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현지(27)씨가 등단했던 ‘시로여는세상’이란 문예지와 시를 구상할 때 쓰는 권씨의 필통./사진=홍주환인턴기자
#3년 전 한 지방신문의 신춘문예 시 분야를 통해 등단한 A(29)씨. 지난해 시로 번 돈을 계산해보니 40만원이 전부다. 주요 일간지도 아닌 지방지로 등단한 그의 시를 받아주는 문예지는 손에 꼽았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소형 문예지들만 그의 시를 실어줬다. 원고료는 당연히 쥐꼬리. 시 한 편당 5만원이 전부였다. 한 달을 다듬고 벼린 시를 ‘울며 겨자 먹기’로 단 한 푼 받지 않고 싣기도 했다. 이제 유일한 희망은 시집을 내는 것이다. 언제 시집을 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혹여 시집을 내고 유명해진다면 원고 청탁이나 강연 자리가 생길 수도 있으니 기대하며 버틸 뿐이다.시인 윤동주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동주’의 인기몰이, 소셜네트워크(SNS)상에서 널리 퍼진 유명 시인의 시 구절. 지난 2016년은 ‘한국시의 르네상스’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었던 한 해였다. 높아진 관심 덕에 시집 판매량도 눈에 띄게 성장했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지난해 시 분야의 신장률은 30.6%로 한국시만 따로 놓고 봤을 때 505.7%라는 놀라운 성장을 기록했다.
‘역설적’이게도, 신인시인과 시인지망생의 상황은 한국시의 성장세와는 정반대다.
▲시를 발표할 기회조차 없는 신인시인들
매년 신춘문예·문예지 공모 등을 통해 등단하는 시인은 30~40명. 이들 중 대부분은 대중에게 시를 보일 기회를 얻지 못한다. 수년간의 공부, 수백 대 1의 신춘문예 경쟁률을 지나 등단에 성공했지만 남은 것은 ‘등단 시인’이라는 허울 좋은 ‘자격증’뿐이다.
시인이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통로는 제한적이다. 특히 신인 시인들의 경우는 더하다. 신인시인이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대표적인 통로는 문예계간지다. 문예계간지는 1년에 4번 단행본을 내며 시인 50여명의 작품을 싣는다. 이중 신인시인의 비율은 매우 낮다.
주류 문예계간지인 ‘문학동네’, ‘문학과사회’, ‘창작과비평’의 5년 치 단행본을 살펴본 결과 신인시인의 시가 실리는 경우는 1년에 3~4건에 불과했다. 5년 동안 단행본에 이름을 올린 시인은 총 653명(중복 포함)이었지만 아직 첫 시집을 발간하지 않은 신인시인은 81명(중복 포함)이었다. ‘창비’와 ‘문학동네’가 5년간 1번 진행한 ‘신예시인특선’을 제외하면 신인시인 수는 41명으로 떨어졌다. 2013년 등단한 오성인(30)씨는 “최근 신인에게 발표의 기회를 주지 않는 풍토에 반기를 드는 문예지들도 몇 있지만, 여전히 신인시인이 문예지에 시를 실기는 어려운 실정”이라고 강조했다.
▲지원사업도 ‘경력시인’만 뽑는다
어려운 환경에서 활동하는 문화예술인에게 정부기관의 지원사업은 ‘가뭄의 단비’와도 같다. 하지만 신인시인이 지원사업에 선발되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경쟁률이 높아 사업에 선정되지 못하는 것은 둘째치고 지원사업의 진입 장벽이 높아 갓 등단한 신인시인들은 신청조차 할 수 없다.
대표적인 문예인 지원 단체인 서울문화재단의 경우 ‘문학창작집 발간지원’의 신청자격을 ‘개인 창작집이 있는 등단 작가’로 한정하고 있다. 부산문화재단 또한 신청일로부터 3년간 활동실적이 있어야 하는 지원자격을 명시하고 있다. 활동실적은 ‘문예지·전문지·동인지·신문·잡지 등에 본인의 작품이 실린 실적’, ‘개인 작품집 발간 실적’을 뜻한다.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의 ‘창작준비금’을 신청하려면 5편 이상의 시를 문예지 등에 발표한 경험이 있어야 한다.
