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A씨는 지난 26일 저녁 홈쇼핑으로 SK렌터카의 신차 장기렌터카 방송을 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구매를 고려 중인 현대자동차 ‘그랜저IG’에 대한 정보는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아자동차의 ‘K7’이나 한국GM ‘말리부’, 르노삼성자동차 ‘SM6’에 이어 BMW의 ‘5시리즈’나 메르세데스벤츠의 ‘E클래스’ 등 수입차에 대한 정보까지 이어졌지만 쏘나타·아반떼 등 현대차의 어떤 차종도 이미지나 가격에 대한 안내는 없었다. A씨는 “방송을 보다 K7 조건이 괜찮은 것 같아 신차 장기렌터카로 계약을 고려 중”이라고 말했다.
현대차 판매노동조합이 홈쇼핑 렌터카 판매에 제동을 걸면서 내수 판매 확대를 천명한 현대차에 부메랑이 돼 날아오고 있다. 현대차 판매노조가 홈쇼핑 판매를 하고 있는 렌터카 업체에 자사 광고와 차량 이미지 사용 중단을 요구하면서 렌터카 업체들은 현대차를 배제한 채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자동차 업계에서는 현대차 판매노조의 과도한 밥그릇 챙기기가 유력한 판매 채널을 잃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고 봤다.
1일 업계에 따르면 SK렌터카뿐 아니라 렌터카 업계 1위인 롯데렌터카도 지난달 진행한 신차 장기렌터카 홈쇼핑 방송에서 현대차의 이미지나 광고 화면을 일절 노출시키지 않았다. 홈쇼핑 판매 차종도 현대차 영업사원들이 잘 팔지 않는 LPG 차량으로 선정했다. 롯데렌터카는 3월 방송에서도 기아차 위주로 방송을 꾸릴 예정이다.
현대차 판매노조는 지난해 말 렌터카 업체들에 홈쇼핑 방송에 자사의 이미지나 광고를 사용하지 말라는 항의 공문을 보냈다. 신차 장기렌터카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홈쇼핑을 통해 차를 사는 고객이 늘고 이로 인해 영업사원들의 판매량이 감소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 렌터카 업체들은 현대차 판매노조와의 마찰을 우려해 홈쇼핑에서 현대차라는 브랜드가 없는 듯 방송하고 있다.
업계는 현대차 판매노조가 자동차 시장이 소유에서 사용으로 가치가 이동하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행태라고 지적한다. 지난해 렌터카 등록대수는 63만8,000대로 전년 대비 17% 급성장했다. 롯데렌터카는 신차 장기렌터카 계약이 40%가량 급증했다. 현대차 입장에서는 영업사원뿐 아니라 렌터카 업체를 통해서 한 대라도 더 팔아야 내수 판매량을 늘릴 수 있는 처지다. 현대차의 지난해 국내 판매는 65만8,642대로 7.7% 감소했고 1월에도 지난해 대비 판매가 9.5% 줄었다.
현대차 판매노조는 렌터카 업체의 홈쇼핑 판매로 특정 지방자치단체에 세수가 집중되는 문제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국회와 지방자치단체·지방의회 등을 활용하는 방안도 강구하고 있다. 렌터카 업체들이 공채가 면제되는 일부 지자체에 차량을 등록해 세수가 편중되는 점을 지적하겠다는 것이다. 또 2018년부터 홈쇼핑으로 국산차도 판매가 가능해지는 것도 적극 저지하겠다는 입장이다.
국내에서와 달리 현대차는 글로벌 시장에서 이미 판매 채널 다양화에 나선 상태다. 영국과 스페인·캐나다에서는 차량을 온라인을 통해 팔고 있다. 온라인으로 견적을 받아 배송을 신청하면 집으로 차가 배달되는 방식이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판매노조 등을 의식해 온라인 판매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하고 있다. 판매 채널 다양화는 ‘원 프라이스(one price·어떤 대리점에서도 똑같은 가격으로 차를 판매하는 것)’ 제도의 붕괴와 무한 경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달라진 시장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판매노조의 이 같은 행태가 현대차에 큰 부담이 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경직된 문화는 경쟁력 강화와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판매 채널 다양화는 세계적 추세”라고 말했다./강도원기자 theone@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