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_창업을_응원해] 전기 혜택 못 누린 인도 소년 만난 그녀, 흐르는 물에서 전기를 만들다

박혜린 이노마드 대표
세상에 없던 휴대형 발전기로 올 매출 10억..킥스타터에서 뜨거운 호응
전기 없이 사는 인도 소년과의 만남이 이스트림 탄생 계기
흐르는 물에 담그면 아이폰 2개 충전 분량의 전력 만들어져
배터리 일체형 발전기는 이스트림이 세계 최초..내년 100억 매출 가능

박혜린 이노마드 대표
아버지의 공장은 그의 놀이터였다. 주말이면 아버지를 따라 공장에 가서 신제품 개발에 대한 아버지의 생각을 듣거나 금형으로 만드는 제품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인도 여행은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처음에는 한 달 여행을 목표로 갔으나 도시에서 시골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면서 인도를 새롭게 알게 됐다. 그에게 가장 큰 충격은 산간 지역에 전기가 안 들어온다는 사실이었다. 전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전기 혜택을 받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엔 ‘언제 어디서나 만들어 쓸 수 있는 전기’가 그에게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았다. 조류발전 플랜트를 생산하는 중소기업에 들어가며 신재생 에너지 세상에 한 발 더 내딛게 됐다. 흐르는 물로 전기를 만드는 조류 발전에 눈을 떴고, 언제 어디서나 만들어 쓸 수 있는 휴대형 발전기를 목표로 창업에 나섰다. 이노마드(Enomad)의 시작이다. 이노마드의 휴대용 수력발전기 ‘이스트림(Estream)’은 킥스터터에서 1억8,000만원 어치 선주문을 받으며 히트 상품이 됐다. 전기가 없는 인도 산간 지역에서 느낀 안타까움을 사업으로 연결시킨 박혜린(32·사진) 이노마드 대표의 이야기다.

◇아버지의 괴짜 DNA를 물려 받다

어린 시절 박 대표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자주 바닷가로 나들이를 나섰다. 잉어를 태몽으로 꾼 어머니는 박 대표를 ‘큰아들’이라 부르며 짧은 커트머리의 개구쟁이로 키웠다. /사진제공=박혜린 대표
건축토목과 출신의 아버지는 젊은 시절 현대중공업 조선플랜트 개발팀에서 일했다. 박 대표를 가졌을 때 잉어가 품 안에 안기는 태몽을 꿨던 어머니는 그를 부를 때 ‘큰 아들’이란 애칭으로 부르곤 했다.

1남2녀 중 장녀인 박 대표가 7살이 됐을 때 아버지는 회사를 그만두고 부산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 초창기 건축자재를 주로 생산했던 아버지는 1999년 씨랜드 화재 참사를 계기로 난연성 단열재를 제조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주물공장에서 쇠로 제품을 생산하고 나면 주물용 모래(주물사)가 버려지는데, 주물사를 구매해 특수 코팅하면 부식을 방지하는 기능이 생기거든요. 아버지가 이 기술을 개발해 난연성 단열재를 생산하신 거죠. 아버지가 워낙 개발자 성향이 강해서 항상 책을 들여다보거나 해외 저널을 보면서 연구하고 신기술을 적용하셨어요.”

교육열이 높았던 부모님은 3남매 모두 부산 연산동의 사립유치원과 사립초등학교에 보냈다. 아버지로서는 사업에 본격 뛰어들었을 때라 자금 여유가 없었을 법도 하지만 자녀만큼은 남 부럽지 않게 키우고자 했다. 사립초등학교 등록금이 적지 않은 편이라 의사나 교수 집안 출신 친구가 대부분이었다.

정확하게 아버지가 뭘 하는 사람인지 몰랐던 박 대표는 가정환경조사를 할 때면 부모의 직업란에 ‘과학자’라고 쓰곤 했다. 항상 뭔가를 연구하고 만들던 아버지의 모습이 그가 상상하는 과학자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과학자 기질에다 괴짜 기질을 가장 많이 물려 받은 박 대표는 초등학교 때 동생들과 집에서 실험을 하다가 사고를 친 기억이 많이 난다고 한다.

