하던 고객도 15~30개 남짓으로 양을 줄였고 개인 손님이 주류가 되면서 단가 역시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며 한숨을 쉬었다.

백화점 설 선물시장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가장 큰 요인은 김영란법의 적용을 받는 평균 20만~30만원대의 높은 가격에 있다. 정육세트의 경우 50만원선인 대표 구이세트를 27만원으로, 21만원선인 제수세트는 9만8,000원까지 가격을 내렸지만 실질적인 구매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매장에서 만난 한 고객도 “집에 들어오는 선물도 거의 끊긴데다 부모님 선물을 제외한 선물용은 구매를 하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대형마트에도 기대했던 반사효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5만원 이하 선물이 전체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탓에 법 시행에 따른 신장세를 기대했지만 되레 역신장이 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특히 설 직전 주말로 개인 제수용품 구매가 본격화되는 22일 전체 대형마트의 80% 이상이 의무휴업을 실시하게 돼 내부적으로도 망연자실한 분위기다.


마트 관계자는 “선물 숫자를 줄이더라도 품격은 떨어뜨리지 않기를 원하는 게 추세”라며 “백화점 선물세트 시장이 불황인데 마트라고 호황을 누리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대형마트 매장에서 만난 한 고객은 “5만원 이하의 선물이 크게 강화됐지만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아 구입하지는 않았다”며 “어설픈 선물을 하느니 나중에 식사 대접 등을 하는 게 예의인 것 같다”고 말했다.

전통시장은 더욱 심각한 분위기다. 지난해 말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본격화된 소비 한파가 설 명절까지 이어지며 매장 전반이 얼어붙었다. 20일 저녁 광장시장은 중심가에 위치한 유명 전집·분식집 거리 가게 두세 곳을 제외하고는 텅텅 비어 있었다. 설을 한 주 앞두고 광장시장상인연합회에서 ‘K세일데이’ 행사를 열었지만 방문객을 끌어들이지는 못했다.

한 축산 업체 직원은 “전에는 사려는 부위를 정해놓고 요청하는 손님이 많았지만 가게에 들어와 가격을 문의한 뒤 적당한 가격대의 정육을 사가는 손님들이 대부분”이라며 “백화점이 감기에 걸리면 시장은 독감을 앓는다”고 토로했다. 남대문시장에서 만난 한 의류 노점상인은 “한파까지 겹치며 명절 앞이지만 손님이 더 줄었다”며 “손님이 없어 오후 7시가 되면 문을 닫고 들어가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이번 설 선물시장이 역신장을 기록할 경우 이는 미국 광우병 파동 및 이명박(MB) 정부의 유통 업계 수수료 공개 등으로 소비침체 기조가 깊었던 2013년 설 이후 처음이다.

업계에서는 피해가 국내산 정육·청과·수산 선물세트 등 국산 우수 농가에 집중되고 있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을 보였다. 한 업계 관계자는 “정부 정책에 따른 소비심리 악화가 예상보다 심각하다”며 “김영란법 적용 대상을 공직자로 한정하는 등 소비심리를 되살리기 위한 조치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김희원·신희철·이지윤기자 heewk@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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