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복한 어린 시절, 행복했던 기억
조부는 부산에서 자동차부품 사업을 크게 했다. 진주농대를 나온 조부는 일본 회사와 기술 제휴를 통해 최신 자동차 부품을 만들어 국내 업체에 납품했다. 그 시절 조부모 모두 승마를 취미로 삼았을 정도니 꽤 부유한 살림이었다. 아버지는 1남3녀 중 장남으로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랐다.
외가는 영화 제작 파트에서 몸 담았던 외조부 덕에 종로구 원서동에 터를 잡고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 2남 4녀의 셋째인 어머니는 부잣집 딸로 곱게 자랐다. 당시 명동 유명 미용실에서 머리 손질을 했고, 종로의 잘 나가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 ‘신여성 중에 신여성’이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나들이를 나온 김화경 대표의 모습.
“할아버지가 진주농대를 나와 젊었을 때부터 사업을 하니까 아버지 당신도 당연히 사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셨어요. 원래 가업을 이어 받을 줄 아셨는데, 할아버지 눈에 외아들이 못 미더웠는지 공장이며 회사를 다 팔아 없애서 할머니가 홧병이 나셨다고 들었죠. 그런데 나중에 커서 아버지가 사업에 잇따라 실패한 걸 제 눈으로 보니까 할아버지의 판단이 맞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김 대표의 부모는 연애 결혼을 했다. 연세대 경영학과 남학생들과 건국대 가정학과 여학생들이 단체로 미팅을 한 자리에서 ‘사다리 타기’로 짝이 됐고, ‘뜨거운’ 연애 끝에 부부의 연을 맺었다.
당시 세종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을 정도니 양 집안의 재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개포동에 신접살림을 마련했지만, 1년 만에 시어머니의 호출로 살림을 합쳤고 어머니의 ‘시집살이’는 그때부터 시작됐다.
“어머니가 결혼 전에 미국 유학을 준비했다고 들었어요. 시집을 오게 되면서 유학의 꿈을 접어야 했지만, 저를 키우면서 종종 너는 꼭 넓은 세상에서 자유롭게 자라라는 말씀을 하곤 하셨죠. 어머니한테는 고된 시집살이였지만, 어린 저한테는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들이랑 한 집에서 살았던 기억은 행복했어요. 마당도 넓고, 집안에 웃음꽃이 끊이지 않았으니까요. 고모가 아빠랑 나이 차이가 8살, 10살 차이가 나니까 오히려 저랑은 언니 같고 친했어요. 하지만 어린 시누이들 도시락 싸서 학교 보내고 그 넓은 단독주택 청소며 빨래, 음식을 가정부 하나 없이 혼자 감당한 엄마는 지금 생각해도 꽤 힘겨운 시간이었을 것 같아요. 나름 명동에서 머리 손질을 했던, 잘 나갔던 신여성이었는데 말이에요.”
김 대표의 부친은 나름 명문대 출신답게 외국계 회사를 다니며 승승장구했다. 라이프주택, 오공본드, 화이자제약 등에서 일하면서 능력을 인정 받았고, 인센티브도 적지 않아 동료 평균 월급(약 9만원)보다 많은 12만원을 받았다. 사업을 하는 조부의 재력에다 아버지 역시 탄탄한 직장인으로 살면서 은평구 신사동에 자리한 단독주택에는 당시 쉽게 보기 힘든 일본 위성 안테나가 달렸을 정도다.
엄격한 부친 아래서 자라 자신의 아이에게는 친구 같은 아빠가 되고 싶었던 아버지는 어머니와 어린 두 딸을 데리고 주말마다 여행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아빠의 가장 큰 장점은 뭘 하라고 강요하신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어느 정도 허용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는 완전한 자유를 주셨으니까요. 그래서 지금도 종종 아버지와 소주잔을 기울이는 술친구 사이이기도 하구요.”
부친의 창업, 그리고 잇따른 실패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탄탄한 회사에 다니고 있었지만 ‘사업’에 대한 아버지의 열망은 해를 거듭할수록 커졌다. 게다가 당신의 남편이 외아들에게 사업체를 물려주지 않은 게 평생 한이었던 할머니 역시 아들의 창업을 두 손 들고 환영하고 나섰다. 결국 아버지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고 1986년 창업에 나섰다. 직장 생활 중에 눈 여겨봤던 사업 아이템인 구두 인솔(신발 깔창) 납품이었다. 당시 에스콰이어, 엘칸토, 금강제화 등 빅3 제화업체들이 승승장구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구두 제조 중소기업도 적지 않아 거래처가 많다는 점이 아버지에게는 매력적인 시장으로 판단됐던 듯 싶다.
