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 무스타파 케말 파샤를 비롯한 터키의 젊은 군 장교들은 ‘술탄’의 나라 오스만제국이 유명무실해지자 청년 비밀결사단체를 결성해 국가 재건에 나섰다. 이들이 꺼내 든 카드는 세속주의와 근대화였다. 이슬람 통치와 거리를 둔 이들은 1923년 앙카라를 장악한 뒤 강력한 개혁 작업을 앞세워 터키 부활의 토대를 닦았다. 이 이후 군부세력은 터키의 민주적 제도를 수호하는 핵심세력으로 자리를 잡았다. 터키 군부는 정부가 이슬람주의로 나가려는 조짐을 조금이라도 보이면 쿠데타를 일으켜 국가 정체성을 바로 잡았다. 비록 지난해 7월 다섯 번째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가기는 했으나 터키에서 군부의 힘은 여전히 막강하다. 이처럼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터키 군부를 정치학자들은 ‘딥 스테이트(deep state)’라고 불렀다.
비민주적인 숨은 권력을 뜻하는 딥 스테이트는 터키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 심심찮게 목격된다. 도미니카공화국에서 라파엘 레오니다스 트루히요는 1930년부터 1961년까지 무려 32년간 막전막후에서 권력을 휘둘렀다. 트루히요는 19년 동안 막강한 대통령의 권한을 행사했고 권좌에서 내려온 뒤에도 13년 동안 측근이나 동생을 내세운 뒤 막후에서 나라를 지배했다.
권위주의 국가에서나 사용되는 용어인 딥 스테이트가 최근 미국에도 등장해 주목을 받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오바마 도청 의혹’을 제기하자 극우 진영이 맞장구를 치고 나선 것이다. 이들은 마이클 플린 전 국가안보보좌관 사임에서 도청 의혹까지 일련의 흐름이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을 따르는 정보기관 등 막후 세력 때문에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건이 확대되면서 하원 정보위원회가 증거 제시를 요구하자 백악관은 “증거를 갖고 있지 않다”며 한발 물러섰다. 이에 따라 오바마 도청 의혹은 실체 없는 소동으로 끝날 공산이 커졌다. 결국 대통령의 가벼운 입이 미국의 국격을 비민주적인 국가와 같은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모양새다. /오철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