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인의 예(藝) -<1>김환기 '매화와 항아리'] 달빛 품은 매화 터질듯 터질듯 하더니...봄에 쫓길세라 붉은 망울 터뜨려

파리의 하늘밑에서
고국의 봄을 화폭에

김환기 ‘매화와 항아리’ 1957년작, 캔버스에 유채, 55x35cm /사진제공=(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 ⓒ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터진다, 터진다 하더니 마침내 터졌다. 지난 설날, 한옥 안뜰에 청매를 키우는 지인이 갓 나온 매화 꽃망울 사진으로 신년인사를 대신했다. 한파가 매섭던 겨울 한복판에서, 아무리 추워도 봄은 기어이 오고야 만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매화 한 떨기에 딱 그만한 눈물이 맺혔다. 그러니 선비의 꽃 아치고절(雅致高節)이라 하지 않겠는가. 바야흐로 매화철이다.

봄은 짧고 그 봄을 끌고 나오는 매화를 마주할 시간은 더욱 짧다. 그래서 애가 탄다. 1956년 당시 예술의 메카이던 파리로 간 김환기(1913~1974)도 그렇게 매화를 그리워했고 매화를 그렸다. 수직으로 뻗은 줄기에서 피어난 화사한 홍매꽃 위로 둥근 백자 항아리와 보름달이 겹쳐 떠올랐다. 그 구도는 흡사 조선 중기의 문인 화가 어몽룡(1566~1617)의 ‘월매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를 떠올리게 한다. 위로 곧게 뻗어 올라간 가늘고 긴 매화가지 너머로 휘영청 둥근달이 은은하게 비추는 운치있는 그림이다. 어떤 그림인지 퍼뜩 생각나지 않는다면 지갑을 열어 신사임당이 그려진 5만원권 지폐 뒷면을 보자. 비록 지폐도안에는 공간의 한계 때문에 ‘휘영청’ 대신 옹색하게 매화 가지 끝 가까이로 달을 끌어내려 적잖은 비판이 따랐지만, 그래도 지갑 속에 그런 그림 한 장 들어 있으면 이래저래 마음이 그득하다.

다시 김환기의 그림으로 돌아오니 조선 문인의 운치와는 또 다른 청아한 격조가 흐른다. 파리에 머무르던 중년의 김환기에게 지중해의 푸른빛은 고향 신안 기좌도(현 안좌도)나 피난시절 부산에서 봤던 고국산천의 푸르름과는 사뭇 달랐다. 타국에서 자신의 근본을 끌어낸 그는 프랑스 언론 인터뷰에서 “한국의 하늘과 동해바다는 푸르고 맑으며 이런 나라에 사는 한국사람들은 깨끗하고 단순한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고국의 산하이기에 바다든 하늘이든 그에게 푸름은 ‘하나’였다.