아버지의 호기심을 물려 받은 박혜린 삼남매는 어른이 없는 날이면 집에서 다양한 실험을 하곤 했다. 여동생, 남동생과 보낸 어린 시절이 박 대표에게는 유년의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사진제공=박혜린 대표
“아버지가 사업을 시작한 후엔 엄마도 함께 공장에 나가 일을 거드셨어요. 그래서 저희 삼남매만 집에 있는 일이 많았는데, 텔레비전에서 소방관이 소화기를 사용하는 것을 보고 직접 소화기를 분해하기도 했죠. 거실이 분말 소화기 때문에 난리가 났는데, 나름대로는 치우려고 애쓴 흔적이 있는데 부모님이 야단 한 마디 안 치셨죠. 이런저런 실험 비슷한 걸 하다가 다치기도 했는데, 오히려 그런 경험이 신나고 특별했던 것 같아요.”

중학교에 입학한 후엔 본격적인 사춘기를 맞았다. 원래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부쩍 말수가 적어지고 친구도 거의 안 사귀고 책에만 빠져 들었다. 현실에 대한 책보다는 뭔가 다른 세상을 상상할 수 있는 책에 손이 갔다. 파울루 코엘료나 존 그리샴의 책은 빼놓지 않고 읽었다. 사춘기 소녀에게 책은 유일한 휴식처이자 도피처였다. 그는 책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거나 자신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기를 바라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현실을 잊을 수 있다면,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책은 그에게 유의미한 대상이었다.

책에만 빠져 있다가 답답함이 버거울 때는 운동화 끈을 조여 매고 집 근처 운동장으로 향했다. 어릴 적부터 산이나 들로 데리고 다녔던 아버지 덕에 체력 하나는 남달랐던 그는 짜증이 나거나 화가 날 때면 숨이 찰 때까지 운동장을 달리고 또 달렸다. 그렇게 뛰고 나면 속이 뻥 뚫렸다. 아이돌 가수를 흠모하는 또래 친구와는 달리 헤비 메탈이나 락 음악을 들으며 외로움을 달랬다. 한 방을 쓰던 여동생은 그림을 그리며 스트레스를 풀었고, 박 대표는 음악을 들으며 사춘기 소녀의 뜨거운 열기를 진정시키곤 했다. 조용한 성격에 그림이 유일한 취미였던 여동생은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들어가 지금은 작가 활동을 하고 있다.

그렇듯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있던 그가 가끔씩 마음의 문을 열고 이야기를 나누는 상대는 아버지였다. 사업하느라 휴일도 없이 바쁜 아버지였지만, 주말에 첫째 딸을 데리고 공장에 가서 제품 개발 과정을 보여주고 의견을 구하기도 했고, 한가한 날이면 함께 낙동강변을 걸으며 세상에 대해, 꿈에 대해, 삶에 대해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다.

학교 생활을 하면서 겪는 고충을 털어 놓는 딸에게 아버지는 조용히 이런 말을 했다. “세상의 모든 게 스승이다. 좋은 걸 배우는 것도 스승이고, 안 좋은 것을 배우는 것도 스승이니 다 좋게 생각하자.”

아버지의 당부는 지금까지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 새겨져 있다.

박 대표는 특별한 가족 회의에 대해서 얘기하면서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아버지는 회사의 중요한 의사 결정을 해야 할 때는 반드시 삼남매를 모아 놓고 의견을 물었다. 현재 처한 상황은 어떻게 문제점은 무엇인지, 이를 위해 어떤 대안을 마련하고 있는지 등등을 자세하게 설명한 다음 가족들의 의견을 구했다. 결정이 필요할 때는 다수결로 정하기도 했다. 보통 가정에서는 보기 힘든 광경이었지만 이러한 가정 환경은 박 대표가 창업 이후 경영을 하는 데 중요한 자양분이 됐다.

“노을이 붉게 물든 어느 저녁에 낙동강변을 걸으면서 아버지가 ‘하늘을 나는 자동차를 만들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던 기억이 생생해요. 아버지가 자동차를 만드는 일을 하신 것도 아니었는데, 순수하게 자신의 꿈을 갖고 자식에게 말할 수 있는 아버지가 멋져 보였어요. 주말에는 공장에 가서 온갖 기계 부품을 만져보기도 했고, 아버지가 진행하는 제품의 개발에 대해 제 의견도 말씀 드리곤 했어요.”

