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박 발주까지 '숟가락 얹는' 정치권

현대상선 4년만의 발주에
"우리 조선소에 일감 주라"
표심 의식한 정치권 간섭
"구조조정 바쁜데..." 빈축



현대상선이 해운산업 경쟁력 강화방안의 일환으로 정부에서 조성한 2조6,000억원 규모의 ‘선박 신조 프로그램’을 활용해 초대형유조선(VLCC) 5척을 발주했다. 현대상선이 선박을 발주한 것은 지난 2013년 벌크선 발주 이후 4년여 만이다.

모처럼 나온 국내 원양선사의 대규모 발주로 조선업계가 반색하는 가운데 조선사 간 수주경쟁에 정치권이 “우리 지역 조선소에 일감을 주라”며 현대상선과 이를 관리하는 금융당국을 압박하고 있어 무리한 요구라는 지적이 일고 있다. 조선·해운산업 경쟁력 강화 차원에서 세금을 지원해 이뤄지는 신조 선박 발주에 지역 표심을 의식한 정치권이 끼어들면서 기업 구조조정 활동을 가로막고 있다는 비판이다.

28일 해운업계에 따르면 현대상선은 최근 초대형유조선 5척(옵션 포함 10척) 발주공고를 내고 조선사들로부터 입찰제안서를 받았다. 입찰에는 삼성중공업과 현대중공업·대우조선해양 등 ‘빅3’ 업체가 참여했다. 초대형유조선 신조 선가는 1척당 8,200만~8,300만달러로 5척을 모두 수주할 경우 4억달러 이상의 수주실적을 거두게 된다. 수주 가뭄으로 일감이 뚝뚝 떨어진 조선소 입장에서는 ‘단비’와도 같다. 현대상선 관계자는 “용선 중인 유조선 4척 가운데 2척에 대한 용선 계약이 올해 만료된다”면서 “반선(返船) 시기를 고려해 발주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입찰 참여 조선소들이 제시한 가격요소 등을 분석해 내려야 할 현대상선의 의사결정 과정에 정치권이 ‘이래라 저래라’하며 끼어들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다. 군산조선소는 오는 6월이면 일감(수주잔량)이 없어져 잠정 폐쇄될 예정이다. 이미 군산조선소에서 근무하는 인력을 본사가 있는 울산조선소로 전환 배치하는 작업이 내부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 와중에 군산조선소가 있는 전북 지역에 지역구를 둔 일부 국회의원들은 최근 공동성명을 내고 “군산조선소 존치를 위해 최소 선박 10척이 발주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라”며 현대상선과 이를 관리하는 금융당국을 압박하고 나섰다. 현대상선 고위관계자는 “아직 회사에 직접적인 압박이 내려온 것은 없다”면서도 정치권의 이 같은 움직임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인정했다.

업계 관계자는 “해운사 입장에서 신조 선박 발주는 최소 15년 이상의 미래를 내다보고 결정해야 할 중대 사안”이라며 “이 과정에 정치권이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것은 선사와 조선사 모두의 경쟁력을 깎아 먹는 행태”라고 비판했다.

현대상선의 자금 사정과 선박 투입 예정 노선, 인도 시점 등 경영 사안을 종합적으로 따져 선박 발주를 맡겨야 하는데 정치권이 끼어들어 조선소 선정의 기본 전제가 훼손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정치권의 개입이 불편하기는 금융당국도 마찬가지다. 정치인들이 ‘대놓고’ 특정 조선소에 일감을 맡기라고 압박하면 조선·해운업계 구조조정의 큰 줄기가 자칫 뒤틀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조선과 해운을 함께 묶어서 봐야 하는데 표심을 의식한 정치권의 ‘우리 지역 조선소를 살려내라’는 식의 주장 탓에 조선·해운업 경쟁력 강화라는 큰 과제를 해결하는 데 동력을 잃을 수 있다.

일각에서는 ‘정부가 자금을 지원한 신조 선박 발주를 통해 고사 위기에 처한 조선업의 숨통을 틔운다’는 정부의 지원 취지를 고려하면 현 상황에서 자력 생존이 가능한 현대중공업보다 대우조선에 발주를 맡기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대우조선은 가장 많은 수주 잔량을 보유하고 있지만 당장 다음달 갚아야 할 만기 도래 회사채 4,400억원을 막지 못해 정부의 추가 자금 지원을 받는 상황이다.

이와 관련해 채권단의 한 관계자는 “문제의 소지가 없도록 공정한 심사를 통해 조선소를 선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재영기자 jyha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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