여행을 즐겨 다녔던 아버지를 따라 온 가족이 나들이에 나섰다. /사진제공= 김화경 대표
처음에는 사업이 순탄하게 굴러갔다. 아파트며 땅이며 부동산을 여럿 갖고 있었던 할머니가 아낌 없이 사업 밑천을 댔고, 아버지도 영업력이 적지 않았던 만큼 몇 년 만에 거래처가 늘었다. 자신감이 붙은 아버지는 천안 아산에 땅을 샀고 공장을 지어 올렸다. 하지만 평화로운 시기는 오래 가지 않았다. 주먹구구로 사업을 운영하면서 거래처로부터 받은 어음이 부도처리 되는가 하면 공장 지을 돈을 구하느라 여기 저기 빚을 내면서 전체적인 현금 흐름이 막혔다.“저희 집에 잘 살았던 건 아버지가 사업하기 전인 것 같아요. 조금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 ‘우리 집은 가난하구나’라고 느끼기 시작했죠. 할머니가 갖고 있던 부동산을 다 팔아서 돈을 대주셨는데 그걸로도 감당이 안 될 정도로 상황이 악화됐어요. 중학교 때는 육성회비를 내지 못해 교무실에 불려간 기억도 있어요. 당시 전교 5등 안에 들 정도로 공부를 꽤 잘했는데, 육성회비 때문에 선생님에게 불려갔던 게 너무 창피했었죠.”
어린 시절부터 김 대표는 리더십이 남달랐다. 대가족의 관심과 사랑을 듬뿍 받았던 만큼 모든 일에 자신감이 넘쳤고 초등학교 들어가면서부터는 반장 자리를 놓치지 않았을 정도다. 지금까지도 아쉬움으로 남은 건 초등학교 6학년 때 전교 회장 나갔다가 아깝게 떨어진 것. 여자 친구 못지 않게 남자 친구가 많았고 남자애들이 그의 책가방을 들고 집에 와서 어머니에게 혼이 난 기억도 있다.
“집에 일본산 게임기가 많았는데 그걸 한 번이라도 하고 싶어서 남자애들이 제 책가방을 자청해서 들었던 거였죠. 집에 오면 엄마가 살뜰하게 간식을 챙겨주셨고 마당도 넓어서 애들이랑 뛰어 놀기도 좋았어요. 반에서는 항상 인기가 많은 아이였고, 구김살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행운인 것 같아요.”
방학 때마다 아산 공장에 내려가 논이며 밭 사이를 뛰어 놀았고 저녁이면 공장 아저씨들과 삼겹살 바비큐 파티를 했다. 아버지의 사업이 어려워진 건 그녀가 중학교 들어가면서부터. 중학교 3학년 때는 신사동 친가를 처분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녀의 가족은 역촌동의 14평짜리 월세로 옮겼고, 조부모는 아산 공장 기숙사에서 지내야 했다. 다행히 이모할머니 소유의 아파트 한 채가 있어 조부모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 집에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집안 사정은 어려웠지만 특유의 쾌활함으로 이겨내곤 했다. 사진은 고등학교 소풍날 친구들과 함께 했던 모습. /사진제공=김화경 대표
“저희가 이사 간 집은 6세대가 살고 있는 낡은 빌라였는데, 하루는 학교에서 돌아오니까 엄마와 여동생이 나와 있더군요. 집이 너무 답답해서 나와 있었다고 하면서요. 육성회비를 못 내서 교무실에 불려 갔을 때보다 그때가 더 슬펐던 것 같아요. 엄마는 회사를 살리겠다고 두꺼운 인솔 샘플북을 들고 지하철로 거래처를 다니셨구요. 그게 여자 혼자 들기에는 꽤 무거운데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그 고생을 하셨지요.”가정 형편이 급속도로 기울면서 사춘기 소녀의 방황도 시작됐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공부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걸 더 즐겼다. 야간자율학습을 제치고 포켓볼을 하러 가거나 노래방을 찾았다. 인근 남자고등학교 친구들과 어울려 놀았고, 웬만한 학교 축제는 다 찾아 다녔다. 술을 배운 건 고등학교 3학년 때, 당시 유행하던 레몬소주가 그녀의 첫 주류 사회 입문 메뉴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그나마 남았던 값나가는 세간살이에 빨간 딱지가 붙는 경험도 했다.
