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연 TWW 대표
산 좋고 물 좋은 강원도 산자락에서 자랐다. 계곡 옆에 자리한 아파트에서 살았던 어린 시절, 밤새 들려오는 계곡물 소리는 때론 웅장한 오케스트라 연주처럼, 때론 감미로운 피아노 선율처럼 느껴졌다. 어릴 적부터 클래식 음악을 유달리 즐겨 피아노학원에 다녔고 자연스럽게 피아니스트를 꿈꿨다. 그러다 우연히 들은 비올라 소리에 반해 장래 희망을 비올리스트로 바꿨고, 남다른 재능을 인정 받아 예술고등학교에 무난히 입학했다. 고등학교 재학 중에는 부모의 이혼으로 적지 않은 시련을 겪었다. 이로 인한 스트레스로 탈모와 여드름이 심해졌고, 대학에 진학한 후에도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졌다. 참다 못한 어머니가 직접 탈모 샴푸 제조에 나섰고, 25가지 한방재료를 정성껏 달여 추출한 원액으로 천연 샴푸와 천연 비누를 만들었다. 마치 거짓말처럼 탈모가 낫자 천연 비누 시장에 뛰어들기로 마음을 먹었다. 비올리스트의 삶을 포기하고 선택한 천연 비누 시장에서 한발 더 나아가 천연 화장품 분야까지 진출하며 당찬 도전기를 써가고 있다. 이도연(31·사진) TWW 대표의 창업 스토리다.
자연의 먹거리와 소리가 키운 어린 시절
아버지의 고향은 원주, 어머니의 고향은 부산이다. 젊은 시절부터 사업가 기질이 남달랐던 아버지는 여러 대의 버스를 두고 관광업을 했다. 지금이야 교통이 좋지만 1980년대 초반만 해도 강원도 단체여행은 관광버스를 대절해야 가능했기에 부친의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고향인 원주에선 아버지의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큼 유명인이었다.
외할아버지는 대저 딸기를 국내 최초로 내놓았을 정도로 과수원을 크게 했다고 한다. 4남 2녀 중 넷째였던 어머니는 부산의 한 은행에서 근무하다가 출장 온 아버지와 연이 닿아 백년가약을 맺었다. 과수원 집 딸이라 그런지 죽어가던 화분도 어머니 손만 거치면 거짓말처럼 예쁜 꽃이 피었고, 된장이나 고추장은 물론 각종 식자재는 유기농만 고집했을 정도로 어머니의 ‘천연’에 대한 애착이 유별났다.
정선군 사북리 도사곡 아파트에서 지냈던 어린 시절은 아파트 바로 옆에 있는 계곡에 어머니와 자주 놀러 갔다. /사진제공=이도연 대표
아버지의 사업체가 있는 강원도 정선에서 자랐던 이 대표는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거센 계곡물 소리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정선군 사북리 도사곡 아파트에 살았는데 아파트 바로 옆에 계곡이 자리하고 있어 여름철 장마로 물이 불어났을 땐 세찬 계곡물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자리에 들곤 했다.아버지가 운수업을 하는 동안 어머니는 운전 기사 출퇴근 관리며 월급 지급 등 회사 살림을 도맡았다. 관광버스가 들고 나는 시간대가 주로 새벽으로, 부모가 그 시간에는 회사 일을 봐야 했던 만큼 이 대표 혼자 지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렇듯 바쁜 와중에도 외동딸 먹거리가 어머니의 최대 관심사였던지 집 주방에서 미원이나 설탕 등 조미료를 구경조차 못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반찬에 단 맛을 돌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꿀이나 매실액을 고수했고 농가에서 공수한 신선한 식자재로 요리를 하곤 했다.
“제가 햄버거라는 걸 먹은 것도 초등학교 다닐 때였어요. 학교 행사가 있어서 단체로 햄버거를 주문해 학생들에게 나눠줬는데 집에서는 제철 나물과 잡곡밥만 먹었으니 햄버거를 그때 처음 구경한 셈이죠. 된장찌개나 김치찌개도 나트륨이 많이 들어간다며 좀처럼 안 해주셨어요. 자연에서 난 가장 좋은 재료를 딸에게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 엄마한테는 강했던 것 같아요. 딸기농사를 지었던 외할머니도 딸기를 따면 가장 좋은 것은 자식들 몫으로 남기고, 그 아래 등급의 딸기를 팔려고 내놓았다고 들었어요. 보통은 가장 좋은 건 팔고, 무르거나 상한 걸 자식들한테 먹이는 데 외갓집은 자식들 먹거리에 대해선 애착이 남달랐던 것 같네요.”
