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시대에 짓눌린 인간모습 그렸다"

6년만에 장편 '공터에서' 출간
소설 곳곳 자전적 이야기 담겨

‘나의 등장인물들은 늘 영웅적이지 못하다. 그들은 머뭇거리고, 두리번거리고, 죄 없이 쫓겨 다닌다. 나는 이 남루한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소설 ‘공터에서’ 작가 후기 中)

작가 김훈(사진)이 9번째 장편 ‘공터에서’(해냄)로 돌아왔다. 2011년 ‘흑산’ 발표 이후 약 6년 만이다. 그는 6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 참석해 “내가 살아온 시대에 관한 이야기를 썼다”며 “시대가 개인에게 가하는 고통을 견딜 수 없어 도망 다니고 그 시대를 부인하고, 무서움에 미치광이가 되어 세계 바깥으로 떠돈 인간들의 모습을 그렸다”고 털어놓았다.

‘마동수(馬東守)는 1979년 12월 20일 서울 서대문구 산외동 산18번지에서 죽었다.’ 작가 특유의 건조하고 간결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공터에서’는 1920~1980년대까지 마동수와 차남 마차세를 중심으로 마씨 집안 사람들의 고단한 삶을 풀어내며 그 안에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등 질곡의 한국 현대사를 그렸다.


소설 곳곳에는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섞여 있다. 작가의 부친이자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을 했던 김광주(1910∼1973)는 마동수, 해방 후 태어나 기자로 생활한 작가는 마차세 캐릭터와 겹쳐 보인다. 김 작가는 “(책 속 인물처럼) 돌아가신 아버지는 우리나라 망해 없어지던 해(1910년)에 태어나셨고, 나는 나라를 다시 만들어 정부를 수립한 해(1948년)에 태어났다”며 “1910년과 1948년이라는 두 숫자가 우리 부자의 생에 운명적인 좌표처럼 찍혀 있다”고 말했다. 이어 “나나 나의 아버지나 모두 그 시대의 참혹한 피해자였다”며 “아버지 세대와 내 세대를 살아온 많은 인물을 모자이크처럼 합성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부자(父子)가 살아낸 그 세상은 무엇이 그리 참혹했을까. 작가는 책에서도 세상을 ‘무섭고 달아날 수 없는 곳’으로 묘사한다. “내가 무서웠던 것은 우리 시대의 야만성과 폭력이었어요. 한없는 폭력과 억압이 악(惡)의 유산으로 세습되어 ‘갑질의 역사’를 만들어낸 거죠.” 고통처럼 작가 삶에 들러붙어 있는 시대의 기억과 “나는 아버지 같은 삶을 살지 않겠다”던 다짐의 파편은 이 고통스러운 글쓰기의 큰 동기가 됐다.

‘공터에서’라는 책 제목은 아버지와 자신의 시대를 대표하는 단어라서 선택했다. 그는 “공터는 주택과 주택 사이에 버려진 땅”이라며 “역사적 구조물이나 시대가 안착 될 만한 건물이 들어서지 않은 곳에서 나와 아버지의 시대를 떠올렸다”고 설명했다. 최근 국가를 뒤흔든 스캔들과 광장에 각각 촛불과 태극기를 들고 나온 사람들을 보며 느낀, “내가 며칠 뒤면 또 헐릴 가건물에 살아왔구나”하는 비애도 공터 안에 담겨 있다. 작가는 “위정자들이 저지른 일을 광장의 함성으로 정리한다는 게 안타깝지만, 분노의 폭발이 아닌 새로운 미래를 건설하는 동력으로 그 함성이 연결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희망을 제시하진 못했습니다.” 6년 만의 장편 신작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작가는 내내 묵직한 자기 고백을 되뇌었다. 김훈의 작품은 큰 비전이나 희망의 결론과는 거리가 멀다. 김 작가는 “시대 전체를 보는 통합적인 시야 없이 내가 쓸 수 있는 것을 겨우겨우 조금씩 쓸 수밖에 없다”며 “부디 내가 쓰지 못한 부분을 나무라지 말고 겨우 쓴 부분을 어여삐 연민을 가지고 봐달라”고 당부했다.

/송주희기자 ssong@sedaily.com 사진=해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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