컴퓨터공학과 입학, 자유롭게 보낸 대학 시절
막상 대학을 가려고 하니 성적이 너무 많이 떨어졌다. 유난히 컴퓨터를 좋아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컴퓨터공학과 중에서 성적이 맞는 곳을 골랐다. 당시 특차 전형으로 동덕여대 컴퓨터공학과 98학번으로 입학했다.
“고등학교 때 컴퓨터를 워낙 좋아하니까 없는 살림에 아버지가 200만원이 넘는 노트북을 사주셨어요. 집에 빨간 딱지가 붙었을 때도 노트북만은 건지려고 이불 속 깊은 데 숨기기도 했었지요. 오히려 어머니는 결혼 예물로 받은 보석들을 다 처분해서 금가락지 하나 남은 게 없었는데요. 그렇게 어려운 와중에도 컴퓨터만큼은 계속 하고 싶은 욕심에 컴퓨터공학과만 고집했던 거였죠.”
중학교 때까지 전교 상위권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맏딸이 고등학교 들어와서는 노래방을 다니며 방황을 하고 학원이나 야간자율학습을 땡땡이치자 어머니의 근심은 커졌다. 그러다 부모와 상의 한 마디 하지 않고 특차로 대학에 붙자 어머니는 속이 상해 밥그릇을 던지기도 했다.
막상 대학에 입학했지만 등록금 마련이 쉽지는 않았다. 이모할머니며 친척들이 십시일반 모아 3학기 충당할 등록금은 마련했고, 나머지는 학자금 융자를 받아서 해결했다.
그렇게 좋아하는 컴퓨터공학과에 들어왔지만, 공부는 뒷전이고 풍물패 활동에 푹 빠져 대학 생활을 보냈다. 공대 풍물패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웬만한 서울시내 대학가 축제는 다 따라 다녔고, 과 친구들의 단체 미팅 주선도 김 대표의 몫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친하게 지냈던 남학생들을 통해 미팅을 주선했고, 그녀 역시 원 없이 낭만적인 대학 생활을 즐겼다.
그렇게 대학 생활을 즐기던 와중에 부친의 회사는 하루가 다르게 기울었고, 결국 그녀가 대학 3학년 때 부도 처리가 됐다. 당시 그녀는 과 학생회장을 맡으며 의미 있는 인식의 전환기를 맞이하게 됐다.
당시 동덕여대가 학점당 등록금제로 바꾸려는 정책을 내놓았는데, 등록금을 끌어올리는 효과가 있다고 판단돼 학생회를 중심으로 반대 투쟁을 벌일 때였다.
대학시절 풍물패에서 활동하던 시절의 모습. /사진제공=김화경 대표
“다른 사립대의 경우 등록금 총액은 저희랑 비슷했는데 별도로 학생회 차원의 시위는 없더군요. 그래서 이유를 물어보니까 학교에서 제공하는 혜택이 있었던 거죠. 등록금이 비싼 만큼 기자재를 잘 갖춘다거나 학생을 위한 복지 시설에 투자한다든가 하는 등의 학교 당국 차원의 노력이 있었기에 굳이 시위를 할 필요가 없었던 거죠. 하지만 저희 학교는 그런 게 부족하다고 판단했고 사무처장과 함께 학생회장들이 간담회를 가졌습니다. 그때의 경험이 나중에 스웨덴에 유학을 가서 북유럽 국가의 복지와 세금 문제를 들여다보는 단초가 되기도 했죠.”소프트웨어 회사에서 사회 생활을 시작하다
졸업하기 직전인 2002년 취직이 됐다. 단문메시지서비스(SMS)를 컴퓨터로 보내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벤처기업인데, 처음에는 아르바이트로 시작했다. 서비스 패키지에는 무선 모뎀도 포함됐는데, 하나 팔면 4만원씩 받기로 했다. 물론 쉽지 않았다. 3개월 동안 단 한 개밖에 팔지 못한 것. 하지만 그녀의 열정과 성실성을 눈 여겨 본 대표는 그녀를 개발자로 고용했다.