화가는 “사람이 어떻게 흙에다 체온을 넣었을까” 감탄하며 백자 달항아리를 유독 사랑했다. 그 푸근한 모양이 상 차리는 어머니의 둥근 등짝 같지만 초라하지 않으며, 돌아앉은 마누라의 엉덩이 같다고 해도 천박하지 않다. 그렇게 말한들 백자의 아름다움이 퇴색할 리 없어서다. 화려한 수사는 미인의 두꺼운 화장에 불과하다. 화가는 둥근 달과 백자 항아리를 겹쳐 하늘에 띄웠다. 파리에서 지인에게 편지를 쓴 김환기는 “내 예술은 하나 변하지가 않았소. 여전히 항아리를 그리고 있는데 이러다간 종생 항아리 귀신만 될 것 같소” 하더니, 훗날 달을 두고는 “프랑스에서는 달보고 바보라는 말이 있다…그렇다면 달은 동양의 것일까. 불원해서 달도 정복될 모양이니 달의 신비가 깨뜨려지는 날에는 나도 태양이나 별을 그리게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흔히 김환기를 두고 추상미술에 한국적 서정성을 더한 사람이라고 한다. 1963년 미국으로 가 록펠러재단이 후원하는 뉴욕 맨해튼 73가의 예술가 아파트에 살면서 그는 거대한 문명 앞에서 청연한 자연을 노래했고 회화의 순수 그 자체를 탐구했다. 미국의 ‘추상표현주의’가 전후 미술가들의 희망·분노·공포의 감정을 드러냈고, 그 일파인 ‘색면추상’이 색만으로 사색을 이끌어냈다면 김환기의 추상은 감정적이지 않으나 은근한 한국의 정서를 담았고 점·선·면을 반복하는 노고를 통해 정신성을 보여줬다. 키보다 큰 화폭을 수만 개의 점으로 채운 1970년대 전면 점화(點畵)가 연거푸 4번이나 한국 미술경매 최고가를 경신한 이유다. 조국과 고향을 생각하며 김광섭의 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읊조리며 찍은 점. 실제 그림을 보면 점은 그냥 점이 아니라 그리운 이의 눈동자다. 단번에 찍은 게 아니라 한번 찍고 그 번짐과 울림을 관찰하며 또 찍고 바라보다 마르면 또 찍기를 예닐곱 번 거듭해 점 하나가 완성된다. 어떤 눈은 기뻐서 울고 어떤 눈은 서러워 울고, 어떤 눈은 호기심으로 가득하고 어떤 눈은 기쁨으로 충만하다. 물론 개중에는 원망하는 눈동자, 외면하는 눈동자가 없으랴만. 공감이나 서정성은 50~60년대 반(半)구상 반(半) 추상의 그림이 탁월하지만 미술시장은 말년작이 된 전면점화에게 승기를 안겼다. 과거의 자신을 버려낸 “자기(自己)를 이긴 화가”임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1956년대 팔짱을 끼고 파리 시내를 걷고 있는 김환기(왼쪽)와 김향안 부부 /사진제공=환기미술관

이름을 주고받아 영혼을 나눈 김환기 부부



“당신의 아호 향안(鄕岸)을 나한테 주면 평생 그 이름으로 살겠어요.”

시인 이상(1910~1937)의 부인이었던 변동림 여사는 남편과 사별 후 한 일본 여류시인의 소개로 김환기를 만났다. 남도 부농의 외아들인 김환기는 일찍 결혼해 딸 셋을 뒀으나 당시 이혼한 상태였다. 키 큰 사내 옆에서 반밖에 안되어 보이던 작은 여인이 강단있게 이름을 달라 청했다. 지식인이자 신여성이었던 김향안(1916~2004)은 실제로 이름의 주인을 위해 살았다. 그녀는 1955년 홍익대 미술대학 학장이자 한국미술가협회 회장이던 남편에게 “우리 바깥세상으로 나가야 해요. 파리로 갑시다” 과감하게 권했고 그때부터 불어를 공부해 1년 먼저 파리로 가 남편의 작업실을 마련했다. 그런 아내를 ‘산처(山妻)’라고도 부른 김환기는 “세상이 귀찮고 그림을 못 그릴 때면 부지중 아내에게 신경질을 부리지만 그럴 때면 찻값을 주어 내보내든지 술을 사들고 와서 한 잔 권할 때도 있다”고 적었다. 1974년 남편을 먼저 보낸 김향안은 딱 30년을 더 살면서 작가를 기리는 ‘환기재단’을 설립했고 미술관을 지었다. 종로구 부암동 환기미술관에는 두 사람을 닮은 나란한 소나무 두 그루가 높이 뻗어있고, 별관은 둘의 이름을 딴 ‘수향산방’이라 불린다. 본관에서는 주로 대작 중심의 기획전이 열리지만, 아담한 수향산방에서는 김환기의 드로잉과 소품들이 전시된다. 김환기는 떠오르는 작품을 손바닥보다 좀 더 큰 스케치북에 메모하듯 그려 자랑하듯 김향안에게 선물했고 때로는 그림으로 엽서를 만들어 보냈다. 지금은 그 엽서크기가 수 천만원의 값어치다.

환기미술관은 다음 달 14일 김환기의 1963~69년 작품을 중심으로 작가의 실험정신에 주목한 기획전을 연다. 같은 시기 삼성미술관 리움이 ‘김환기 특별전’을 개막한다는 것 또한 봄소식 만큼이나 반갑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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