대체로 시인이 등단 후 첫 시집을 발간하기까진 빠르면 3년, 느리면 7년이 걸린다. 아직 이렇다 할 활동실적을 내기 힘든 신인시인들은 지원사업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조규수 한국현대시인협회 사무국장은 “현재 정부기관과 문화단체들이 시행하고 있는 지원사업은 참여가 까다로워 일부 시인들만 한정적으로 지원을 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취업률에 급급한 대학…시와 멀어지는 시인지망생
등단만 바라보고 있는 시인지망생의 상황도 열악하다. 시인의 꿈을 갖고 시인지망생은 대학교 문예창작과에 입학하지만 거세지는 대학 간 취업률 경쟁 속에서 문예창작과는 어느새 ‘2등 학과’ 취급을 받고 있다. 이미 많은 대학에서 취업률을 올리기 위해, 정부의 예산지원사업을 따내기 위해 문예창작과를 폐과하거나 타과와 통폐합한 상태다.
지난해 7월 19일 기준 문예창작학과가 있는 대학·대학원(전문대 포함) 71개교 중 23개교가 문예창작과를 없애거나 타과와 통합했다. 서일대의 경우 2014년 취업률이 낮다는 이유로 문예창작과 폐지를 시도했지만 학생들의 반발에 부딪히자 영화방송예술과로 통합했다. 동아대는 2015학년도부터 문예창작과와 국어국문학과를 한국어문학과로 통합하며 입학정원을 줄였다. 대진대 문예창작과 학생 B(25)씨는 “학교에서 문예창작과를 없애려는 움직임이 계속 있다 보니 학생들이 ‘문예창작과는 비전이 없다’라는 생각에 전과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시인 등 전업 작가를 희망하는 학생도 점점 줄고 있는 것 같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등단과 취업의 이중고
등단과 취업을 동시에 준비해야 하는 현실도 시인지망생에겐 큰 고민이다. 중앙대 국어국문학과 학생 전명환(23)씨는 ‘시인은 직업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전씨는 “시로는 먹고 살 수가 없으니 생계를 유지할 다른 직업을 구해야 한다”며 이를 ‘시인지망생들이 겪는 이중고’라고 설명했다. 취업준비에만 집중하더라도 취업이 어려운 현실 속, 시인지망생은 두 개의 취업준비를 하고 있는 셈이다.
명지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 후 등단을 준비 중인 C(27)씨는 상반기 기업 공채를 준비하며 시를 미뤄뒀다. 졸업 후 그래도 돈은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시작하게 된 취업준비와 아르바이트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아르바이트와 취업 준비를 병행하다 보니 시를 쓸 시간 자체가 사라졌다.
지인들의 취업 소식이 들릴 때마다 엄습하는 조급함도 그를 시에서 멀어지게 한다. B씨는 “계속 부모님께 손을 벌릴 수도 없고 취직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를 쓰려고 해도 집중이 안 된다”며 “친구, 선배들이 취업준비와 등단을 병행하다가 시를 아예 놓아버리는 모습을 봤는데 나도 그렇게 돼가는 것 같아 두렵다”고 말했다.
▲신인시인들 위한 지원책 필요
시인협회 관계자들은 신인시인들이 등단 초기에 중도 탈락하지 않도록 이들을 위한 사회적 지원이 확대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지난 2016년 등단한 권현지(27)씨는 “많은 시인이 생계에 시달려 창작활동에 멀어지고 있다”며 “창작활동에 대한 경제적 지원, 안정적인 창작 환경 마련, 생계유지를 위한 일자리 확대 등의 정책적인 도움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또한 권씨는 시인과 시민이 소통할 수 있는 장이 조성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시인이 참여하는 시민 강좌 등을 통해 시인이 시민과 접촉할 기회가 많이 생기면 좋겠다”며 “시인의 여건을 근본적으로 개선하기 위해선 시가 낯설지 않고 일반인들도 쉽게 다가갈 수 있다는 인식을 만들어 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종호기자 홍주환인턴기자phillies@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