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재가 지금 같은 위상을 갖추게 된 건 최근의 일이다. 1960년 장면 내각은 헌재 구성에 성공하지 못했고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정권 당시 헌법위원회라는 유명무실한 기관으로 존재했다. 게다가 헌재는 1988년 출범 후에도 헌법상 동위에 있는 대법원의 견제를 받아왔다. 2012년에도 헌재가 대법원의 해석을 위헌으로 판단한 ‘GS칼텍스 법인세 소송’ 때문에 두 최고법원 간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헌재는 2004년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소추안을 기각하고 다시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행정수도 이전에 제동을 걸며 일반인에게 낯설지 않은 이름이 됐다. 신행정수도의건설을위한특별조치법 위헌확인 선고 당시 “대한민국 수도는 경국대전 이래로 내려오는 관습헌법에 따라 서울로 규정되며 수도를 이전하려면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헌재 판결은 거센 비판을 받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 탄핵 심판의 주심을 맡았던 주선회 전 헌재 재판관은 과로와 스트레스로 선고 직후 폐 절제 수술을 받았다.
이밖에 헌재는 사상 처음으로 정당을 해산시킨 2014년 통합진보당 해산 심판, 친일 재산 몰수 규정 합헌, 남자를 통해 승계되는 호주제 헌법불합치, 유신 헌법 시절 대통령 긴급조치 위헌 등 굵직한 사안에 시비를 가리며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안착에 공헌했다고 평가받는다. 법조계의 한 관계자는 “한국은 유럽을 제외하면 거의 유일하게 제대로 작동하는 헌재를 둔 나라로 꼽힌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번 탄핵을 계기로 현행 헌재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특히 박한철 전 헌재소장(1월31일)과 이정미 헌재소장 권한대행(3월13일)의 퇴임 일정이 탄핵심판과 겹치면서 재판관 공백 사태가 불거지기도 했다. 대통령 탄핵, 수도 이전 등에 대한 헌재 결정이 ‘사법적 형식의 의복을 걸친 정치적 결단’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또 헌법 제107조에 따라 규범통제 관할권이 이원화돼 있어 헌재와 대법원의 관할권 분쟁을 초래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종혁기자 2juzso@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