클래식을 벗 삼으며 음악가를 꿈꾸다
이 대표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자 아버지는 관광업을 접고 무역업으로 전환했다. 중국 칭따오 지역으로 중고차를 수출하는 일이었는데, 어머니가 사업을 같이 했던 만큼 두 분이 함께 출장을 가면 보름씩 어린 이도연 혼자 지내곤 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긴 한 것 같아요. 당시 원주의 빌라에 살았는데, 11살짜리 여자애를 혼자 두고 보름씩 집을 비운 셈이니까요. 학교 끝나고 집에 오면 혼자 밥 먹고 숙제를 했고, 그나마 피아노학원에 다닌 게 고정적인 제 스케줄이었으니까요. 집에 먹을 게 없으면 짜장면 시켜먹고 외상으로 달아 놓았으니 당연히 저희 집 근처에 사는 분들은 여자애 혼자 지낸다는 걸 알았겠죠. 그럼에도 별 사고 없이 컸던 걸 보면 정말 운이 좋았던 것 같기도 하구요.”(웃음)
혼자 있는 딸내미가 걱정이 됐던 어머니는 하교할 때쯤 한 번, 저녁 9시 넘어서 한 번 이렇게 하루에 두 번씩 전화를 걸었다. 당시만 해도 국제전화비가 많이 나오던 시절이라 한달 전화비만 100만원을 넘었다.
혼자 지낸 시간이 많아서인지 또래보다 성숙했던 이 대표는 외로움을 주로 음악으로 달랬다. 어렸을 적에는 어머니가 클래식 음악을 자주 틀어줬던 덕분에 음악과 함께 하는 삶이 익숙했고, 피아노학원에 다니기 시작한 7살부터는 ‘음악은 나의 삶’이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피아노를 무척 좋아했어요. 피아노 앞에 앉으면 시간 가는 줄 몰랐을 정도였죠. 초등학교 6학년 때는 피아노학원 선생님이 엄마한테 ‘도연이는 재능이 있으니 예술중학교를 보내는 게 좋겠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는 정말 내가 재능이 있구나 느꼈죠. 7살부터 14살까지 피아노만 했으니 거의 8년 동안 피아노에 빠져 산 셈이네요.”
당시 그녀의 가족들도 경기도 부천으로 둥지를 옮겼다. 사업이 날로 번창하면서 공항 가까운 곳으로 집을 옮기는 목적에다 그녀의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선 강원도보다는 경기도가 낫다는 판단에서다.
피아니스트를 향해 달려오던 그녀는 우연히 비올라 연주 소리를 듣고 비올라의 매력에 푹 빠졌다. 피아노 전공으로 예술고등학교 진학을 목표로 삼았던 터라 갑작스럽게 비올라로 전공을 바꾸겠다고 선언하니 어머니는 물론 음악 선생님이 펄쩍 뛰었다.
“비올라 음색을 들으니 도저히 그 매력에서 빠져 나올 수 없었어요. 보통 비올라를 사람의 목소리와 가장 비슷한, 따뜻한 음색의 악기라고 하는데 그 말을 100% 이해할 수 있었죠. 보통 전공을 바꾸게 되면 (예고 진학을 쉽게 하기 위해서) 콘트라베이스나 금관 악기를 선택하는데 저는 피아노만 하다가 현악기로 바꾼다고 하니 주변의 반대가 심할 수 밖에요. 하지만 너무 하고 싶었고 제 고집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어머니가 급히 비올라 선생님을 구해주셨죠.”