남자들이 주류를 이루는 벤처기업, 그것도 개발팀에서 일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를 맡게 된 사수(선임)인 남자 선배는 절대 여직원과 일할 수 없다며 손사래를 쳤고, 그런 환경에서 인정 받기 위해 악바리처럼 버텼다.
“여느 개발자처럼 밤새 프로그램을 만져야 했고, 책상 밑에 침낭을 깔고 자는 일도 부지기수였죠. 야근이 불편하긴 했지만 그들(선배)처럼 하기 위해선 그만큼 노력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악바리처럼 버텼습니다. 저를 마다했던 선배는 친해져서 지금도 종종 만나 술을 마시곤 하는데, 너만큼 잘 하는 후배를 아직 못 만났다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들으니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돌이켜보면 제가 다룰 수 있는 프로그래밍 언어는 이 회사에서 다 배웠습니다.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운, 진심으로 고마운 곳입니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일을 하고 있던 중에 총무과에서 월급이 차압 들어왔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아버지의 공장이 부도가 나면서 체납된 직원들의 의료보험 때문에 직계인 그녀의 월급이 차압된 것. 어머니가 힘들게 돈을 빌려 해결하긴 했지만, 회사 동료들에게 창피해서 화장실에서 혼자 울었던 기억도 생생하다고 한다.
연봉 1,300만원으로 시작한 직장 생활은 3년 만에 3,600만원으로 올랐다. 회사가 중국 시장용 삼성 핸드폰에 들어가는 부품을 만들면서 중국 출장도 숱하게 다녔다. 하루 24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바빴고, 개인 시간은 엄두도 내지 못했던 시기였다.
우연히 선택한 스웨덴 유학, 그녀의 인생을 바꾸다
그렇게 힘들게 회사를 다니면서 탈출구를 찾기 시작했던 그녀의 눈에 어느 날 공중파 방송에서 방영한 스페셜 프로그램 ‘이공계가 답이다’가 들어왔다. 스웨덴왕립공대(KTH· Kungliga Tekniska Hogskolan) 학생이 인터뷰를 하는데 학비 없이 맘껏 공부를 한다는 말이 귀에 꽂혔다.
“순간적으로 별이 반짝하는 느낌이었어요. 학비를 내지 않고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는 사실에 놀랐죠. 3개월 동안 휴직하고 영어시험을 준비했습니다. 사장님이 연봉을 올려주겠다, 미국에 지사를 낼 예정이라며 꼬셨지만(?) 넘어가지 않았죠.(웃음) 배수의 진을 쳐야겠다 굳게 마음을 먹고 9월에 사표를 냈어요. 휴직하고 시험 봤을 때보다 성적이 많이 오르더군요. 원하는 점수가 나와서 헬싱키 공대와 스웨덴왕립공대(KTH) 두 곳에 지원서를 냈어요. 합격 통지는 KTH에서 왔구요. 비행기 티켓값과 몇 달 버틸 생활비는 벌어야 해서 2006년 1월부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을 모았고 8월에 비행기를 탔습니다.”
그녀가 지낸 KTH IT캠퍼스는 시스타 사이언스 시티(Kista Science City)라는 곳에 위치해 있는데, 유럽의 실리콘밸리라 칭해지며 산학연 클러스터의 대표적인 성공모델로 꼽힌다. 에릭슨, 노키아, HP, IBM 등 글로벌 기업들이 시티 안에 함께 하면서 학교와 협력해 연구를 진행한다.
스웨덴 유학시절 기숙사 친구들과 함께 즐거운 저녁 식사를 하는 모습. /사진제공=김화경 대표
김 대표는 인터랙티브 시스템 엔지니어링(Interactive System Engineering)이라는 인터내셔날 마스터 코스(International Master course)에서 1년 6개월간 코스워크(course work)를 거친 후 7개월 간의 논문 과정을 거쳤다. 수업은 모두 영어로 진행됐는데, 20명의 과 학생 중에서 절반은 유럽 출신, 7명은 중국 출신, 한국인은 김 대표 혼자였다. “학사 과정을 마치고 바로 온 학생도 있었고 저처럼 회사를 다니다 온 학생도 있었어요. 제가 정말 놀란 건 아이 셋을 낳고 온 아줌마 학생도, 버스 운전기사를 하다 온 아저씨 학생도 있었던 거에요. 복지가 잘 돼 있으니 자신이 정말 공부하고 싶을 때 공부를 할 수 있는 거죠. 학비가 들지 않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교육의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렇게 만학도가 있는 게 절대로 신기한 일이 아닌 거죠.”