박 대표에게 고등학교 생활 중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는 기타동아리 활동이었다. 남녀 공학이라 여럿이 어울려 음악을 듣고 기타를 치곤 했는데, 이 곳에서 자신의 생각을 이해하고 함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을 인생의 행운으로 여기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 경찰이 되고 싶기도 하고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기도 했지만 그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꿈을 찾지는 못한 채 수능 시험일이 다가왔다. 수능 전날 잔뜩 긴장한 딸에게 아버지는 와인 한 잔을 주면서 푹 쉬고 실력만큼 시험을 치라고 말했다. 수능 점수가 나와 진로를 고민할 때는 경영을 해보면 어떠냐고 제안했다. 경영학이 여러 학문과 융합할 수 있는 열린 학문인데다 실용적인 만큼 대학 진학 후에도 다양한 진로를 탐색할 수 있을 거란 판단에서였다.

◇인도에서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만나다

인도 여행길을 떠났던 박혜린은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들이 선진국 아이들이 누리는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못내 안타까웠다. /사진제공=박혜린 대표
부산대 경영학과 04학번으로 캠퍼스를 밟았다. 대학 1학년 생활은 또래 신입생처럼 평범했다. 과 생활 열심히 했고, 연애도 했다. 그러다 실연도 했다. 남자친구와 헤어진 후에는 뭔가 돌파구를 찾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인도 여행이었다.

“처음에는 유럽 배낭 여행을 생각했는데 당시가 브릭스(BRICs: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 등의 신흥경제 4국)가 뜰 때라 이들 국가 중 한 곳을 가고 싶었어요. 인도가 가깝기도 하고 신비로운 나라인 것 같아서 선택했어요. 아버지가 인도로 가야 하는 이유를 브리핑하라고 해서 파워포인트로 작성해서 발표하기도 했었죠. 정말 유별난 아버지이긴 한 것 같아요.”

그런데 인도 여행을 보내주는 아버지의 전제 조건이 하나 더 있었다. 우리나라 먼저 여행하고 인도로 떠나는 것이었다. 13인치 짜리 바퀴가 달린 접이식 자전거를 끌고 한반도 종주를 계획했다. 혼자서는 심심할 것 같아 서울에 사는 고등학교 동창과 함께 여행을 다니기로 계획을 세웠다. 서울에서 출발하는 강릉행 버스를 탔고, 중간 휴게소에서 내려 자전거를 타고 7번 국도를 따라 내려갔다. 가다가 배 고프면 식당에 가서 밥 사먹고, 여행 경비를 아껴보겠다고 민박집에 1만원을 내고 마루 한 구석에서 자기도 하고, 교회에 부탁해 잠자리를 구하기도 했다. 이마저도 여의치 않을 때는 공중 화장실에 종이 박스를 깔고 잠을 청하기도 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20살이 넘은 여대생 둘이 위험천만한 행동을 했던 셈이지만, 당시엔 젊기에 누릴 수 있는 특별한 모험이라고 생각했다.

“제 자신의 한계가 정의되지 않았던 시기였기에 ‘이걸 하면 되지 뭘 못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가지는 데는 아버지의 교육 방식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아요. 마치 육상 선수 옆에서 코치가 보조를 맞춰 같이 뛰는 것처럼 아버지도 제 옆에서 함께 뛰면서 격려하고 야단치면서 나아갈 수 있게 해 주셨던 거죠.”

2006년 4월 인도로 떠났다. 처음에는 한 달을 계획하고 왕복 비행기 티켓과 여행 경비로 80만원 정도만 갖고 갔다. 인도 델리에 가서는 한국에서 해 왔던 ‘묻지마 여행’ 스타일로 여행을 다녔다. 버스 터미널에 가서 가장 먼저 출발하는 버스를 잡아 타고 가다가 내리고 싶은 곳에 내리는 방식이었다. 처음에는 간단한 영어로도 충분히 의사 소통이 됐다. 하지만 인도를 좀더 깊이 알고 싶어서 인도의 속살로 들어가려고 할 때마다 언어가 큰 제약이 됐다. 특히 여행사 직원에게 사기를 당할 뻔한 일을 겪은 후엔 제대로 힌두어를 배워야 한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델리를 떠나 첸나이라고 하는 남부의 대도시로 이동했다. 부산과 비슷한 분위기에다 상대적으로 물가가 저렴했기 때문이다. 무작정 현지인들이 머무는 일종의 게스트하우스인 도미토리(dormitory)에 머물렀다. 한 달에 우리 돈으로 3만원만 내면 숙식이 해결됐다.

