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그가 삼성 미래전략실 해체라는 초강수를 둔 것은 오랫동안 구상해온 ‘뉴 삼성’을 가동하기 위한 첫걸음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특히 하루가 멀다 하고 신기술이 등장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더 이상 오너와 그룹 컨트롤타워가 각 계열사의 먹거리를 찾아주고 키워주는 방식으로는 삼성의 생존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삼성이 그룹 안에서 모든 제품과 기술을 생산하며 수직계열화돼 있어 미전실의 명령과 조율이 절대적이었다”면서도 “이제 신기술과 기업을 빠르게 사오면서 삼성의 외연이 더욱 확장되는 시대인 만큼 경직된 톱다운 방식보다 계열사별로 기민하게 움직이는 게 더 중요해졌다고 이 부회장이 생각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룹 해체라는 예상치 못한 경영쇄신안을 내놓은 이 부회장이 그리는 뉴 삼성의 핵심은 삼성전자가 선도하고 각 계열사는 각자 글로벌 생존력을 높이는 방식이 될 가능성이 높다. 앞서 이 부회장은 지난해 10월 삼성전자 등기이사로도 선임된 상태다. 샐러리맨 CEO 뒤에 숨는 것이 아니라 직접 경영에 뛰어들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좌우할 가장 큰 변수는 이 부회장의 1심 재판이다. 만약 이 부회장이 유죄를 선고받을 경우 뉴 삼성 플랜은 장기간 표류할 가능성이 크다.
이 부회장이 부재한 상태에서 당분간은 삼성전자가 다른 계열사들의 전략을 선도할 것으로 보인다. 글로벌 무대에서는 이미 ‘삼성=삼성전자’로 인식될 정도로 삼성전자의 영향력이 막강하다. 이와 관련해 삼성 관계자는 “각자도생하라는 메시지가 던져진 가운데 다른 계열사들은 삼성전자의 변화를 보고 자신들의 경영전략을 세우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ASML·시게이트·램버스·샤프 등 해외 기업에 대한 투자지분을 매각하는 한편 하만·데이코·비브랩스 등의 기업을 잇따라 인수하며 ‘선택과 집중’ 전략을 속도감 있게 진행했다. 삼성전자의 체질 개선이 이 부회장의 작품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다른 계열사들 역시 삼성전자의 방향을 쫓게 될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와 함께 3각축을 이루는 또 다른 핵심 계열사인 물산·생명 등은 전문경영인들 간의 치열한 경쟁을 통해 미전실의 공백을 메울 가능성이 높다. 다만 계열사 각자도생 체제인 만큼 회사별 성적표에 따른 가차없는 구조조정이 가속화할 수도 있다. 종전에는 미전실이 그룹의 모든 계열사를 품어 생존할 수 있게 하는 구조였지만 향후 지속적으로 적자를 내는 기업은 ‘삼성’이라는 수식어를 다는 게 불가능할 것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삼성중공업이나 삼성엔지니어링 등 이 부회장이 고민해오던 ‘중후장대’ 사업들은 보다 처절하게 살길을 찾아야 하는 셈이다.
이 부회장은 현업에 복귀할 경우 각 계열사 경영인들이 최고 역량을 발휘하게 하되 보유 지분을 통해 이사회에 개입하는 방식으로 다른 계열사를 컨트롤할 것으로 보인다. 이 부회장은 주력 계열사인 삼성전자와 삼성생명 지분을 각각 0.57%, 0.06% 갖고 있는데다 통합 삼성물산의 지분도 16.5%를 보유함으로써 지배력을 높인 상태다. 기존에는 미전실을 통해 ‘보이지 않는 손’으로 그룹을 지휘해왔다면 이제는 이사회에 의견을 내는 등 더욱 투명하게 다른 계열사에 개입할 방법을 찾을 것으로 전망된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삼성은 이제 각 계열사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드는 게 중요해졌다”며 “이 부회장이 무죄를 선고받으면 뉴 삼성 재편이 거침없이 이뤄질 것이지만 반대로 유죄 판결을 받는다면 삼성의 혼란은 상당 기간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전망했다.
/신희철기자 hcshin@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