김 대표에게 아직도 인상 깊은 장면으로 남은 수업은 그룹워크 프로젝트를 위한 열띤 토론이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브레인 스토밍에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했고, 학생들이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수업에 임하는 학생들의 태도를 보면서 김 대표에게는 서양 학생과 동양 학생의 차이가 확연하게 다가왔다.
“여러 국적의 친구들이 함께 수업을 들었던 만큼 각 국가별 초중고 수업 방식을 비교해 보니까 아시아 지역 학생들은 받는 수업 문화에 익숙한 반면 유럽 지역 학생들은 어릴 때부터 토론 수업에 많이 노출됐더군요. 그룹 프로젝트로 진행하는 수업을 어릴 적부터 했던 만큼 토론이 몸에 배어 있고, 그만큼 다른 의견을 경청하고 자신의 의견을 내는 방식도 익숙하구요.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어릴 적부터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출하고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문화 안에서 향상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장면인 것 같습니다.”
물론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입장에서 김 대표가 수업을 따라가기란 쉬운 게 아니었다. 첫 3개월은 모든 게 낯설고 힘들었고, 교수의 강의 내용도 30% 밖에 이해하지 못했다. 교수가 과제를 내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헤맸다고 한다. 그때마다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준 건 중국 친구들이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난 후에는 레바논 친구를 사귀며 영어 실력도 덩달아 향상됐다고 한다.
그녀가 2년 3개월간 유학 생활을 하는 동안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했다. 주재원의 자녀를 가르치기도 하고, 대사관의 행사 요원으로 일하기도 했고, 현지 법인으로 출장을 오는 임직원을 대상으로 가이드를 하기도 했다. 가장 오래 했던 일은 LG 스칸딕 법인에서 통역 및 사무직 아르바이트를 했던 것이다.
스웨덴 유학 시절, 스톡홀롬시립도서관에서 전공 서적을 찾는 김화경 대표의 모습.
“현지 엔지니어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본사 엔지니어들이 출장을 오곤 하는데요. 저는 출장자들을 챙기면서 그들의 원활한 의사 소통을 위해 통역을 맡았습니다. 스칸딕 법인이다 보니까 스웨덴뿐만 아니라 핀란드나 노르웨이로 출장을 가기도 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기회였던 것 같아요.특히 소수자에 대한 배려가 인상 깊었는데, 대부분이 스웨덴 사람인 애프터서비스팀에서도 점심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실 때 제가 대화 내용을 못 알아 들을까봐 스웨덴어가 아닌 영어로 대화하는 모습이 무척 고마웠어요. 당시 경험은 제가 나중에 삼성에 근무하거나 스타트업을 창업한 후에 타인과 일을 할 때의 태도와 마음가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방향을 제시해줬지요.”또 하나의 소중하면서도 감동적인 기억은 한글학교였다. 김 대표는 성인 기초반을 맡았는데, 엄마가 한국인인 고등학생이나 한국과 사업을 하는 중년 여성, 어릴 적 입양된 40대 여성인 헬렌 등 학생도 무척 다양했다.
김 대표는 지금도 헬렌 생각이 가끔 난다고 한다. 어느 날 수업이 끝나자 헬렌이 김 대표에게 다가와 개인적인 일로 부탁할 게 있다며 대화를 청했다. 한국에서 생모가 자신을 찾고 있고, 자신이 엄마한테 편지를 썼는데 한국어로 번역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김 대표는 카페에서 그녀와 마주 앉아 3시간에 걸쳐 대화를 나누며 번역을 진행했다. 자신의 엄마에게 편지를 쓰듯이 번역을 해도 되냐고 의견을 묻자 헬렌이 흔쾌히 동의했고, 한국적인 정서와 언어를 담아 정성스럽게 편지를 썼다.