박혜린 대표가 인도 여행 중에 저녁 식사를 준비하면서 현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제공=박혜린 대표
“인도의 시골에서 일자리를 찾아 대도시로 온 현지인들이 주로 머무는 곳이었죠. 도미토리 역사상 외국인이 머문 게 처음이라고 하더군요. 그곳이 타밀라두 지역이라 타밀어를 배우고, 인도 사람처럼 손으로 밥을 먹으면서 지냈지요.”

처음에는 새로운 세상을 만난 즐거움이 컸다. 하지만 이내 곤란한 지경에 처하게 됐다. 그가 여행 경비를 현금으로 갖고 있는 걸 아는 인도 친구들이 저녁을 대접하겠다며 그를 데리고 외출한 것. 그 동안 남을 의심해본 적이 없었던 그는 친구들을 따라 나섰고 저녁 식사를 하고 나서 들어오니 여행 가방 속에 넣어 뒀던 여행비가 사라지고 만 것이다.

망연자실했다. 한국에 전화를 걸 돈조차 남아 있지 않은 상태라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지나고 나니 넋 놓고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한국 사람을 만나 도움을 청해야 했다. 첸나이 외곽 지역에 현대자동차 2공장을 짓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곳에 가면 도움을 청할 한국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작정 공장 방향으로 향했다. 돈이 없으니 걷는 수 밖에 없었다. 6시간 동안 걷고 또 걸었다.

며칠간 제대로 먹지도 못한 터라 배도 고프고 몸도 힘들었다. 그의 눈에 한글로 쓰여진 식당 간판이 들어왔다. 한식당이었다.

간절한 마음으로 식당에 들어갔다. 점심 시간이 지나서인지 식당 안은 한적했다. 중년의 남성 한 명이 앉아서 식사를 주문하고 있었다. 인자한 인상에 마음이 놓였다. 그에게 여권을 보여주며 여행을 온 한국 학생인데 강도를 당해서 돈이 한 푼도 없다고, 어떤 일이라도 맡겨만 주시면 하겠다고 진심을 다해 사정을 설명했다.

조용히 듣고 있던 남성은 우선 밥이나 먹자고 했다. 식사를 마치자 어떤 일을 할 수 있냐고 물었다. 영어 통역이나 번역, 문서 작업 등을 할 수 있다고 답했다.

현대차 협력사 대표였던 그는 자신의 아파트에 방이 2개 있는데 우선 며칠 와서 일을 도와주며 있겠느냐고 제안했다. 박 대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러겠다고 답했다. 아저씨가 출근하면서 업무 지시를 하면 낮 시간 동안 일을 하면서 보냈다. 물론 집에도 연락해 상황을 설명하고 부모님을 안심시켰다. 아저씨는 나흘이 지나자 80만원이 든 봉투를 건넸다. 아르바이트를 하러 온 게 아니라 여행을 하러 왔으니 이 돈으로 여행하고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당부했다. 가슴 깊이 감사한 마음을 안고 다시 길을 떠났다.

버스 터미널에서 아무 버스나 잡아 타고 여행을 떠났다. 그러던 중 인도 남부 코다이커널이라는 산악 지역으로 여행을 가게 됐다.


“2박 3일 코스로 트래킹을 계획하고 코다이커널 지역의 한 가정집에 머물렀어요. 홀어머니가 7살 짜리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전기가 안 들어오는 집이었어요. 인도에서 4개월 정도 지냈는데 전기가 아예 안 들어오는 곳은 처음 경험했던 거죠. 양초를 켜놓고 밥을 먹는데 디지털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니 아이가 너무 신기해 하는 거에요. 갖고 놀아도 된다고 하니 동네 친구들을 불러놓고 사진을 찍고 포즈도 취하고 엄마도 찍으면서 너무 좋아했어요. 아이가 자기도 좋아하는 것들을 카메라로 기록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나보다는 아이가 카메라를 가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순간 그 아이가 카메라를 갖게 되더라도 배터리를 충전할 수 없겠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박 대표는 그날 처음으로 자신이 아무 생각 없이 누려왔던 문명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고 말한다. 살면서 뭔가를 소비하고 사용하고 활용하는 일련의 과정을 당연하게 여겨졌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 당연하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밤새 뒤척였다고 한다.

“카메라 배터리를 충전하는 데 필요한 전기는 정말 적은 양인데 그것마저 하지 못한다는 게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곳에서도 필요한 만큼이라도 전기를 충전해 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죠. 그게 흐르는 물에서 전기를 만들겠다는 발상에서 시작한 ‘이스트림’을 만들게 된 절대적인 이유인 셈이죠.”

