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담하다. 구조를 기다리다 죽어가는 아이들에게 죄를 졌다. 무엇 하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시스템에 울화가 치민다. 무책임한 보도로 혼선을 부추기고 희생자 가족을 울린 언론집단의 한 사람으로서 낯을 들기 어렵다. 가슴을 짓누르는 응어리와 분노·자책 속에서 미래를 본다. 얼마 지나면 잊을 것이다. 단숨에 끓어올랐다 바로 식어버리는 양은 냄비처럼….’ 세월호 참사 직후 이 칼럼란에 쓴 글의 일부다.
‘어른들의 부주의와 잘못된 관행으로 어린 생명들을 떠나보낸 게 어디 한두 번인가. 그때마다 우리는 비겁하지만 편리한 도구인 망각에 기댔다.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 미래가 지나온 시간과 운동성의 축적과 연장이라면 뻔할 뻔 자다. 다시금 이런 참사가 되풀이돼서는 안 되겠기에 제안한다. 4월16일을 국가재난일로 기억하자.’
세월호 참사일을 왜 국가 재난과 같은 맥락으로 보는가. 세월호 참사는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적폐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자신들부터 살겠다고 도망친 선장, 선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모두가 공범이다. 낡은 선박의 엉터리 개조를 도와준 법과 정치, 사리사욕을 채운 오너 일가에 대한 권력의 비호, 사고 진상을 은폐하고 생색에만 열중한 정부, 속보 경쟁에 빠져 재난 보도의 원칙마저 도외시한 언론까지. 아이들이 이런 구조 속에서 죽었다.
세월호 참사 3년이 흐른 오늘날 우리를 생각한다. 얼마나 나아졌는가. 개인들은 열심히 살았는지 모르겠지만 나라는 더욱 나빠졌다. 가계부채와 청년 취업, 수출, 투자 모든 경제지표가 최악이다. 외교는 더 하다. 서울에는 지금 주한 미국대사와 일본대사가 없다. 중국은 노골적으로 한국에 대한 보복을 얘기한다. 주한 일본대사까지 철수시킨 아베 신조 정권의 한국에 대한 정책은 강경일변도다. 아무런 조건도 없이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를 수용해 안팎으로 시달리는 한국 정부에 미국은 한미 무역자유협정(FTA)을 파기한다며 벼르고 있다. 뿐이랴. 미국에 ‘일본은 동맹이고 한국은 파트너’란다.
사면초가에 왕따. 한국이 국제적으로 이렇게 궁지에 몰리기는 사상 초유다. 나라가 이 모양으로 전락한 게 누구 탓일까. 탄핵 당해 쫓겨난 전 대통령만의 책임은 아니다. 충직하게 간언할 수 있는 충신은 사라지고 보신에만 눈먼 간신만 득실대던 옛 시절에 견줄 수는 있어도 장관들에게만 책임 돌릴 일도 못 된다. 범죄자들이 쓰는 대포폰을 대통령에게 건네주고 현대판 요강인 전용 변기나 나르던 청와대 비서들보다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할 집단이 있다.
나라의 현실이 실망스럽다면 그 일차적 책임은 바로 우리 자신의 몫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말은 그냥 옛말일 뿐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골고루 맑고 정의롭지 않으면 만인이 만인과 투쟁하는 정글에 다름 아니다. 흔히 신문과 방송을 욕하지만 역으로 좋은 신문과 방송은 좋은 독자와 시청자라는 밭이 있어야 가능하다. 나와 내 가족만 잘살고 보자는 이기주의와 무책임, 보신의 습성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세월호 참사는 언제든 다시 터질 수 있다. 아주 작은 잘못과 무관심, 냉소가 모여 구조화하면 세월에 병들기 마련이다. 4월16일을 기억하자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국가재난일이든, 세월호 참사 추모일이든 이름을 어떻게 정하든지 하루만이라도 스스로 뒤돌아보며 각자 제 위치를 찾는다면 나라에 그만큼 좋은 일이 어디 있으랴. 병아리처럼 노란 꽃이 필 봄날이 다시 다가오고 있다.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