“편지 마지막 부분을 번역하고 있을 때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어요. 헬렌도 함께 울었구요. 특별히 이유가 있었던 것 아니지만 서로의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쳤기 때문인 아닌가 싶어요. 헬렌은 주변의 상당수 입양아처럼 돈 때문에 자신이 팔리지 않았을까 내심 걱정했어요. 자신은 그런 경우가 아니길 바라고, 엄마가 자신의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결정한 것이라 믿고 싶어 했어요. 그로부터 얼마 후에 엄마를 만나러 한국에 다녀왔는데, 너무 기쁘고 행복했다고 하더라구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다양한 삶을 접했지만 그녀 역시 공부가 최우선 목적인 터라 전공에 전력투구해야만 했다. 포르투갈 학생 2명, 이탈리아 학생 2명과 함께 팀을 이뤄 석사 논문 작업을 했다. 논문 주제는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Graphic User Interface)를 기반으로 한 무선 센서 네트워크 진화(Developing Wireless Sensor Network GUI)였다.
스웨덴이 맺어준 삼성과의 인연
스웨덴에서 남부러울 것 없는 자유를 누리고, 맘껏 공부하면서 사실 현지에서 직장을 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외국인인 그녀로서는 정규직을 구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던 중 우연치 않게 새로운 인연이 찾아왔다.당시 삼성전자가 시스타(KISTA)에 관심을 가지면서 현지 투어 코디네이팅을 맡게 된 것. ‘북유럽의 실리콘 밸리’로 꼽히는 스웨덴의 시스타 사이언스파크는 성공적인 산업클러스터 구축 모델로 전세계 정보기술(IT) 기업들이 자주 찾고 있다. 그녀를 눈 여겨 본 삼성전자 임원이 졸업할 때쯤 이력서를 넣으라고 당부했고, 오랜 유학 생활로 가족에 대한 그림이 커져갔던 그녀는 삼성에 경력직 연구원으로 이력서를 넣었다. 6년의 경력을 인정 받고 삼성전자 무선사업부 선임연구원으로 입사했다. 그때가 2009년 1월. 누구나 부러워하는 대기업에 들어간 기쁨도 잠시, 업무 강도가 너무 높았다.
“삼성에서 7년을 일했는데, 그만 두겠다는 말을 매일 달고 살았던 것 같아요(웃음). 야근은 필수고, 주말마다 근무를 해야 했죠. 군대 문화 같다고 해야 하나? 제가 원래 자유를 추구하는 성격이라 그런지 조직 문화에 익숙해지기 힘들더군요.”
그러다 2012년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S#TF라고 스마트폰의 차세대 콘셉트를 발굴하는 태스크포스에 참여하게 된 것. 각 부서의 다양한 인력을 한 모아 자유롭게 토론하면서 아이디어를 발굴하는 TF였다.
“노트1이 나오고 노트2를 준비하는 시점이었어요. 저는 노트1의 메모 애플리케이션 개발 업무를 하다가 합류했는데, 펜으로 메모를 하는 기능을 계속 발전시키면서 TF에 함께 하게 됐어요. 원래 3개월씩 로테이션을 하는데 저는 2년 정도 그 팀에서 일을 했습니다.”
김 대표는 2015년 사내 벤처 육성 프로그램인 C-Lab에 공모 신청을 했다. 사진은 C-Lab 회의를 진행하고 있는 김화경(왼쪽 첫번째) 대표의 모습.
태스크포스에서 일을 하면서 김 대표는 중요한 인연을 만나게 된다. 삼성소프트웨어 멤버십을 통해 들어온 학생들과 팀을 이뤄 과제를 진행했는데, 몇 년 후 이들이 로켓뷰의 창업 멤버가 됐다. 박인수 이사(서버 개발), 이원희 이사(소프트웨어 개발), 이기헌 이사(UX, GUI)가 바로 그들이다.
삼성소프트웨어멤버십은 삼성전자가 소프트웨어 관련 실무능력이 있는 대학(대학원) 재학생을 대상으로 연구개발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으로, 졸업 후 삼성전자 입사의 기회가 주어져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다.