◇신재생 에너지에 관심을 갖다

박혜린 대표는 캐나다 유학을 다녀온 후 조류플랜트 제조기업에 입사했다. 신재생 에너지에 대한 관심은 이후 개인화된 에너지 생산으로 옮아갔다.
가슴 속 깊이 무거운 과제를 안고 그 해 12월 집으로 돌아왔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전력 시스템이나 에너지 접근성에 대해 문제 의식을 갖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전력공급 시스템은 화석 연료를 기반으로 하는 만큼 규모의 경제를 실현해야 운영이 가능하다는 게 한계였다. 전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전기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는 수력이나 태양광 등 신재생 에너지에 관심을 갖게 됐다.

사회 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경영학석사(MBA)를 취득하는 게 좋겠다는 판단을 하고 캐나다 빅토리아대학 MBA 과정에 입학했다. 현지에서 창업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박 대표는 새로운 관점에 눈을 뜨게 됐다. 타인의 필요를 중심에 둔 열린 사고 방식이었다.

“캐나다에서 유학 생활을 하면서 가장 놀란 건 내가 가진 것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고려와 배려가 일상화됐다는 점이었어요. 창업에 대한 접근 방식도 내가 이런 것을 만들어 팔겠다는 개념이 아니라 과연 내가 팔고자 하는 아이템이 시장에서 필요로 하는 것인가를 먼저 들여다 보는 거죠. 사소한 차이 같지만 매우 중요한 차이거든요. 수요를 기반으로 지속 가능한 비즈니스인가라는 접근법에서 모든 것을 보니까요. 그러한 시각은 제가 창업을 준비할 때 가장 많이 비중을 뒀던 부분이기도 하구요.”

MBA 과정을 수료한 후 2009년 말 돌아와 중소기업에 취직했다. 유학을 떠나기 전만 해도 학위를 취득해서 정책 관련 일을 하겠다고 계획했지만 변화를 주도하고 있는 실질적인 현장 경험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더 커졌다. 그의 첫 직장은 조류발전 플랜트업체인 정맥산업개발이었다. 연구팀으로 들어가 신재생 에너지의 국내외 동향과 실질적인 적용 방식 등을 두루 살필 수 있었다. 처음에는 조류를 이용해 전기를 만든다는 게 신기하고 멋지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고민에 빠지게 됐다.

“청정 에너지를 만드는 일이지만 정부나 기업이 주도하다 보니까 경제성이 가장 중요한 KPI(핵심성과지표)였어요. 당연히 큰 발전소를 만들어 더 싸게 (전기를) 공급하는 게 중요했지요. 청정 에너지를 사용하지만 접근 방식은 기존의 방식(송전탑)과 비슷했던 거죠. 결과적으로 해당 영역 밖에 있는 사람들은 그 혜택을 못 보는 겁니다.”

그는 도서 지역의 전기 발전 방식을 예로 들었다.

“우리나라에는 전기를 공급 받지 못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전기가 들어가지 않는 도서 지역의 경우 디젤 발전기를 돌려서 전기를 만들고 있어요. 송전탑을 통해 전기를 공급 받는 경우 발전 단가가 1Kw당 80원이라면 디젤 발전기는 6,000원(디젤 수송비 및 유지 관리비 포함)에 달해요. 그만큼 전기 혜택이 편차가 큰 셈이죠. 전세계적으로는 20억 인구가 전기 인프라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집니다. 자연에서 에너지를 만드는 건 좋지만 접근 방식은 달라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캐나다에서 제가 느낀 것처럼 공급자 중심이 아니라 수요자 중심의 접근법이어야 한다는 판단이었죠. 개인 단위로 필요할 때 만들어 사용할 수 있는 개인화된 형태의 발전 장비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때부터 관련 서적과 정보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당시 스마트그리드나 마이크로그리드처럼 마을 자체에서 전기를 만들고 사용하는 형태의 발전 개념이 새롭게 주목 받기 시작했다. 개인화된 제품이 나오면 시장성이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게다가 개인이 전기를 소비하는 형태가 USB 포트 기반이라는 것도 매력적인 요소였다. 전기 충전 방식이 일상화, 개인화되는 만큼 시장 수요만 잘 맞으면 충분히 의미 있는 도전이 될 것만 같았다.

