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씨의 #그래도_연애] 헤어지길 잘 했다 싶을 때



“서경아, 자니? 갑자기 전화해서 미안해. 주고 싶은 게 있어서...”

밤 12시 침대에 누우려던 나를 멈칫하게 한 건 1년 전 헤어진 남자친구의 전화였다.

전 남친은 내 서른 살 인생에서 손에 꼽는 애틋한 사람이었다. 2년 동안 그를 만나는 순간순간이 모두 나에게는 드라마 속 한 장면이었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들이 좋았다.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던 봄날, 그와 함께 흩날리던 벚꽃잎을 맞으며 첫 손을 잡았다. 여름에는 한강에 돗자리 펴놓고 그의 팔을 베고 누워 음악을 나눠 듣곤 했다. 샛노랗게 색이 변한 낙엽을 밟으며 정동 돌담길을 걸었고 얼음이 꽁꽁 언 날 차가워진 내 볼을 어루만졌던 손길도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그랬던 그가 헤어진 뒤 1년 만에 전화가 온 것이다.

서경씨: 응... 오랜만이야 그런데 갑자기 뭐야?

도깨비구남친: 아니, 나 이번 달 결혼해. 청첩장 주고 싶어서....

서경씨: 어? 뭐라고??



가슴 아프지만 아름다웠던 내 멜로 드라마가 한순간에 막장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단지 타이밍이 맞지 않아 헤어질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내 과거의 옛남친은 한순간에 ‘나쁜 자식’으로 전락했다.

굳이 굳이 청첩장을 전해주고 싶다는 옛 남친, 모바일 청첩장이 아닌 종이로 된 청첩장을 꼭 만나서 전해주고 싶다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나보다 먼저 결혼하게 되는 걸 자랑하고 싶었던 걸까.

나보다 훨씬 더 예쁘고 어린 여자를 만났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며칠 뒤 다른 지인을 통해 받게 된 청첩장을 보면서 생각했다.



너랑 헤어지길 잘 했다.

#너, 누구니


2년을 만났지만 그에 대해 모르는 게 많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그에게 반한 건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사랑하고 열심히 하는 모습 때문이었다. 대충 시간만 때우고 월급만 기다리는 다른 회사원들과 달랐다.

그의 승부욕 강하고 남들보다 더 잘해내려는 태도가 연애 그리고 결혼에까지 이어지리라고 생각 못 했다. 그와 헤어지고 봄-여름-가을-겨울 넘쳐나는 추억으로 힘들었다. 전화 한 통과 함께 그의 지나친 욕심으로 싸웠던 모든 일들이 기억나기 시작했다.

헤어진 뒤 결혼까지 경쟁하듯이 가는 그를 보며 헤어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별이 다행으로 다가오는 순간

헤어지는 데는 저마다 이유가 있다. 서로 사랑에 빠지는 시간이 달랐던 타이밍의 문제라면 다행일지 모른다. 미처 몰랐던 그의 모습, 내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그의 모습을 알게 됐을 때 이별을 결심하고 이별을 다행으로 받아들인다.

대학 때부터 직장에 들어가고 나서까지 잘 만나온 친구 커플은 최근 3년간의 연애에 종지부를 찍었다.

헤어진 이유를 묻자 친구는 말했다.

“대학 때부터 내가 방송 일 하고 싶었던 거 옆에서 다 봤고 내가 이 일 하려고 얼마나 어렵게 취업 준비했는지 걔는 알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하는 말이 내가 이 일을 하는 게 이해가 안 된대. 처음부터 이해가 안 됐었대.”



프리랜서로 리포터를 뛰고 있는 친구는 쉬는 날이 일정치 않다. 평범한 회사원인 남친이 주말에 쉴 때 친구는 놀이공원, 시골 장터 등 전국을 누볐다. 남친은 그런 내 친구를 이해하겠다면서 뒤에서는 술집과 클럽을 전전했다. 친구는 자신의 일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이마저도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남친은 끝내 클럽에서 만난 여자와 바람을 펴 친구와 헤어졌다. 친구는 담담했다. 자신의 일을 응원해주지 않는 남자친구를 이제라도 알게 돼서 다행이라고 털어놨다.

#헤어진 후에도 예의는 필요하다

오랫동안 서로 좋은 감정을 유지하고 연애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예의를 지켜야 한다고들 한다. 가까운 사이가 될수록 최소한의 예의는 더 중요해진다. 상대방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서로 합의가 가능한 수준의 애정을 주고 받아야 한다.

헤어진 후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첫눈에는 아니더라도 몇 차례 만남 끝에 본격적인 연애를 하고 추억을 함께 쌓았던 사람,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예의는 필요하다.

오늘은 집에서 혼맥(혼자 맥주)이나 하면서 누군가에게 ‘진상 구 여친’으로 기억되지는 않았나 이별의 순간을 떠올려 봐야겠다.



/이별예의지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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