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원전사업으로 발생한 손실이 전망보다 더 커질 수도 있습니다.” 14일 저녁 예정보다 두 시간가량 늦어진 기자회견에 모습을 드러낸 쓰나가와 사토시 도시바 최고경영자(CEO)가 카메라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한껏 자세를 낮췄다. 미국 원전에서 발생한 손실 예상액은 7,125억엔. 이보다 큰 손실은 최악의 자금난으로 내몰린 도시바에 감당하기 어려운 타격을 의미한다. 이튿날인 15일 도시바 주가는 8.75% 급락했다. 지난 1월 고점에 비하면 무려 43%의 낙폭이다.
원전 르네상스를 이루려던 일본 대표기업 도시바가 사실상 그룹 해체를 방불케 하는 충격적인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 2006년 ‘세계 원전산업 독식’을 꿈꾸며 미국 웨스팅하우스일렉트릭(WH) 인수를 결정한 지 11년 만에 ‘승자의 저주’에 걸린 것이다. ‘꿈의 에너지’를 통한 세계 제패를 노리던 도시바는 원전사업의 막대한 손실과 회계부정 여파로 정부와 은행의 자금지원 없이는 생존마저 어려운 부실기업으로 전락한 상태다.
15일 주요 외신들에 따르면 한때 ‘원전 공룡’으로 세계를 호령하던 도시바의 몰락은 11년 전의 과도한 베팅에서 시작됐다. 고유가로 값싸고 효율성 높은 원자력발전이 각광 받던 2000년대 중반 미래 성장동력으로 원전사업에 주목한 도시바는 글로벌 원전 시장 진출의 교두보로 미 WH를 선택했다. 세계 최초로 가압경수로를 개발하며 일명 ‘원전의 역사’로 불린 이 회사를 손에 넣기 위해 도시바는 인수예상가보다 2배 이상 비싼 54억달러(약 6조1,614억원)를 써내는 통 큰 베팅으로 경쟁사인 제너럴일렉트릭(GE)과 미쓰비시중공업 등을 제치고 WH 인수에 성공했다. 과도한 입찰가라는 비난에도 도시바는 2년 뒤 WH의 원전설계가 미국 발전업체인 서던코와 스캐나코프 등에서 채택돼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2011년 발발한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의 방사성물질 누출 참사는 도시바의 원전 사업 시나리오에 큰 차질을 초래했다. 각국 정부가 원전 안전기준을 대폭 높이면서 도시바가 손을 댄 미국 내 원전 현장도 손실만 늘어나는 골칫덩어리가 됐다. 공사가 미뤄지고 추가 비용이 발생하면서 손실액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게다가 도시바는 ‘밑 빠진 독’을 막으려다 회계부정이라는 최악의 수를 두면서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었다. 이날 도시바는 자회사인 웨스팅하우스가 2015년 말 원자력서비스 회사인 CB&I스톤앤웹스터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대규모 회계부정이 이뤄졌다는 내부고발을 접수해 자체 조사에 들어갔다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이 보도했다. 니혼TV도 “시가 시게노리 도시바 회장과 대니 로드릭 WH 회장이 회계담당 직원에게 ‘도시바에 유리한 회계를 만들라’고 압력을 가했다”고 보도하며 조직적인 은폐 가능성을 제기했다. 도시바는 2015년에도 과거 7년간의 회계부정 사실이 드러나 치명상을 입은 바 있다. 당시 도시바는 과거 7년간 2,248억엔(약 2조3,295억원)에 달하는 회계부정 사실이 들통 나 가전 센서와 의료기기 사업 등을 매각하는 혹독한 구조조정을 단행한 바 있다.
미국 원전사업으로 거액의 손실을 본 도시바는 2016회계연도 1·4~3·4분기(2016년 4~12월)에만도 4,000억엔(약 4조500억원)대 후반에 달하는 대형 적자를 낼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곧 자본잠식을 의미한다. 주거래은행인 미쓰이스미토모와 미즈호·미쓰이스미토모신탁은행 등 은행단은 자본잠식이 명확해진 상황임에도 일단 오는 3월 말까지 2,800억엔대의 융자금을 유지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만큼 도시바의 생명줄이 끊어지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앞서 회계부정 스캔들 이후 불신이 커진 은행권은 추가 자금지원에 난색을 보였지만 도시바 측이 반도체 부문을 포함한 주요 사업의 매각방침과 자금난 등을 설명하며 설득에 성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CB&I스톤앱웹스터 인수 과정에서의 회계부정 의혹이 사실로 밝혀질 경우 이마저 끊길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최악의 자금난을 해소하기 위해 도시바는 재무구조 개선을 목적으로 분사하는 낸드형 플래시메모리 회사의 지분 절반 이상을 파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당초 20% 미만의 지분만 매각하기로 한 방침에서 대폭 상향 조정된 것이다. 다만 매각 시점은 주가가 어느 정도 회복된 4월 이후로 점쳐지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도시바가 채무 초과를 확실하게 방지하기 위해 반도체 메모리 사업 분사의 일부 매각 계획을 수정할 수도 있다”며 “최대주주 자리를 내놓더라도 확실하게 자본을 늘리겠다는 계산”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추가 자금 마련을 위해 알짜사업 부문을 매각한다면 마땅한 성장동력이 없어 껍데기만 남을 수도 있다. 이미 도시바는 회계부정 스캔들 이후 의료기기 사업과 백색가전 등을 각각 캐논과 중국 기업(메이더)에 매각하며 돈 되는 부분을 팔아치웠다.
국가 기간사업에 연결된 기업이라는 특수성이 기사회생을 도울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일본 정부는 원전사업 부실로 휘청이는 도시바의 운명을 일개 기업 이상의 것으로 인식하는 분위기다.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도시바는 플래시메모리 등 일본의 성장 전략상 지극히 중요한 기술을 보유한데다 국내 원자력 사업, 원자로 및 폐수 처리에도 관여하고 있는 기업”이라며 “향후 대응을 주시해나가겠다”고 말했다.
/이수민기자 noenemy@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