◇에너지 유목민을 꿈꾸다

아이디어는 있지만 이를 구체적인 상품으로 개발할 파트너가 필요했다. 같은 연구팀에서 발전 시스템 개발을 총괄했던 동료에게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얘기를 나눴고, 정말 멋진 일이 될 거라며 동참을 호소했다. 1년에 걸친 설득 끝에 결국 창업을 함께 하기로 뜻을 모았다.

노기환 이노마드 CTO가 이스트림 개발에 몰두해 있다. /사진제공=이노마드
바로 이노마드를 공동 창업한 노기환 최고기술경영자(CTO)였다. 2013년 5월 사표를 내고 본격적으로 창업 전선에 뛰어 들었다.

회사명은 ‘이노마드(Enomad)’라고 지었다. ‘에너지(Energy)’와 ‘유목민(Nomad)’의 합성어로, 전기 인프라가 없는 곳을 유랑하는 사람들이 에너지를 자유롭게 만들어 쓸 수 있도록 한다는 뜻을 담았다. 그 해 9월 한국창의과학재단에서 주최하는 적정기술기반창업경진대회에 출전해 대상을 수상했다. 대상 수상업체에게는 사무실이 무료로 제공됐다. 사무실에서 먹고 자면서 개발에 매진했다.

2014년 3월 박 대표는 이노마드의 역사에 의미 있는 인연을 만나게 된다. 바로 임팩트 투자사 ‘D3쥬빌리’의 이덕준 대표를 만난 것이다. 임팩트 투자는 빈곤과 온난화 같이 글로벌 사회가 직면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투자를 말한다.

“이 대표가 보통 미국이나 유럽 등 선진국에서 임팩트 투자를 진행했는데, 한국에서도 기술 기반 임팩트 투자를 한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서 저희 사업을 설명했어요. 기존에 사업 설명을 하면 제조기반에다 에너지 발전 사업인데 여자가 할 수 있겠느냐는 의심을 갖는 분도 있었고, 굳이 왜 물로 만드느냐 다른 아이템으로 전환할 생각은 없느냐고 물어보는 분도 있었는데 이 대표는 처음으로 저희 사업을 지지해 주신 분이에요. 그날 첫 미팅을 마친 후 곧바로 투자를 결정해 주셨죠. 만약 그 때 이 대표를 못 만났으면 우리가 이 일을 계속 하고 있을지 의문이에요. 정말 투자가 절실히 필요할 때 개발비를 지원해주신 거니까요. 제 자취방 보증금 빼고 노기환 이사도 자기 돈 쏟아 부으면서 개발했는데, 투자를 받고 난 후 저희도 월급이란 걸 받을 수 있게 됐죠. 라면 먹다가 김밥도 먹게 됐구요.”(웃음)

2014년 8월부터 석달간 청계천에서 스마트 충전소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시민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었으며 주요 내외신에 소개되며 미국 시장에 노크할 수 있는 기회도 얻었다. /사진제공=이노마드
하지만 수력 발전을 개인화된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콘셉트 자체도 구체적으로 정해지지 않았던 만큼 고민도 깊었다. 그래서 공개적으로 사람들의 의견을 구해보기로 했다. 그게 바로 2014년 8월부터 석달간 진행한 ‘청계천 스마트 충전소 프로젝트’였다.

터빈을 꾸준히 돌리기 위해서는 흐르는 물이 필요하고,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어야 했다. 청계천이 제격이었다. 하지만 서울시 소유라 시 당국으로부터 ‘공유수면 점사용 허가’를 받아야 했다. 무작정 하천관리과를 찾아갔다. 처음에 담당 주무관은 난색을 표했다. 청계천 자체가 이용하는 사람이 많아 혹여라도 사고가 발생하면 문제가 크다는 게 그 이유였다. 이틀에 한 번 꼴로 찾아가 설득했다. 처음에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던 주무관은 해외에서도 하천을 이용해 비슷한 이벤트를 한다는 설명이나 공익적 성격 등을 들으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고정 설치는 안 된다는 전제 조건이 달긴 했지만 결국 허가를 받아 냈다. 매일 오후 3시 설치하고 11시 철거하기로 했다.

8월 26일이 이벤트 첫 날이었다. 새벽까지 장비를 점검하느라 1분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 5개 USB 포트를 충전할 수 있는 부스를 설치한 후 본격적인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기대하지도 못한 손님들도 찾아왔다. 서울시가 청년기업과 손잡고 만들었다고 홍보하면서 수 십 곳 언론사에서 취재를 온 것이다. 예상치 못한 수확이었다. 국내 매체는 스마트폰을 충전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 보도를 한 반면 CNN 등 외신에서는 스마트시티나 신재생 에너지 관점에서 보도했다.