부모의 이혼, 음악의 힘으로 버티다
비올라의 매력에 푹 빠져 갑작스럽게 전공을 바꾸게 됐지만 그녀에게는 잠재된 재능이 있었던 것 같다. 안양예술고등학교에 무난히 합격했기 때문. 부모는 부천 아파트를 전세 주고 안양예고 앞으로 이사를 왔다. 하지만 그 시기에 그녀의 삶에도 큰 시련도 닥쳐왔다. 이 대표가 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중국에서 대형 교통사고를 당한 것. 중국 병원에서는 살기 어려울 거라고 ‘사망선고’를 내렸지만 어머니가 극진히 간호한 덕에 기적처럼 아버지는 살아났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교통 사고 후유증 때문인지 아버지의 성격은 다소 포악해졌고, 아내와 딸에 대해 끊임 없이 의심했다. 크고 작은 다툼 끝에 그녀가 고등학교 2학년으로 올라가던 겨울 방학, 결국 이혼했다. 민감한 사춘기 시절 겪게 된 시련이 그녀에게는 얼마나 큰 상처가 됐을까 싶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담담하게 당시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사고 후 전혀 다른 사람이 됐기 때문에 제가 먼저 엄마한테 이혼하라고 말했어요. 그렇게 계속 살면 두 분 모두 불행해질 게 뻔했거든요. 아버지가 의심이 많아져서 엄마가 사업 자금을 빼돌린다고 험담을 하고 다니셨고, 결국 두 분 사이에 신뢰도 금이 가고 말았죠. 당시에 재산이 적지 않았는데 아버지는 갖고 있었던 땅이며 건물을 팔아 고모나 삼촌들한테 나눠주면서 정작 제 레슨비는 안 주겠다고 버티시더군요. 그때 저 역시 아버지한테 정이 뚝 떨어졌어요. 그냥 헤어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구요. 그래도 어머니는 제가 최우선이었는지, 이혼하기 직전 가계비로 제 악기를 4,000만원 짜리로 바꿔주셨죠. 하나라도 저를 위해 남겨주고 싶었던 거죠.”
부모의 이혼, 곧 이어 닥쳐온 경제적인 어려움에도 그녀는 상명대 음대 05학번으로 진학했다. 물론 대학 진학 과정이 순탄한 건 아니었다. 음대 진학을 위한 각종 레슨비는 어머니가 모아둔 비상금으로 충당했다. 당장 가장이 된 어머니는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러 학원에 다녔고, 학원 등록 3개월 만에 공인중개사 2차 시험까지 붙었다고 한다.
2008년 상명대 음대 졸업 연주회에서 비올라를 들고 있는 이도연 대표의 모습./사진제공=이도연 대표
“엄마가 비상금으로 모아 둔 돈은 있었지만 음대 입시생 뒷바라지가 쉬운 건 아니었어요. 지금도 엄마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200만원을 뽑아다 집에 갖다 두면 1주일 만에 없어지더라’고 말씀하셔요. 제 하루 레슨비(1시간 기준)로 기본 10만원, 선생님 댁이 서초동이라 끝나고 돌아올 때 택시 교통비 5만원, 연습용 피아노 반주비 5만원, 레슨용 피아노 반주비 10만원이 들거든요. 특히 고3 때는 매일 반주 레슨을 해야 하니 하루에 30만원은 우습게 나갔던 거죠.”탈모로 고생하는 딸, 어머니는 천연 샴푸 개발에 나서다
부모 이혼으로 인한 스트레스에다 입시 스트레스까지 겹쳐서인지 고등학교 시절 내내 그녀는 탈모와 여드름에 시달렸다. 대학만 들어가면 낫겠다 싶어 효과가 좋다고 소문난 탈모 샴푸부터 각종 고급 화장품까지 그녀 손을 거치지 않은 게 없을 정도다. 하지만 대학에 입학한 후에도 탈모와 여드름은 심해졌다.
