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손목시계 차는 사람 별로 없다. 유명 브랜드 시계라면 모를까, 그저 그런 디자인의 시계를 차느니 주머니 속 스마트폰을 꺼내 시간을 체크하는 게 훨씬 편하다. 그래서 증정용 기념품 시계는 어느 집이나 서랍 속에서 잠자고 있기 일쑤다.
그러나 ‘대통령 시계’는 다르다. 역대 대통령들이 제작해 선물로 돌린 시계는 ‘기념품 시계의 왕’쯤 되는 물건이어서 각종 중고품 거래 사이트에서도 활발하게 거래된다. 대통령 시계는 그 시계 자체가 좋아서라기보다는 어떤 경로든 당대의 최고 권력자가 직접 나눠준 선물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이번에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의 시계가 문제가 된 것도 ‘관리형 임시 권력’이 선출된 최고 권력을 상징하는 기념품을 만들어 배포한 것으로 일반에 인식됐기 때문이다.
통상 대통령 시계는 앞면에 대통령을 상징하는 봉황 마크와 대통령의 친필 사인이 들어가 있다. 이번 황 대행 시계는 앞면에는 정부 마크가, 뒷면에는 자신이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라는 인쇄체 직함과 친필 사인이 새겨져 있다. 사인을 뒷면에 배치한 점은 나름대로는 ‘오버하지 않겠다’는 뜻을 담은 것으로 여겨진다.
역대 대통령 중 기념품용 손목시계를 처음 제작한 사람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지난 1978년 12월27일 제9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것을 기념해 시계를 만들어 선물로 돌렸다. 박 전 대통령은 앞선 7월6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2,583명 중 2,578명이 참가한 간접선거에서 2,577표를 얻어 당선됐는데 이 같은 선출 방식에 대해 당연히 대중의 반발이 심했다. 이 때문에 박 전 대통령은 취임일인 12월27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하고 통행금지를 해제하는 한편 고궁 무료 개방, 1,302명 수감자 가석방 등 선심성 조치를 취했다. 이와 함께 박 전 대통령은 선심성 조치의 하나로 시계도 제작해 일부에 나눠줬는데 이것이 바로 봉황 마크와 대통령 친필 사인이 들어간 대통령 시계의 원조다. 현재 이 시계는 중고 사이트에서 35만원선에 거래된다고 한다.
이후 전두환 전 대통령도 시계를 만들었는데 스위스 제품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만 해도 한국의 시계 기술이 낮았던 탓이다. 노태우 시계는 봉황 마크가 있는 것과 없는 것 두 가지가 시중에서 발견된다. 이것으로 미뤄보면 노 전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봉황 마크가 없는 시계를 기념품으로 쓰다가 대통령이 된 후에는 대통령 시계를 만들어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대통령 시계 중 가장 대중의 입에 많이 오르내린 것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대도무문(大道無門) 시계’다. 한자 이름인 ‘金泳三’의 친필이 앞면에 있고 뒷면에는 그의 좌우명인 ‘大道無門’ 휘호를 새겨 넣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2년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이 시계를 대량 살포했는데 이 때문에 금권선거 논란이 일기도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취임 후 봉황 마크를 넣은 대도무문 시계를 대량 제작해 선물로 활용했다. 이 때문에 당시에는 “청와대에서 칼국수 얻어먹고 대도무문 시계 받은 사람이 아니라면 잘나가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이 농담처럼 돌기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시계는 뒷면에 무엇을 기념해 제작했는지를 적었다. 중고로 거래되는 한 시계의 뒷면에는 ‘남북정상회담과 첫 돌과 광복 56주년을 기념하여’라고 새겨져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시계는 케이스에 권양숙 여사의 이름도 함께 적은 것이 특징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 역시 시계를 제작했고 박근혜 대통령도 취임 첫해인 2013년 시계를 만들어 8월15일에 독립유공자들에게 처음 선물했다.
/맹준호기자 next@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