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보호무역주의 공세,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배치에 따른 중국의 보복, 노골화하는 일본의 군국주의 바람 등의 대외 불안 요인. 저성장 국면에 들어간 가운데 저출산과 고령화, 가계 부채, 내수 부진 등의 내부 위험 요인. 이에 더해 탄핵 정국의 후폭풍으로 세대간·진영간의 갈등이 극에 달했는데도 위기 돌파의 정치 리더십은 잘 보이지 않는 실정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대 대통령은 인수위원회도 없이 임기를 시작해야 한다. 대한민국이 좌표를 잃고 표류하고 있다는 비관론이 커지고 있는 이유다.
과거에도 이런 위기는 있었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닥친 한국전쟁과 4·19혁명이 그랬다. 5·16 쿠데타와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신군부 쿠데타도 마찬가지였다. 위기를 겪으면서 후퇴할 때도 있었지만 결국 우리는 꿋꿋이 전진하며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뤄냈다.
그래서 준비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을 이끌었던 11명의 대통령을 살펴봤다. 역대 대선 과정에서 있었던 네거티브 전도 정리한다. 이를 바탕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을 국민과 함께 헤쳐갈 인물을 뽑게 될 다음 대선을 준비하고자 한다.
이승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부터 이제는 파면된 박근혜 전 대통령까지. 해방 당시 45달러에 불과했던 국민소득은 이제 3만 달러를 바라보고 있다. 70년간 대한민국을 이끌었던 11명의 대통령. 그 속의 사건과 인물들을 들여다봤다.
[영상]19대 대선, 역대 대통령 총정리 1편(이승만, 박정희, 최규하 편)
◇김대중 대통령(15대)-햇볕정책과 노벨평화상
이승만 대통령(1~3대)
외환위기가 찾아온 직후 취임한 김대중 15대 대통령은 ‘국민의 정부’를 지향했다.그의 인생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향한 투쟁 그 자체였다. 대통령이 된 이후로는 햇볕정책이라 불리는 대북 정책으로 남북 관계 개선에 힘썼다. 2000년 6월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평양에서 남북 정상회담을 열었다. 그 해 12월에는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도 받았다.
외환위기를 빠르게 극복한 것 역시 큰 성과였다. 4~5년은 걸릴 것이라는 외부의 예상을 보기 좋게 깨고, 불과 1년 반 만인 1999년에 IMF의 관리체제에서 벗어났다.
‘정보통신(IT) 강국’이라는 대한민국의 명성이 시작된 것도 이 시기였다. 그는 벤처 산업에 각종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햇볕 속에도 어둠은 있었다. 2000년대 초의 신용카드 대란이 대표적이다. 인위적인 경기 부양을 위해 신용카드 규제를 완화하면서 시작된 사태다. 마구잡이로 남발된 카드로 가계에 빚이 쌓여가며 400만명의 신용불량자가 발생했다. 그 결과 2002년 7.2%였던 우리나라의 경제성장률은 다음 해 2.8%로 곤두박질쳤다.
‘홍삼 트리오’로 불렸던 김 대통령의 아들 삼 형제가 모두 비리에 휘말린 점도 국민의 정부의 어두운 모습이었다.
◇노무현 대통령(16대)-기득권과 싸우다 탄핵의 위기로
윤보선 대통령(4대)
뒤를 이어 노무현 대통령이 16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기득권과 싸우고 스스로 권위주의에서 탈피하려 했던 대통령이었다. 국민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소통한 대통령이기도 했다.그는 새 정부를 ‘참여정부’로 불러달라고 했다. 국민의 참여로 권위주의와 지역주의에서 벗어나고 부패 문화를 청산하겠다는 의지였다. 야심 차게 출발했지만 순탄치만은 않았다. 부동산 가격이 사상 최대 폭으로 치솟고 고성장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빈부 격차가 심화됐다. 특유의 직설적인 표현에 보수 세력이 반발하고 사회 갈등은 증폭됐다.
임기 시작 1년 만인 2004년에는 탄핵의 위기를 맞는다. 국회의원 선거와 관련된 대통령의 발언이 문제였다.
탄핵안은 기각됐지만, 준비한 정책들을 밀어붙일 수 있는 적기를 놓치게 됐다.
임기 후 터진 친인척 비리는 ‘도덕성’을 강조하던 그에게 치명적이었다. 이 문제로 검찰 소환까지 당한 그는 심리적 고통을 이기지 못했고 2009년 5월 23일 사저 뒷산인 봉화산 부엉이바위에서 투신, 서거했다.
◇이명박 대통령(17대)-22조원 들인 녹조라떼
박정희 대통령(5~9대)
2008년 대한민국의 17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명박 대통령은 ‘경제 살리기’와 ‘국민 대통합’을 강조했다. 평사원에서 대기업의 경영인까지 승승장구했던 그를 국민들은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시켰다. 경제를 살릴 것이란 기대감이 반영된 결과였다.이명박 대통령은 ‘747’ 공약으로 화답했다. 7% 경제성장과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를 이뤄내고 세계 7대 강국으로 우뚝 서겠다는 의지였다. 결과적으로 그의 공약은 지켜지지 않았다.
‘녹색성장’을 목표로 추진했던 4대강 사업은 아직도 후유증이 크다. 22조원의 국민 세금을 투입했지만, ‘녹조라떼’로 불릴 정도로 수질이 악화된 강만 남았다. 자원외교도 ‘다른 나라가 버린 해외 쓰레기 사업’이나 사들인 전형적인 예산 낭비 사례였다.
◇박근혜 대통령(18대)-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최규하 대통령(10대)
이제는 자연인으로 돌아간 박근혜 18대 대통령에게는 ‘역사상 최초’라는 타이틀이 여럿 붙는다. 대한민국의 첫 여성 대통령이자 아버지 박정희에 이어 딸 박근혜까지 대통령 자리에 오르면서 최초의 부녀 대통령으로 기록됐다.박근혜 정부 4년은 ‘불통’의 시대였다. 국민들은 물론 소속 정당의 의원들조차 불통의 대상이었다. 유일하게 소통하던 이는 비선 실세인 최순실 씨였다. 민간인 신분인 최 씨는 박근혜 대통령의 호위 하에 국정을 농단하며 마음껏 권력을 휘둘렀다.
결말은 최악이었다. 휘두른 권력은 흔적을 남겼고, 세상에 알려졌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국회 청문회가 진행됐고, 특검이 출범했다. 92일 동안 특검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 개입된 많은 이들을 구속하고 진실에 한 발자국씩 다가섰다.
그리고 찾아온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 선고 당일. 헌재는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고 선고했다. ‘8:0’ 헌재 재판관들의 의견은 만장일치였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한민국 역사에 ‘첫 현직 대통령 탄핵’의 주인공이라는 오명을 남기게 됐다.
/정순구·정수현기자 soon9@sedaily.com
일러스트=구선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