“탈모가 생긴 건 중3 말쯤 교통사고로 다쳤던 아빠가 퇴원 후 집으로 돌아오신 다음 같아요. 원래 숱이 많아서 두 손으로 잡아도 다 안 잡힐 정도였는데, 그때부터는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져서 화장실 바닥이 새까매질 정도였어요. 게다가 한창 피부에 예민할 나이에 여드름도 심했어요. 초등학교 시절부터 부모님이 해외 출장 다녀오시면서 면세점에서 각종 명품 화장품을 사주셨고, 그게 좋아서 얼굴에 찍어 발랐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화장 독이 올라서 피부가 나빠졌던 거죠. 명품 화장품에 꽂혀서 대학 다닐 때까지만 해도 클렌징오일은 슈에무라, 미스트랑 색조는 샤넬, 메이크업은 겔랑, 기초는 크리니크를 써야 한다는 저만의 불문율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어머니가 딸의 탈모를 심각하게 느낀 건 그녀가 대학교 1학년 때였다. 학교에서 오케스트라 연주가 있었는데 비올리스트 자리에 앉아 연주에 심취하던 이 대표의 정수리가 조명을 받아 반짝거리는 것을 보고는 큰 충격을 받은 것. 때마침 취미에 맞지 않다며 부동산중개업을 그만 뒀던 어머니는 주민센터의 강좌를 찾아 듣고 인터넷이나 책을 뒤지면서 탈모 샴푸를 만드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상명대 음대 학생회에서 부학생회장을 맡아 활동하던 시절, 주요 임원진과 MT에서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이도연 대표
“두피전문한의원에 가서 침도 맞고 약도 처방 받아 먹었죠. 한 통에 수십 만원짜리 탈모 전용 샴푸도 썼지만 다 부질없었어요. 엄마가 탈모 샴푸를 만들겠다고 팔을 걷어 붙인 것도 시중에 판매하는 제품으로는 도통 낫지를 않으니까 직접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던 거죠. 문화센터에서 배운 레시피에다 탈모에 좋다는 약재를 이것 저것 넣어보면서 실험을 거듭하셨어요.”구기자, 창포, 하수오, 6년근 홍삼, 감초, 당귀, 약쑥, 민들레, 뽕잎 등 탈모에 좋다는 약재 25가지를 따로따로 쪄서 그 추출물을 베이스로 샴푸를 만들었다. 그때가 2006년으로 ‘공복숙 여사표’ 탈모 샴푸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시장에는 중국산 한방 재료가 즐비했던 만큼 백화점에서 일일이 재료를 구매했을 정도로 원재료에 신경을 썼다.
처음에 이 대표는 엄마표 탈모 샴푸에 손도 대지 않았다고 한다.
“용기도 빨간 약통 같은 것을 써서 촌스러운 데다 오징어에서 나는 비린내가 나고, 색도 탁해 거부감이 컸어요. 세련된 용기와 고급스러운 아로마에 익숙했던 저에게 그걸 주니 사용할 리 만무하죠. 어머니도 좋은 건 다 넣었지만 직접 효능을 확인하지 못한 터라 강요도 못 하셨구요. 집에 제 친구들이 오면 재료 자랑을 하시면서 하나씩 나눠주는 게 제품 홍보의 전부였어요. 나중에는 탈모 샴푸에다 여드름 피부용 비누까지 직접 만드셨죠.”
어머니의 사랑 담뿍 담긴 천연 샴푸 탄생하다
그녀가 엄마표 제품을 사용하게 된 계기는 친구의 달라진 피부를 직접 확인하고부터다. 지루성 피부로 고민하던 그녀의 대학 친구가 어머니가 만든 비누를 한 달쯤 쓰고 나서 몰라보게 피부가 깨끗해진 것. 눈으로 효능을 확인했지만 굳이 인정해서 자존심을 굽히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어머니 몰래 샴푸와 비누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웬만한 외국산 브랜드를 사용해도 나아지지 않던 피부가 깨끗해지더라구요. 저조차 놀랐죠. 대신 기존 제품은 전혀 안 썼어요. 가끔이라도 쓰면 원래 피부로 다시 돌아갔으니까요. 피부에 효능을 보니까 탈모 샴푸에도 신뢰가 생겨 사용하기 시작했어요. 거짓말처럼 머리를 감을 때마다 빠지던 머리 숱이 줄어들기 시작하더군요. 머리에 윤도 나고, 저녁 늦게까지 있어도 찰랑거리는 상태 그대로 유지되구요. 그러다가 기존 샴푸를 쓰면 다시 저녁에는 끈적해지면서 떡이 지기 시작했으니 마약처럼 엄마표 샴푸만 사용하게 되더라구요.”
이도연 대표의 어머니인 공복숙 여사가 직접 천연 비누를 만들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이도연 대표
제품력에 자신이 있었지만 그때까지는 상업적으로 키울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음대 교수가 대부분 여성이라 명절이나 스승의 날에 선물을 하곤 했는데, 제품에 만족한 교수님들이 구매하고 싶다고 나서는 것을 보고서야 원가 계산을 했을 정도다. 원가를 계산한 이 대표는 깜짝 놀랐다. 말도 안 되는 헐값으로 제품을 팔았기 때문이다.“제가 당시 ‘일랑의 일상’이라는 개인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맛집 같은 걸 올려 놓았는데요, 거기에 엄마표 샴푸랑 비누를 올리면서 지인들한테만 조금씩 팔았거든요. 처음에 백화점에서 약초를 구해서 만들다가 강원도 원산지 등에 직접 가서 공수해 오곤 하면서 원료 자체에 드는 비용이 적지 않았어요. 당시 샴푸 한 통에 1만9,000원, 비누는 4,000원과 6,000원에 팔았는데, 원가를 보니까 팔면 팔수록 손해가 나는 가격이었어요. 그래서 가격을 적정 수준으로 올려 팔기 시작했죠.”
