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한마디 꺼내기 조심스러운 시절이다. 탄핵정국이 길어지면서 피로감만 쌓이다 보니 신경이 곤두선 탓이다. 심지어 얼마 전 만났던 어느 중소기업 사장은 탄핵사태로 회사 경영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하소연까지 전했다. 30명 남짓한 직원들이 촛불과 태극기로 나눠 티격태격하는 바람에 정상적인 업무에 영향을 미칠 정도라는 것이다. 고심 끝에 업무시간은 물론 회식자리에서도 정치 얘기는 입에도 올리지 말라고 호통을 쳤지만 별반 소용이 없다고 했다. 같은 편끼리 모여 수군거리고 상대편을 극도로 경원시하는 모습은 혀를 내두를 지경이라고 탄식했다. 탄핵사태가 초래한 우리 사회의 씁쓸한 자화상이 아닐 수 없다.
탄핵정국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사회 분열양상도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결정선고가 초읽기에 들어가면서 헌재를 압박하는 목소리도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자신들의 뜻이 관철되지 않는다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나 ‘국민적 저항’을 각오하라며 연일 으름장을 놓고 있다. 이런 와중에 탄핵을 찬성하든 반대하든 공통으로 나오는 얘기가 한 가지 있다. 바로 헌법재판관들이 만장일치로, 즉 ‘8대0’으로 탄핵심판을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법률을 배우고 상식을 갖춘 헌법재판관들의 당연한 의무인양 확신에 찬 목소리로 그래야 한다는 투다. 만약 소수 의견이 나온다면 사회 분열을 조장하고 반대편에 빌미를 준다며 나름의 충정을 내세우는 것도 똑같다. 헌법기관의 판단 자체에 왈가왈부하며 간섭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모 아니면 도’라는 식으로 대놓고 만장일치 결정을 겁박하면서 이를 당연한 권리로 여기는 풍토는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헌법에서는 대통령 탄핵이나 법률의 위헌 결정에 대해 헌법재판관들의 3분의2가 찬성해야 통과되도록 명시하고 있다. 우리뿐만 아니라 미국이나 유럽 등 많은 선진국들이 엇비슷한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국가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법적 안정성을 도모하고 다수결의 원칙을 수용하겠다는 사회적 약속이다. 그런데도 북한 같은 전체주의 국가에나 등장할 만한 만장일치 판결을 수용하라고 헌재에 요구하는 것은 헌법 정신과 법치주의를 정면으로 부인하는 행태가 아닐 수 없다. 그것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을 자부하는 나라에서 억지 주장이 난무하고 있으니 세계의 비웃음을 살 만한 일이다. 유대인은 예로부터 ‘만장일치는 무효’라는 대원칙을 갖고 있다고 한다. 어느 일방의 의견만 존재하는 재판은 근본적으로 공정하지 않을뿐더러 권력이나 이권이 개입하지 않으면 만장일치로 결론 낼 수 없다는 인식을 밑바탕에 깔고 있는 셈이다. 설령 살인죄에 버금가는 재판이 열리더라도 최소한 한 명의 재판관은 피고인의 입장에서 무죄를 주장하도록 강제 의무조항을 만들어놓고 있다. 때문에 사형 선고가 내려지더라도 만장일치라는 판결은 절대 있을 수 없다.
조만간 공개될 헌재 결정은 단지 몇 대 몇이라는 숫자에 울고 웃는 야구경기나 퀴즈게임이 아니다. 어느 한편이 이기면 다른 편이 지는 게 아니라 살면 다 같이 살고 죽으면 다 같이 죽는 것이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이런 와중에 정작 중요한 탄핵심판의 본질과 국민의 판단을 흐리게 만드는 일부 정치세력의 행태는 개탄스러울 따름이다. 이제는 ‘내 편 네 편’으로 판 가르기에만 골몰하는 집단사고의 덫에서 벗어나 다양성과 개방성이라는 새로운 시대 정신을 실행에 옮겨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우리는 탄핵심판 이후라는 역사적 고비를 맞고 있다. 모두가 나라의 발전을 바라고 미래세대를 걱정한다면 갈등과 대립에서 벗어나 헌재의 결정에 깨끗하게 승복해야 한다. 위기 때마다 한마음으로 뭉쳐왔던 국난 극복의 저력을 다시금 보여줘야 한다. 이를 위해 국민들의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풀어주고 통합의 대한민국을 세우는 것은 오롯이 정치 지도자들의 몫일 것이다. ssang@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