◇미국 캠핑장에서 시장을 만나다

CNN 보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보스턴 매스챌린지 대표인 존 하손(John Harthorne)로부터 이메일이 왔다. 생활 속 에너지 접근 방식에 흥미가 있다며 미국은 캠핑 아웃도어 시장이 큰데 이 아이템으로 접근해 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이었다.

‘매스첼린지(MassChallenge)’는 매사추세츠 주정부 지원으로 보스턴 대학이 주관하는 대회로, 오바마 전 대통령이 극찬한 스타트업 육성 프로그램이다. 그해 12월 노 이사와 함께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존은 캠핑존이 모여 있는 거점 지역을 소개했다. 자동차 한 대를 빌려 두 달 동안 60곳의 캠핑장을 돌며 시장 조사를 진행했다.

미국 캠핑존을 다니며 시장조사를 진행한 박 대표는 대부분 카약 등 수상 레저를 즐긴다는 사실에 착안해, 물 속에 던져 흐르는 물에서 에너지를 만드는 ‘배터리 일체형 발전기’를 착안하게 된다
“미국에서는 캠핑을 가면 보통 열흘씩 묵어요. 몇 달씩 가는 사람들도 많구요. 카약을 타는 사람만 2,000만명이 넘을 정도니 캠핑 문화가 엄청 발전한 셈이죠. 당연히 캠핑장마다 충전 수요가 많았어요. 미국 전역의 60%가 전기가 연결된 반면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 40%에 달합니다. 당연히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오프그리드(Off-Grid) 캠핑장이 많았습니다. 기존에 휴대용 디젤발전기를 사용했는데, 소음도 심하고 매연이 나와서 사용이 금지된 상태였죠. 이후에 태양광 발전기나 휴대용 바이오매스 충전기(나뭇가지 등을 태워서 충전하는 방식) 등이 있었는데 시장이 만족할 만한 제품들은 아니었죠. 캠핑장을 직접 둘러보니까 저희가 진출할 만하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첫 타깃으로 좋은 시장이라는 확신이 들었구요. 캠핑장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만나 휴대용 발전기가 어떤 사이즈, 어떤 디자인이면 좋겠냐는 시장 조사도 진행했습니다. 결론은 배낭 옆 물통 자리에 넣어 다닐 수 있는 물병 사이즈와 디자인이 가장 선호됐습니다. 미국 출장에서 매우 의미 있는 결과물을 도출한 셈이었죠.”

시장 수요를 반영해 이스트림을 500ml 실린더 형태의 디자인으로 만들었다. 흐르는 물에 설치하면 물의 속도에 따라 2.5W에서 최대 7W의 전기를 만들 수 있다. /사진제공=이노마드
1년간 개발에 매진한 끝에 2016년 초에 흐르는 물을 활용해 스마트폰을 충전할 수 있는 휴대용 수력발전기 ‘이스트림(Estream)’을 선보였다. 강이나 계곡과 같은 흐르는 물을 전력에너지로 변환해 스마트폰, 테블릿PC와 같은 모바일 기기를 충전할 수 있는 배터리 일체형 발전기다. 특히 배터리가 일체형인 발전기는 이스트림이 세계 최초다. 미국 현지 조사 결과를 반영해 500ml 실린더 형태의 디자인으로 만들었다. 흐르는 물에 설치하면 물의 속도에 따라 2.5W에서 최대 7W의 전기를 만들 수 있다. 전기는 이스트림 내부의 배터리에 충전되는데, 스마트폰 2대(아이폰 기준)를 충전할 수 있는 용량이다. 수력을 이용해 내장 배터리를 충전하고, 완충된 배터리는 본체에서 분리해 스마트폰을 충전하거나 랜턴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

이스트림이 시장에 본격 선보인 것은 2016년 3월 텍사스 오스틴에서 열린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SXSW) 트레이드쇼에 참여하면서부터다. 박 대표는 이 곳에서 현지 동향을 파악하고 마케팅을 펼칠 파트너 에이미 다이안을 만난 것을 큰 수확으로 여긴다. 잡지사 에디터 출신의 에이미는 아웃도어에 관심이 많은 데다 현지 네트워크가 탄탄해 현재 이노마드의 미국 지사(로스앤젤레스)를 맡고 있다. 이 곳에선 킥스타터와의 인연도 맺었다. 킥스타터 매니저가 이스트림을 보더니 무조건 킥스타터에 출품하라고 권한 것. 8월 킥스타터에 이스트림 영상을 올렸고 1억8,000만원 어치의 선주문이 몰렸다. 미국과 유럽 등지의 리테일러로부터 구매 요청이 쇄도하면서 양산에 필요한 자금을 모을 수 있었다.