비누가의 탄생, 사업가의 길로 들어서다
알음알음으로 팔다가 2010년께 쇼핑몰을 열었다. 당시 사귀던 남자친구(현재의 남편)가 회사를 그만 두고 쇼핑몰을 통해 천연화장품 재료를 팔려고 했던 차에 어머니가 만든 제품도 함께 팔게 된 게 계기였다.
그런데 주력 제품인 천연화장품 재료는 안 팔리고 어머니가 만든 비누와 샴푸만 불티나게 팔렸다. 의논 끝에 천연 비누 제조를 중심으로 쇼핑몰을 운영하기로 하고, 모친 공복숙 여사의 이름을 대표자로 등록했다. 쇼핑몰의 이름은 ‘비누가(비누의 집)’로 정했다.
“비누가라는 이름으로 쇼핑몰을 운영하면서 제 블로그까지 병행하니까 두 개를 통일하면 어떻겠냐는 조언이 있었어요. 그래서 ‘일랑의 일상’을 ‘비누가 도연의 일상’으로 바꾸고 천연 비누 관련 콘텐츠를 집중적으로 올렸습니다.”
사업이 골격을 갖춰가자 이 대표의 고민은 깊어졌다. 음악가로서의 길을 가고 있었지만 갈수록 천연 비누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던 것. 보다 체계적으로 사업을 벌이기 위해선 경영진이 아로마테라피나 비누제조자격증을 가져야 하지만 나이 든 어머니에게 학원에 다니라고 할 수도 없었다.
지난 2014년 비누가 제품을 고객들에게 선보이는 쇼케이스 행사 당시의 모습. /사진제공=비누가
“엄마는 지식은 많지만 실제 자격증은 없었거든요. 제대로 사업을 하려면 공신력 있는 자격증을 갖고 있어야 하기에 제가 학원에 다니면서 자격증을 하나 둘씩 땄던 거죠. 아로마테라피, 비누제조, 화장품제조 등 각종 자격증을 따냈고 웬만큼 자격증을 따낸 후에는 집 근처에 작은 공방을 열었어요. 블로그를 하니까 배우고 싶다는 분들도 많았고, 공방에서 제품도 만들면 되니까 일석이조라고 생각했죠.”공방 강좌는 천연 화장품 커리큘럼으로만 운영했다. 비누나 샴푸는 일반인이 만들기 까다롭지만, 화장품은 몇 가지 주요 원료를 배합하면 되기 때문에 강좌를 운영하기 용이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블로그에 ‘천연화장품 만들기 원데이 클래스’를 열었다. 홍보 카피는 “명품 화장품 백화점에서 사지 말고 내가 만들기”, “백화점 1층을 끊게 하는 화장품 클래스”라고 정했다.
“저한테 그 카피는 매우 큰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명품 화장품을 접한 후 성인이 된 후에는 거의 병적으로 백화점 1층에 살았으니까요. 내가 화장품을 안 사고도 살 수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랄 때가 종종 있어요. 그리고 그런 기적 같은 경험을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은 열망도 컸습니다.”
이도연 대표가 운영하는 공방에서 전문가 강좌를 수강하는 학생들이 천연 제품을 직접 만들고 있다. /사진제공=이도연 대표
강좌를 처음 선보인 지난 2012년께는 취미반처럼 원데이 클래스를 진행했다. 점차 입소문이 나면서 2013년에는 전문가반을 오픈했다. 전문가반 역시 높은 호응을 얻었고, 강좌를 통해 얻은 수익도 적지 않았다.강좌 규모가 커지고 수급해야 할 재료가 많아지면서 이 대표는 화장품 재료의 유통 과정을 적나라하게 들여다보게 됐다.
“중간 도매상에게 물건을 구매하니까 구매 비용이 꽤 높았고, 여러 단계의 유통 채널을 거치다 보니 재료 관리도 허술했어요. 천연 화장품 만들기 강좌를 하고 있는데, 실제 해당 재료가 청결하지 못했던 거죠. 재료가 그 상태인데 아무리 천연으로 화장품을 만들면 뭐하나 하는 회의감까지 밀려 들었죠. 그래서 직접 원재료를 공수하고 관리도 직접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천연 화장품에 들어가는 주요 원료는 플로럴워터, 베이스오일, 아로마오일, 보습제(글리세린이나 히아루론산), 유화제 등이다.
