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고종 26년(1889년) 3월22일(시헌력·時憲曆 기준) 기사의 일부. ‘돈의 주조는 나라의 큰 정사인데, 그것은 곧 재정의 근원을 넉넉히 하고 백성들이 쓰기에 편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규격대로 주조하지 못하고 간사하고 거짓된 협잡이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 데다가, 하물며 시장에서 물건 값이 날로 더욱 치달아 올라서 장차 어느 지경에 이를지 알 수 없습니다.…(중략)…관리들을 처벌하고 주전소(鑄錢所)를 없애버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고종은 의정부(議政府)가 건의한 대로 행하라고 윤허했다. 그러나 바로 실행되지는 않은 것 같다.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주전소에 대한 기록은 모두 49건. 고종실록에 그해 11월 말까지 주전소와 관련된 기록이 나오는 점에 미뤄볼 때 바로 없어지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이 주전소 혁파를 추진한 이유는 두 가지. 물가고와 부정부패 탓이다. 당시 주전소에서 발행하던 화폐는 당오전(當五錢). 동(銅)의 함량이 낮아 액면가치가 실질가치보다 2~3배나 높은 악화(惡貨)였다.
조선이 1883년 당오전을 발행한 이유는 화폐주조 차익을 노렸기 때문이다. 돈의 순도가 낮아지니 당연히 가격이 뛰었다. 1884년 24푼이던 쌀 한 되 가격이 1886년에는 246푼으로 10배 이상 올랐다. 돈 가치 하락은 고종이 친정에 나서기 전 흥선대원군 집권기부터 조선 경제의 발목을 잡았다. 대원군은 집권 3년째인 1866년부터 당백전(當百錢)을 1,600만냥이나 발행했다. 명목가치와 실제가치간 차이가 20배에 달하던 당백전의 화폐발행이익(seigniorage)은 왕실에 귀속돼 경복궁 중건에 쓰였으나 물가가 6배나 치솟는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다.
결국 1년여 만에 당백전 통용이 금지되자 이번에는 돈의 유통량이 모자라 물가가 오르는 전황(錢荒)이 일어났다. 조선은 급한 대로 청나라 엽전(淸錢) 2,400만냥을 들여오고, 청나라 상인들 은 상권을 잠식해 들어왔다. 대원군을 물리치고 득세한 민씨 일파도 화폐 문란 대열에 끼어들었다. 화폐발행 차익을 노리고 1883년 당오전(當五錢)을 발행했지만 민간인은 물론 일본인까지 위조대열에 끼어드는 통에 인플레이션은 더욱 심해졌다.
고종이 서양식 화폐를 주조하기 위해 설립한 전환국도 소용없었다. 수요가 발생할 때마다 임시방편으로 주전소를 세워 돈을 찍던 방식을 벗어나 상설 조폐기관인 전환국을 1883년 설립했으나 국왕 스스로 악화 발행 차익의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새로운 악화인 백동화(白銅貨)를 남발해 물가고를 더욱 부추겼다. 액면가치는 2전5푼이었지만 실제 가치는 5푼에 불과해 발행(1892)과 동시에 인플레이션이 일었다. 1904년 폐지될 때까지 백동화 발행액은 모두 1,674만3,522원 65전. 악화인 백동화가 전체 화폐발행액의 88%나 차지했으니 조선의 경제는 더욱 멍들었다.
당백전에서 당오전, 백동화로 이어지는 악화 남발 속에 ‘그레셤의 효과’와 외국 돈의 잠식이 동시에 일어났다. 조정은 주전소를 폐지하고 전환국을 세워 독일 기계를 수입하는 노력을 펼쳤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살림이 궁해지면 임시 주전소를 세워 돈을 만들어 썼다. 문란해진 화폐경제의 틈새를 뚫고 금속화폐와 일본 돈이 세력을 넓혀갔다.
대한제국으로 옷을 갈아입은 조선은 뒤늦게 신식 화폐와 금본위제도를 도입했지만 이마저 식민지 금융으로의 종속을 부채질했을 뿐이다. 연이은 악화 발행과 돈의 왜곡된 궤적은 굴욕의 역사를 낳았다. 조선이 겪은 ‘재정수요 증가-화폐 남발-경제 혼란’의 귀착점은 망국이었다. 위기는 경제에서 먼저 나타난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