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보사는 나의 네번째 아이"...이웅열의 '바이오 드림' 19년만에 영글다

세계 첫 퇴행성관절염 신약 양산 눈앞
李회장 충주공장 찾아 직원들 격려

이웅열 코오롱그룹 회장이 5일 코오롱생명과학 충북 충주 공장을 찾아 세계 최초의 퇴행성 관절염 주사제인 ‘인보사’의 양산을 앞둔 직원들을 격려했다. 칠판에 ‘인보사’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적어달라는 사회자의 요청에 ‘981103’이라는 인보사 투자를 결정한 날짜를 적은 이 회장이 직원들에게 숫자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사진제공=코오롱그룹


인보사


“인생의 3분의1을 투자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만큼 ‘인보사’의 성공과 코오롱의 미래를 위해 끝까지 함께할 각오가 돼 있습니다.”

세계 최초의 퇴행성관절염 세포유전자 치료제인 인보사의 양산을 앞두고 5일 코오롱생명과학(102940)의 충북 충주공장을 찾은 이웅열 코오롱그룹 회장은 19년간의 가슴앓이와 난관들이 눈앞에 지나가는 듯 감격에 겨운 모습이었다. 19개의 초가 켜진 인보사의 주민등록증처럼 만든 케이크에는 연구개발(R&D)에 참여한 연구원과 직원들의 사진이 새겨져 있었고 이 회장은 그들의 얼굴을 기억에 담아두려는 듯이 한참을 바라본 후 조촐한 행사가 시작됐다.

인보사는 사람의 정상 동종 연골세포와 세포의 분화를 촉진하는 성장인자를 가진 세포를 무릎 관절강 내에 주사로 간단히 투여해 퇴행성관절염을 치료하는 바이오신약이다. 매년 600만명씩 새로운 환자가 발생하며 한 해 40조원 규모의 ‘블루오션’이지만 인보사 이전의 퇴행성 관절염 치료제는 일시적으로 통증을 완화해주는 소염진통제나 일정 기간 연골을 보호하는 히알루론산 주사제가 전부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회장은 19년 동안 매일같이 인보사의 탄생과 양산을 기다려왔다.


이 회장에게 인보사는 어떤 의미였을까. 그는 이날 인보사의 의미를 칠판에 적는 행사에서 주민등록번호의 첫 6자리 숫자인 듯한 ‘981103’을 조심스럽게 적었다. 인보사 사업검토 결과보고서를 받아본 날이 1998년 11월3일이었고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보고를 받고도 많은 고심 끝에 연구를 시작할 것을 결정 내린 날이었다. 그래서 이후부터 인보사는 이 회장에게 자식과 같은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이날도 직원들에게 이 회장은 “인보사는 저의 네 번째 아이”라며 “오늘은 이 아이의 성인식을 맞는 날”이라고 했다. 지난 19년 동안 속 앓이를 하면서 자식이 성장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이 바로 이 회장에게 인보사가 주는 의미였다.

이날 이 회장의 공장 방문은 그동안의 마음고생을 직원들과의 허심탄회한 대화를 통해 털어내는 자리이자 치료제 양산을 앞두고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자리였다. 이 회장은 ‘인보사 성인식 토크쇼’에서 “성공 가능성이 0.00001%라고 할지라도 그룹의 미래를 생각할 때 주저할 수 없었고 과감하게 실행에 옮겼다”며 “현재 충주공장의 증설이 추진 중인데 차질없이 진행해 곧 다가올 인보사 시대를 미리 준비하자”고 독려했다.

사실 국내 바이오 의약품 업계의 한 획을 그은 인보사의 탄생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1996년부터 부친인 이동찬 코오롱그룹 명예회장에게 경영권을 물려받은 뒤 이 회장은 코오롱그룹의 새로운 먹거리를 고민하게 됐고 그 이전부터 바이오 사업에 대한 준비를 착실히 해왔다. ‘성공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보고서를 받아본 1998년은 코오롱에 시련의 시간이었다. 외환위기의 파도는 코오롱을 비껴가지 않았으며 26개 계열사를 15개로 줄이는 구조조정에 나선 시기였다. 이 와중에 이 회장은 1999년 미국에 바이오사업을 위한 법인을 설립한 데 이어 2000년 ‘티슈진’이라는 바이오제약 회사를 만들어 본격적인 투자에 나섰다. 2008년에는 글로벌 금융위기로 투자비 조달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이 회장은 당시 그룹 안팎의 우려에도 바이오산업이 미래의 중요한 먹거리가 될 것이라고 확신하며 사업을 추진했다.

개발 과정에서 난관을 겪은 경우도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때마다 이 회장은 임직원을 독려해오면서 지금까지 사업을 이끌어왔다. 한번은 국내 임상을 진행하기 위해 임상 치료제를 병원까지 옮겨야 했는데 국내에서는 이를 대신할 수 있는 업체가 없어 직원들과 연구원들이 밤을 새워 병원으로 옮겼다는 소식을 듣고 다음날 아침 회의에서 직원들을 직접 챙기는 열정을 보이기도 했다. 19년간 연구진과 수시로 연락하면서 개발 과정을 챙겼고 모든 사업에서 인보사 개발은 늘 1순위였다.

19년 만에 양산을 앞둔 인보사의 생산 현장을 찾은 이 회장은 “바이오라는 가보지 않은 길을 가다 보니 두렵기도 하고 어려움도 많았을 것”이라며 “어려움 속에서 기회를 찾았고 성공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박성호기자 junpark@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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