시간으로 기적을 만드는 회사
원료 관리가 잘 되는 공장에서 제대로 된 천연 화장품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 이 대표는 OEM(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 공장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보통 원액 오일 2% 정도 넣고 페이셜 오일을 만드는데, 이 대표는 원액 오일 100%를 요구하니 웬만한 공장에서는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며 손사래를 친 것이다. 몇 개월 간 적당한 공장을 물색한 끝에 마음에 맞는 공장을 찾아냈다. 다행히 부천 공방에서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시간으로 기적을 만드는 회사’를 표방하는 TWW의 대표 제품들이 한옥 안에 디스플레이돼 있다. /사진제공=TWW
2015년 9월 천연 화장품에 대한 그녀의 철학을 담아 TWW를 설립했다. 천연 비누 제조 회사인 비누가와는 병행 운영하고 있다. TWW(Time Works Wonders)는 ‘시간으로 기적을 만드는 회사’라는 의미를 담았다.“이윤을 내기 위해 재료를 덜 넣고, 시간을 덜 투입하는 회사가 아니라 ‘시간이 빚어낸 기적’을 구현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스킨, 로션, 미스트, 페이셜오일은 이미 출시됐고 조만간 썬크림, 바디크림 등 제형감 있는 스킨케어 제품을 내놓을 예정입니다. 여성뿐만 아니라 남편, 아이 등 온 가족이 안심하고 쓸 수 있는 천연 화장품 브랜드로 자리를 잡겠다는 게 저의 목표입니다.”
비누가와 TWW 매출을 합해 지난해 4억원의 매출을 냈다. 올해 TWW의 제품군이 늘어나는 만큼 총 매출은 2배 정도 늘어날 전망이다.
2015년 어머니인 공복숙 여사와 함께 미국 시애틀로 여행을 갔을 때 즐거웠던 모습. /사진제공=이도연 대표
“주변에서는 공장을 늘려 대량 생산을 하면 매출이 늘어날 텐데 왜 그렇게 느릿느릿 가느냐고 타박하는 분들도 있어요. 하지만 욕심을 안 내고 천천히 가려구요. 천천히 가면서 저희의 철학인 ‘시간이 빚는 기적’을 모든 분들과 공유하고 싶어요. 단골 고객 중에서는 저희가 마케팅도 안 하고 대량 생산도 안 하니까 브랜드가 없어지지나 않을지 걱정하는 분들도 있어요. 절대로 없어지면 안 된다고, 계속 좋은 제품 만들어 달라고 제 손을 잡고 부탁까지 하시는 분들이에요. 그런 분들을 볼 때마다 제 철학을 지키고 살아야겠다고 결심하곤 합니다.”이 대표는 내년에 공방과 사무실을 경기도 여주로 옮길 계획이다. 이미 1,300㎡(약 400평) 규모의 땅을 구매했고, 이 곳에 집을 짓고 밭농사를 지으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에서다.
‘시간으로 기적을 만드는 회사’라는 철학을 실천하는 의미에서 로하스의 삶을 직접 실천하겠다는 생각이다. 2~3층 규모의 주택의 1층은 제품 쇼룸과 공방을 겸하고, 2층에 살림집과 사무실을 두기로 했다.
“천연 화장품을 표방하는 회사는 많지만 실제로 원재료를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은 곳들도 더러 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천연 화장품의 철학을 지키고 싶고 그런 제 비전을 로하스의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물론 자연 속에서 살아가면서 나중에 태어날 저의 아이와의 삶도 준비하고 싶구요.”(웃음)
이 대표는 “공방에서 전문가 과정을 운영하면서 창업하는 분들을 많이 봤는데 어떤 분은 잘 되고 어떤 분은 창업에 실패했다”면서 “원인을 살펴보면 창업을 아무 때나 출근해서 편하게 일하는 것 정도로 간주하는 분들은 10명이면 10명 모두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창업은 잠들기 전까지는 일이 끝나지 않는 것이고, 밤새 일하고도 돈 한 푼 못 받는 직장 같은 것인데 그런 각오를 하고 창업에 뛰어든 분이 적은 것 같다”며 “창업이 성공한 후의 과실(果實)만 볼 게 아니라 그 과정에서 견뎌내야 할 고충도 꼭 끌어안아야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했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정민정기자 jminj@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