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한 사람이 왔다 갔다고 확 바뀌면 그게 정상이겠습니까. 세종문화회관이 가야 할 방향이 흐트러지지 않게끔 나는 중간 길목에 서 있는 사람일 뿐입니다. 훗날 세종의 역사를 돌아보면 ‘아, 그런 사람이 있었지’ 하는 거죠. 내 얘기 참 재미없죠?”
싱겁다. 그러나 허황한 말보다 훨씬 신뢰감을 준다. 많은 공공기관장이 임기 안에 무언가를 이루겠다며 숱한 약속의 말을 뱉는다. 하지만 27일 서울 광화문 집무실에서 만난 이승엽 세종문화회관 사장은 인터뷰 내내 그 어떤 거창한 약속도 하지 않았다. 취임 기자회견, 신년 기자회견 때도 마찬가지였다. ‘혁신’ ‘변화’ 같은 단어는 입에 올리지 않았다. 직원들에게도 이런 태도는 일관되다. 그의 역할은 ‘조직의 안정’이라고 일찌감치 정했던 탓이다.
“이벤트를 하러 온 게 아닙니다. 세종문화회관은 9개 예술단을 보유한, 세계적으로도 전무후무한 극장입니다. 사업 부문만 해도 제작(예술단)·대관·식음 등 다양합니다. 수학으로 치면 10차 방정식쯤 될 겁니다. 이걸 임기 내에 풀겠다고 작정하는 순간 직원들이 동요하고 조직이 망가집니다.”
이 사장은 예술의전당 공채 1기로 14년간 공연장 운영 전반을 맡아 현장 경험을 갖춘데다 한국예술경영학회 회장,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학과 예술경영전공교수 등을 지내며 이론까지 겸비한 국내 대표 예술경영 전문가다. 그런 그가 지난 2015년 한예종 교수직을 그만두고 세종문화회관 사장으로 온다는 소식이 알려졌을 때 안팎에서 이 사장이 세종의 구원투수로 제 역할을 할지 기대가 컸다. 과연 그는 구원투수였을까. 이 질문에 이 사장은 “야구로 치면 ‘롱릴리프’”라고 했다. 구원투수는 맞지만 최종적인 답을 찾을 마무리투수는 아닌 셈이다.
“선발투수가 일찍 마운드에서 내려왔을 때 긴 이닝을 책임지는 대투 정도랄까요. 승패를 챙길 수도 없고 잘 던져봐야 홀드(중간계투 투수가 리드를 지켜냈을 때를 이르는 말)죠. 홀드를 성과로 쳐주지 않잖아요.”
실제로 세종문화회관의 적자 문제는 고질적이다. 현재 극장에 필요한 출연금은 심의를 거쳐 받는데다 임대사업이나 공연 티켓 부문 수입은 전체의 35% 수준으로 단기간에 대폭 늘리기 쉽지 않은데 전체 비용의 70%는 인건비 등 고정비여서 재정 긴축도 쉽지 않다. 재정 자립 자체가 불가능한 구조라는 얘기다. 그렇다고 소속 단체가 많은 상황을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도 없다는 게 이 사장의 생각이다.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도 부도가 나는 판에 세종문화회관의 경영 모델은 오히려 예술의 가치를 지키면서 극장의 공공성을 지킬 수 있는 ‘한국형 극장 경영 모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사장은 “우리가 하는 예술사업 대부분은 할수록 적자가 쌓이는 구조”라며 “결국 공공아트센터로서 공공성을 훼손하지 않는 대전제를 지키면서 재원 조성 방안을 찾는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예술단만 9개, 대관 등 사업도 복잡…임기 내 풀겠다는 순간 조직 망가져
티켓수입 비중 작고 고정비는 많아 시즌제·기획 공연으로 경영난 극복
제작 역량 갖춘 ‘한국형 극장’ 목표…수준높은 콘텐츠로 창작예술 강화
구조적인 경영난에 대해 이 사장의 해법은 단순하지만 명확하다. ‘무조건 공연을 많이 하는 것’이다. 부임 전 30%(대극장 기준)에도 미치지 못했던 자체 기획공연 비중을 지난해 39%까지 끌어올렸다. 또 다양한 작품 개발 방식과 창작 프로세스를 마련하고 있다.
