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고선웅의 비틀고 또 비튼 창극 '흥보씨'... 황당하지만 흥미진진

국립창극단의 '흥보씨', 음악·연기 탁월

국립창극단의 신작 ‘흥보씨’에서 흥보(김준수)는 외계에서 온 스님의 말을 듣고 보리수 나무 아래서 수양한다. /사진제공=국립창극단
모든 것은 박 때문이었다. 이 시대의 이야기꾼 고선웅 연출가에겐 흥보가 박에서 쏟아진 금은보화로 보상을 받는다는 이야기 전개가 아무래도 납득이 안됐다. 박의 기능을 바꾸는 것으로 첫 번째 비틀기가 시작됐다. 하나를 비틀기 시작했더니 다른 것도 비틀린다. 비틀고 비틀다 보면 원형을 찾아보기 어렵게 된다. 문제작은 이렇게 탄생했다.

국립창극단의 신작 ‘흥보씨’에서 제비는 날개 달린 제비가 아니라 강남에서 춤 꽤나 추던 제비다. 흥보(김준수)와 제비(유태평양)가 함께 춤추는 장면. /사진제공=국립창극단
우선 사정없이 비튼 것은 스토리다. 고선웅이 판소리 5바탕 중 하나인 흥보전을 바탕으로 만든 창극 ‘흥보씨’는 흥보와 놀보라는 인물과 그 성격, 권선징악이라는 주제를 빼곤 아예 새롭게 쓴 창작극이다. 흥보는 찔레나무 밑에서, 놀보는 혼외자로 태어났다. 일찍이 형이었던 흥보는 놀보의 요구로 형님 자리를 내준지 오래다. 흥보의 아내와 아홉 자식들은 모두 길에서 연을 맺은 거지들. 여기까진 약과다. 문제는 그다음부터. 싯다르타의 성불 과정을 빗댄 듯 보리수나무 아래서 흥보가 득도한다. 그 후 강남에서 춤 좀 추던 제비(날개 달린 제비가 아니다)가 ‘가운뎃다리’를 다쳐 흥보에게 도움을 청한다. 보리수나무 아래서 수양 끝에 몸이 나은 제비가 박씨를 선물하는데 대문짝만한 박은커녕 시칼로도 탈 수 있는 작은 크기의 박이 자란다. 이 작은 박으로 흥보 가족의 주린 배를 채우기엔 턱없는데 외계에서 온 스님은 박 속을 온 가족이 삼칠일을 나누어 먹으라 한다. 시간이 흐르고 흥보와 그의 가족들의 몸에서 빛이 나고 흥보는 앞 못 보는 이를 눈 뜨게, 앉은뱅이를 일어서게, 제대로 걷지 못하는 이를 걷게 하기에 이른다. 마치 예수가 사람들을 구원하듯.


국립창극단 신작 ‘흥보씨’에서 강남 제비(유태평양)가 흥보(김준수)에게 준 박씨로 흥보는 깨달음을 얻고 병자들을 구원한다. /사진제공=국립창극단
이후 이야기는 더 점입가경이다. 구원받은 이들은 찬송가 소절을 빗댄 ‘내게 강 같은 화평’을 부르며 춤을 추고, 소작농들을 착취해 관아에서 벌을 받게 된 놀보를 대신해 끌려간 흥보는 십자가를 지고 ‘골로가는 언덕(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오른 골고토 언덕의 언어유희)’에 가게 생겼다며 울부짖는다. 흥보와 놀보를 가려내는 장면에서 솔로몬의 심판 주요 장면이 교차하고, 대신 벌을 받도록 공모한 이들 형제에게 원님은 ‘국정농단’이라며 혼쭐을 낸다.

외계인에 온갖 종교까지 끄집어낸 이야기는 산으로 가다 못해 강으로, 바다로 가는 듯하지만 문제는 창을 몰라도 재미는 있다는 것이다. 창극의 재미는 ‘잘 노는 데’서 나오는데 배우든 관객이든 잘만 놀았다면 높은 점수를 줘야 마땅하다. 특히 음악에서 큰 틀을 벗어나지 않은 것이 주효했다. 창작 판소리극 사천가, 억척가 등으로 이미 실력을 검증받은 이자람 음악감독은 이번 작품에서도 실력 발휘를 제대로 했다. 흥보네 식구들이 밭을 갈며 부르는 ‘쟁기질 노래’는 현대음악의 사운드를 차용해 독특한 느낌을 준다. 동시에 눈대목의 위치를 자유자재로 바꾸면서도 5음계와 육자배기토리를 지키며 작창과 작곡을 했다. 고전의 틀을 깨고 비틀었지만 지킬 건 지켰다는 의미다.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설정에도 기존 창극 팬과 새롭게 창극을 접하는 이들도 만족시킬 수 있는 지점이다. 20~30대 젊은 배우들의 활약도 눈에 띤다. 흥보 역의 김준수와 놀보 역의 최호성이 각자의 성향을 소개하는 대목에서 랩 배틀을 하듯 대구 형식으로 소리를 주고받다가 이중창으로 잇는 대목 등에서 두 소리꾼의 역량이 빛났다. 또 마당쇠 역의 최용석, 제비 역의 유태평양 등 조연들은 과하지 않은 연기로 감초 역할을 톡톡히 했다. 5~16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서은영기자 supia927@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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