“그때 제안한 아이디어 중 몇 개는 노트3에 채택되기도 했구요. 예컨대 전화번호를 메모에 적으면 전화가 걸리는 기능 같은 거요. 삼성소프트웨어 멤버십은 등급별로 월급을 책정하는 구조라, 제가 이 친구들한테 주는 등급도 최고인 ‘S등급’이었죠.”
3명의 후배와 함께 창업의 길로 들어서다
자유롭게 개발하고, 비즈니스를 하고 싶은 열망을 품고 있었던 김 대표는 2015년 사내 벤처 육성 프로그램인 C-Lab에 공모 신청을 했다. 삼성전자가 지난 2012년말 도입한 C-Lab(Creative Lab)은 임직원의 혁신적 아이디어를 발굴하기 위한 사내 벤처 육성 프로그램으로, 아이디어 공모전에 자신의 아이디어를 출품하고, 아이디어가 당선되면 사업화할 수 있도록 지원해 준다. 매년 2,000여명의 임직원들이 C-Lab 공모전에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이 중 선정된 임직원들은 3~4명이 팀을 이뤄 6개월~1년간 해당 아이디어 실현에만 집중할 수 있다.로켓뷰의 대표 서비스인 ‘라이콘’의 작동 원리.
“스마트폰 카메라를 이용하여 사물을 인식하는 기술이었어요. 츨퇴근 시간이 정해지지 않은 데다, 월급은 월급대로 다 나오고 과제비가 1억원 이상 지원되니까 개발자에게는 이처럼 행복하게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없죠. 진행하다가 아이템이 쓸 만 하면 다른 사업부로 이관되기도 하고, 스핀오프(Spin-off·회사 분할)를 하기도 하고, 그게 아니면 원 팀으로 복귀하는 거니까요. 1년간 정말 재밌게 일했습니다.”김 대표에게 주어진 길은 2번째 길이었다. 회사에서 스핀오프 교육까지 받고 2016년 11월 법인을 설립했다. 누구나 해외 여행을 떠나서 숙소의 낯선 기기를 작동하지 못해 곤란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로켓뷰는 이러한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라이콘(LiCON·Lightly Control)’을 개발했다. 스마트폰 카메라로 특정 기기를 찍으면 컨트롤러, 사용 매뉴얼, 제품 정보 보기 기능 등이 화면에 나타난다. 처음 보는 제품이라도 손쉽게 작동할 수 있게 된다.
현재 삼성이나 LG의 에어컨, TV는 모두 인식할 수 있고, 샤오미나 필립스의 생산 제품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특히 현재 인식되지 않더라도 모델링 과정을 거치면 사용자가 직접 등록해 인식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인공지능의 한 분야인 딥러닝 기술을 적용한 덕분이다. 라이콘이 사진을 인식하고 스스로 정확도를 높이는 방식이다. 비즈니스 모델은 B2B(기업간 거래)다. 개인 고객을 겨냥하는 게 아니라 숙박O2O 플랫폼과 체험형 IT기기 매장을 타깃으로 삼는다.
“LiCon 숙박관련 사업 아이디어는 제 개인 경험에서 나왔어요. 말레이시아에 출장을 갔는데 호텔 내에 기기를 작동하지 못해 호스트를 불렀거든요. 전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혹은 아무리 신제품이 나와도 작동이 수월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던 거죠. 물론 우리나라에 처음 방문한 외국인들도 한글을 몰라도 보일러나 에어컨을 작동할 수 있으면 좋으니까요.”
로켓뷰가 야심차게 선보인 ‘찍검’ 서비스의 작동 원리.
올해 초에는 B2C 모델인 ‘찍검(찍고 검색)’ 베타 서비스를 내놓았다. 스마트폰으로 상품명을 찍으면 최저가를 검색해주는 서비스다. 가격뿐만 아니라 해당 제품에 대한 리뷰와 추천 글까지 함께 올라오는데, 1차적으로는 화장품 쇼핑몰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우선 이용자를 늘리고, 중장기적으로는 화장품 가격비교 플랫폼으로 입지를 굳혀 광고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게 목표다.소프트웨어 개발업체에서 일하다 스웨덴에서 유학 생활을 하고, 삼성전자에 입사했다가 7년 만에 창업 전선에 뛰어든 김화경 로켓뷰 대표, 그녀에게 창업 후배를 위한 조언을 부탁했다.
/정민정기자 jminj@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