이 사장 취임 후 최초로 도입한 시즌제도 안착하고 있다. 두 번째 시즌을 맞은 올해 총 57개, 430회 공연을 기획했고 대형 클래식 공연부터 창작 초연작, 파격적인 컬래버레이션 작품까지 다양한 작품을 확보하며 순항 중이다. 시즌제는 양질의 콘텐츠를 미리 확보하는 한편 예술단도 안정적으로 작품을 준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지난해 11월에는 9개 예술단이 함께 활로를 모색하는 ‘예술단발전위원회’도 조직했다. 이 사장은 “예술단은 세종문화회관 소속으로서, 분야와 장르를 대표하는 단체로서 두 가지 정체성이 있다”며 “각 예술단에 간섭하지 않는 원칙을 지키되 서로 대화하고 정보를 교류하도록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사람이 나이 들면서 역할을 재정립하듯 예술단 역시 시대에 맞게 새로운 비전과 원칙을 가져야 합니다. 예술단발전위원회는 새 시대에 맞는 비전을 다 같이 머리를 맞대고 세워보자는 겁니다. 단기 과제부터 중장기 과제까지 리스트를 만들고 오는 4~5월 중에 하나의 안을 만들어서 공유할 겁니다.”
극장 경영 전문가답게 그에게는 장기 비전이 있다. ‘한국 문화예술의 중심지’이자 전 세계에 전무후무한 프로듀싱 시어터(제작 역량을 갖춘 극장)로서 한국형 극장의 성공 모델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1978년 개관한 이래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예술단지로서 세종문화회관이 갖는 상징성이 작지 않은 만큼 고품격 예술을 제공하는 극장으로서 브랜드 정체성을 키우겠다는 것이다. 목표 시기는 2~3년 뒤인 2019년께, 임기 이후다. 역시나 현실적인 목표가 아니면 세우지 않는 그답다.
“취임 초기 ‘프로듀서 세종’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습니다. 세종문화회관 이름에 걸맞은 수준의 콘텐츠를 선보이겠다는 것이었고 예술단을 활성화해 창작예술 기반을 강화하겠다는 것이었죠. 단기간에 눈에 띄는 성과를 내지 못하더라도 두 가지 다 목표대로 가고 있습니다.”
내년 초에는 블랙박스 극장이 새롭게 들어서고 기존 공연장 리모델링과 클래식 전용 콘서트홀 건립도 추진한다. 서울시가 세종문화회관 일대를 예술복합단지로 조성하는 안을 발표하고 이를 위한 조사비용 5억원도 예산으로 책정했다. 계획대로 예술 블록이 조성되면 올해 말 완성되는 ‘종각역~광화문역 지하 연결 보행로’ 건설사업과 연계해 세종문화회관 내 지상·지하 공연장을 잇는 복합문화공간이 만들어진다.
“세종문화회관은 탁월한 위치와 전통에도 지금의 인프라와 운영 방식으로는 더 이상 랜드마크 지위를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리모델링을 마치고 콘서트홀, 블랙박스 극장까지 갖춘 복합문화지구가 되면 시민들에게 더 좋은 시설로 다가갈 것이고 문화적 브랜드 가치도 획기적으로 높아질 겁니다.”
/서은영기자 supia927@sedaily.com 사진=송은석기자
△1961년 경남 사천 △서울대 불어불문학과 학사, 석사 △프랑스 부르고뉴대 문화정책과 예술행정 고급전문학위(DESS) 취득 △예술의전당 공연운영부장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예술경영학과 교수 △2010-2011 하이서울페스티벌 총기획 △제7대 한국예술경영학회 회장 △2015년~ 세종문화회관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