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아침에] 축소균형의 시대

정상범 논설위원
'슈퍼 301조' 재현 우려되는데
정치권 누구도 뚜렷한 대책 없어
美기업 제휴·인수 등 전략 찾고
기술혁신으로 경쟁력 강화해야



#1997년 10월1일 심야에 미국으로부터 급전이 날아들었다. 바로 미국이 한국산 자동차에 대해 슈퍼 301조를 발동했다는 소식이었다. 미국은 한국의 자동차시장 개방이 미흡하다며 유례없는 강경조치를 내렸고 주한 미국대사관 앞에서는 연일 미국을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미국은 자동차 헤드램프의 조향 각도나 비상용 장비 장착마저 트집을 잡고 나섰다. 당시 미국 측 협상단은 제너럴모터스(GM) 등 자동차 빅3의 압력 강도가 워낙 높아 자신들도 난감한 입장이라고 토로했다는 후문이다.


#2017년 1월25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취임 닷새 만에 자동차 빅3 최고경영자(CEO)들과 회동을 갖고 “새 공장을 미국에 지으라”고 촉구했다. 빅3는 백악관 면담에서 미국 내 투자를 늘리는 대신 무역정책을 포함한 각종 규제문제에 대한 애로사항을 정부에 전달했다고 한다. 업계에서는 미국 자동차회사들이 일자리 확대를 내세워 일본과 한국 등 외국 자동차업체를 견제해달라는 요구를 내놓을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정부 출범 이후 거센 보호주의 파고가 세계 무역질서를 뒤흔들고 있다. 트럼프의 선거공약이 단지 말로만 그치고 취임 이후에는 상식(?)을 되찾을 것이라는 관측이 높았지만 오히려 속도전에 나서는 양상이다. 세계 각국이 트럼프의 공세에 우왕좌왕하면서 슈퍼 301조 같은 통상전쟁의 악몽을 떠올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트럼프의 행보는 과거와 달리 미국인들의 반세계화 기류를 근간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심상치 않다. 자유무역으로 일자리를 빼앗겼다고 분노하는 러스트벨트(쇠락한 제조업지대) 유권자들의 지지를 등에 업은 트럼프로서는 글로벌 불균형을 바로잡아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하는 데 사활을 걸 수밖에 없다. 미국과 중국,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의 무역수지 불균형이 미국 내 소득 격차를 벌리고 고용 불안을 낳았다는 판단에서다. 역대 최악의 지지율에 직면한 트럼프는 단기간에 가시적인 성과를 올리려고 기업을 압박해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내는 정책을 밀어붙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세계는 힘의 공백 상태에서 각자도생의 시대를 맞고 있다. 선진국과 신흥국 간의 국제 분업구조나 글로벌 서플라이 체인 전반에도 큰 변화가 불가피할 것이다. 한마디로 글로벌 무역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자유무역이 퇴조하면서 그간 경제 성장을 전제로 했던 ‘확대균형’이 퇴조하고 장기간의 성장정체가 수반되는 ‘축소균형’으로의 전환이 불가피하다. 외교·안보에서도 세계 경찰을 자임하던 미국은 각국에 방위비 분담을 요구하는 축소균형의 외교를 들고나올 가능성이 높다. 각국마다 무역수지와 안보비용을 따지고 쪼그라든 국내 시장을 지키겠다며 자국 우선주의에 휩싸이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문제는 불안정한 세계정세에 맞닥뜨린 한국의 절박한 처지다. 그렇잖아도 축소균형의 함정에 빠져 있는 우리로서는 치명타를 입을 우려가 크다. 일각에서는 한국이 보호무역의 타깃에서 한발 비켜나 있다고 분석하지만 안이한 판단이다. 모든 사안을 비즈니스와 실리 관점에서 바라보는 트럼프에게 한국은 그리 어려운 상대가 아니다. 이런 혼란기에 살아남자면 무엇보다 글로벌 경쟁력을 키우는 게 시급한 과제다. 해외 현지화를 강화하고 미국 기업과의 제휴나 인수전략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산업 전반의 생산성을 높이고 기술 혁신을 통해 경쟁력을 갖춘다면 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더 큰 걱정은 우리 정치 지도자들이 국내 문제에만 파묻혀 이런 세계사적 변화 흐름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느 대선주자라도 트럼프에 맞서 국익을 지키겠다며 분명한 입장을 내놓았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오히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유익하다는 미국 재계의 발언에 일희일비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슈퍼 301조가 발동된 뒤 불과 두 달 만에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라는 최악의 사태를 맞아야 했다. 트럼프발 보호주의는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생존전략을 갖추고 있는지 또다시 묻고 있다. /정상범 논설위원 ssa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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