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말레이시아 현지 언론인 뉴스트레이츠타임스가 공개한 피살 직후 김정남의 모습. 청색 상의에 청바지 차림으로 1인용 안락의자에 축 늘어져 있다. /연합뉴스
말레이시아 경찰이 지난 17일 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을 암살한 용의자로 북한 국적의 리정철(47)을 체포해 쿠알라룸푸르 세팡경찰서로 연행하고 있다. 김정남 암살사건 이후 북한 국적의 용의자가 체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을 암살한 용의자로 약학을 전공한 북한 국적의 남성이 검거되면서 이번 사건의 배후로 북한 정부가 주목되고 있다.
누르 라시드 이브라힘 말레이시아 경찰부청장은 19일 열린 기자회견에서 “김정남 살해에 새 화학물질이 사용됐다”며 “체포된 용의자는 북한 국적의 리정철로 약학을 전공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리정철은 특수한 신분으로 추정된다”며 “김정남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화학물질을 분석하는 데 상당 시일이 소요될 수 있다”고 말했다.
말레이시아 경찰은 사건 발생 당일인 지난 13일 출국한 나머지 남성 용의자 4명도 북한 국적이라고 발표했다. 경찰은 리정철 외에 도주한 리지현·홍송학·오종길·리재남이 이번 사건을 주도한 북한 국적 용의자들이라고 적시한 뒤 이들이 행방을 쫓고 있다고 발표했다. 이에 싱가포르 보도채널인 채널뉴스아시아는 이날 경찰 고위관계자를 인용해 북한 국적 용의자 4명이 이미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경유해 17일 평양에 도착했다고 전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는 신원이 확보된 리정철에 대한 정보도 추가로 공개됐다. 외국인 노동자에게 발급되는 말레이시아 서류인 ‘아이-카드(i-Kad)’를 소지한 그는 가족과 함께 쿠알라룸푸르 인근에서 거주하고 있었으며 말레이시아 정보기술(IT) 업체의 직원으로 근무했다. 앞서 현지 매체들은 그가 동부 콜카타의 연구소에서 일하는 등 전공인 약학과 관련된 일을 해왔다는 점에서 독극물 제조의 핵심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내놓은 바 있다.
지금까지 나온 조사 결과를 종합하면 북한 공작원들이 암살작전의 밑그림을 그린 뒤 외국 여성 2명을 부추겨 살해에 나섰다는 시나리오가 가능해진다. 리정철이 체포될 당시 소지하고 있던 신분증도 북한이 1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암살을 준비해왔다는 데 힘을 싣고 있다. 실제로 리정철이 체포될 당시 갖고 있던 신분증은 1년 기한의 노동허가를 갱신한 것이었다. 김정남이 화학물질에 의해 독살된 것으로 추정되는 상황에서 리정철이 북한 대학에서 과학·약학 분야를 전공한 약학 전문가라는 점도 북한 배후설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현지 경찰은 김정남 암살사건에서 먼저 체포된 두 여성 용의자는 리정철과 도주한 남성 4명 등에 포섭된 ‘깃털’로 바라보고 있다. 리정철 등이 범행 1~3개월 전쯤 방송 촬영 등을 빌미로 암살계획을 숨긴 채 두 여성을 꾀었다는 설명이다. 인도네시아 국적의 암살 용의자 시티 아이샤(25)의 가족은 일본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아이샤가 “일본 TV 방송국에 고용돼 말레이시아에서 장난치는 몰래카메라 프로그램 제작에 참여하고 있다”고 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현지 경찰은 이들이 범행 직후 화장실로 뛰어가 손을 씻은 점과 호텔을 옮기는 등 수상한 행보를 보인 것을 추적하는 한편 나머지 용의자 세 명의 도주 경로를 파악하고 있다.
한편 독일을 방문 중인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숙소에서 진행한 기자간담회에서 북한이 배후인 것으로 가닥이 잡힌 김정남 암살사건에 대해 “국제사회 지도자들도 이번 사건이 굉장히 잔학하고 심각한 사안이라는 점을 인식할 것”이라며 “북한의 인권적인 측면, (말레이시아의) 주권 침해 요소, 국제사회에서의 범죄 자행자들에 대한 책임성 문제 등을 포괄적으로 공론화하는 자연스러운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박홍용기자 prodigy@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