지난해 3월 박혜린 대표가 미국 텍사스 오스틴에서 열린 SXSW 트레이드쇼에 참가해 방문객에게 제품을 열심히 설명하고 있다. /사진제공=이노마드
이스트림은 580g의 경량이다. 이 정도 무게를 유지하려면 플라스틱을 재료로 해야 했다. 내구성과 함께 완벽한 방수 기능도 요구됐다. 대량 생산을 하기 위해선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킬 협력사를 확보해야 했다. 현재 경기도 파주와 군포의 공장에서 이스트림을 생산하고 있다. 주문 물량을 소화하면 올해 매출은 10억원을 가뿐히 넘어설 전망이다.

박 대표는 해외 거점 지역 3곳에서 온라인 마켓을 통해 시장을 확대해간다는 계획이다. 우선 샌프란시스코에 본사를 둔 터치오브모던이라는 온라인 스토어를 확보했다. 고객의 80%가 30~40대 남성으로 이스트림의 타깃 고객과 맞아 떨어진다. 뉴욕과 영국 런던 등에서 추가 거점을 마련하고 있어 내년에는 매출 100억원 달성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우선 선진국을 중심으로 제품을 판매하고, 나중에는 보급형 모델을 만들어서 개발도상국으로 가져갈 계획이다.

◇이노마드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가치

박 대표는 머지 않은 미래에 이스트림이 전기가 없는 지역에 문명의 혜택을 선사하는 선물이 되도록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겠다는 목적도 좋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방식이 똑똑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해비타트를 예로 들었다.

“개발도상국에 집을 지어주는 해비타트는 물론 가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단기간에 뚝뚝 지어주고 끝인 아니잖아요. 그 집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이 지속가능할 수 있도록 유지관리가 뒷받침돼야 진정한 의미의 집짓기라고 할 수 있겠죠. 선의를 갖고 일을 하더라도 해당 지역이나 주민에 대한 이해가 없이 진행하는 경우엔 오히려 그 가치가 희석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프리카에 흙건축 프로젝트라는 게 있다고 해요. 프랑스의 건축가가 봉사활동을 하는 건데, 그 지역 흙을 이용해 지어주는 겁니다. 1년간 흙의 성분 등을 연구해서 해당 지역의 환경을 고려해서 설계를 하는 거죠. 그렇게 지어진 집은 그 다음 세대, 그 다음 세대들도 살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하다고 합니다. 저희 일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접근하고 싶습니다. 좋은 일일수록, 선한 일일수록 똑똑하게 잘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선 현재 캠핑 아웃도어 시장에서 이스트림을 통해 소형 발전 시장을 열고, 이를 바탕으로 더 많은 이들이 전기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통해 경험이 쌓이면 각 지역별로 이스트림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연구할 계획입니다. 기후 등 환경 조건이 다른 상황에서 이스트림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그리고 해당 지역별로 어떻게 접근해야 편리하게 쓸 수 있는지 고민할 겁니다. 현재의 고민이 내일의 가치를 뒷받침하는 디딤돌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창업을 준비하는 후배들에게는 밀도 있게, 주체적으로 살아가라는 조언을 전했다.

“저는 지금 이 순간도 하고 있는 일이 자아 실현의 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매일 밀도 있게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떻게 가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가고 싶은 곳이 어디인지는 명확합니다. 그래서 매일 힘들고 피곤하지만 어떻게든 제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를 향해 한걸음씩 내딛는 이 과정이 소중하고 감사합니다. 누군가 가라고 떠밀어서가 아니라 내가 간절하게 원해서 가는 길이 여러분의 창업 과정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이스트림 개발을 할 때도 소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서 이케아에 가서 하루 종일 전시된 제품들을 만지면서 딱 맞는 소재를 찾았어요. 방법은 어떻게 해서든 찾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고 싶은지를 잘 알고 있는 게 중요합니다.”

/정민정기자 jminj@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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