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인의 예(藝)-홀바인 '덴마크의 크리스티나'] 왕이라도 나는 싫소...그림에 속지 마오

이혼,사형,사별 겪은 헨리8세의 왕비감 찾아
궁정화가 한스 홀바인이 그린 '덴마크의 크리스티나'
상복차림 단아함...눈과 손가락 만으로 매력발산

영국 왕 헨리8세의 궁정화가 한스 홀바인이 1538년 그린 덴마크의 공주 크리스티나의 초상화. 남편을 여읜 상복차림의 크리스티나는 단아한 표정으로 왕의 청혼을 이끌어냈지만 거절했다. 179.1×82.6cm 크기의 그림으로 영국 국립 내셔널갤러리에 걸려있다. /사진제공=내셔널갤러리

사람을 고르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사람을 소개하고 추천하는 일 또한 쉽지 않다. 선택해야 할 사람이 평생을 함께할 동반자라면 더욱 고심하게 되고, 그것이 왕의 반려자라면 크나큰 부담이 될 일이다. 한 나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의 아내이자 민중들이 우러러보는 왕비이며 주변국을 향해 존재감을 드러내는 인물이니 말이다.

잘 알려졌듯 영국 왕 헨리 8세(1491~1547)는 6번이나 결혼했다. 새 결혼을 위해 ‘이혼’ 절차가 필요했고 그로 인해 헨리 8세는 이미 500년 앞서 영국을 유럽에서 떼어내는 제1차 브렉시트(Brexit)의 주인공이 됐다. 형에 이어 왕세자 자리 뿐 아니라 형수인 캐서린까지 왕비로 넘겨받은 그에게는 정부(情婦)가 여럿 있었다. 왕비의 궁녀였던 앤 불린은 과감하게 왕에게 정식결혼을 요구했다. 로마 교황청이 이혼을 허락하지 않자 왕은 1527년 유럽 결속력의 아교 격인 로마 가톨릭에서 ‘탈퇴’했고 수장령을 내려 영국 성공회를 세웠다. 민족주의적 종교개혁을 감행하며 얻은 젊은 새 아내는 딸 엘리자베스를 낳은 뒤 거듭 유산하며 부부 사이가 멀어졌다. 결국 앤 불린은 불륜과 근친상간, 마녀라는 누명을 쓰고 런던탑에서 참수당했다. 왕은 곧장 앤 불린의 시녀였던 제인 시모어와 결혼하고 애타게 기다리던 왕자 에드워드 6세를 얻지만 산후병으로 아내를 잃는다.

이혼, 사형, 사별 후 이제 네 번째 아내를 구해야 하는 왕에게 인물 표현이 특출난 궁정화가 한스 홀바인(1497~1543)은 자신을 대신해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며 신붓감을 만나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그려다 줄 매파같은 존재였다. 홀바인이 1538년에 그린 초상화 ‘덴마크의 크리스티나’는 그렇게 탄생했다. 여인은 목 끝까지 올라온 새까만 드레스를 입었다. 온몸을 뒤덮은 풍성한 검정 코트는 안쪽에 덧댄 방한용 모피 외에 장식하나 없다. 머리에 딱 붙은 검은 모자는 그녀가 금발인지 흑발인지조차 알 수 없게 가렸다. 상복(喪服) 차림이다. 오직 얼굴과 손만 드러났을 뿐이다.

꾸미지 않아도 보석은 반짝이기 마련이다. 밋밋한 검은 옷이지만 소재 자체가 갖는 광택이 우아하게 빛나듯 말이다. 수줍게 살짝 몸을 돌렸지만 당당한 눈은 정면을 응시한다. 그녀의 오른쪽 눈은 우리를 보고 있지만 왼쪽 눈은 아주 살짝 다른 곳을, 좀 더 먼 곳을 내다보고 있다. 그녀가 뜻밖에 닥친 이 별난 상황에 대해 약간의 흥미와 호기심을 느끼는 듯하다. 유일한 장신구인 왼손 넷째 손가락의 알 작은 루비반지는 그녀의 자존심이 아닐까. 이 그림에서 가장 많은 이야기를 전하는 것은 손이다. 끼고 있던 장갑을 두 손에 움켜쥔 모양새가 다소곳한 듯 보인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같은 곳을 가리키지 않는 그녀의 손가락들은 이 여인이 얼마나 호기심 많고 적극적이며 똑똑한지를 알려준다. 황급히 장갑을 벗고 그것을 채 내려놓을 틈 없이 숨기듯 손에 쥐는 그 모습이 화가에게는 무척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그녀의 인간적, 여성적 매력을 탐색하고픈 욕망을 자극할 정도다. 그러고 보니 화장이라기보다는 혈색에 가까운 꼭 다문 입술에서 생명력이 느껴진다.


덴마크의 공주이자 스페인 왕 카를5세의 여동생인 크리스티나(1522~1590)는 11살이던 1533년 밀라노의 공작과 정략결혼했지만 2년 만에 남편을 잃은, 젊다 못해 어린 미망인이었다. 홀바인이 그녀를 찾아간 것이 1538년이었으니 갓 열여섯 살에 그려진 인물화다. 하지만 그녀는 나이답지 않게 성숙했고 재기발랄함을 잠시 숨길 줄 아는 지혜도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림을 본 영국 왕은 그녀에게 청혼했지만 단칼에 거절당한다. 당대 유럽 최고의 남자였던 헨리8세를 마다한 그녀가 남편감의 여성편력과 여러 풍파를 내다본 듯하다.

마음에 든 여인을 얻지 못하자 왕은 또다시 홀바인을 ‘출장’ 보냈다. 이듬해 그린 안네 클레베스의 초상은 놀랄 정도로 상반된 분이기다. 검은 상복의 크리스티나와 달리 화려한 황금색 머리장식, 풍요로운 주황색과 기품있는 빨간색이 어우러진 화려한 옷차림에 반지도 주렁주렁 끼고 한껏 치장한 정면상이다. 장식이 너무 많아 사람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차선이지만 안네 클레베스와 결혼하기로 한 헨리8세는 실물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림과 달리 너무 못생겼기 때문이다. 결국 안네는 6개월 만에 이혼당했다.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김영나 서울대 명예교수는 종종 이 두 그림을 나란히 놓고 “한스 홀바인은 자신이 파악한 인물의 단점을 훌륭하게 보완해 그려 의뢰인을 만족시키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었던 화가”라며 “뛰어난 화가가 그린 초상화가 얼마나 인물을 미화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한스 홀바인이 1539년에 그린 ‘클레페의 앤’. 이 초상화로 앤 왕비는 헨리8세의 3번째 아내가 되지만 실제 인물이 그림보다 못해 곧 이혼당한다. /사진제공=루브르박물관

한스 홀바인은 독일의 유명한 화가 집안 출신으로 같은 가문의 선대 화가와 구분되게 ‘작은(The Younger) 홀바인’으로 불린다. 그는 예술적 토양이 풍요로운 곳에서 태어났지만 종교개혁의 소용돌이가 화가의 발목을 잡는 시절을 살았다. 바젤에서 활동하던 그에게 에라스무스는 “여기서는 예술이 얼어 죽어가고 있소”라 적은 추천서을 주며 토머스 모어 등이 있는 영국으로 보냈다. 홀바인은 인물을 그리며 배경 곳곳에 그 사람에 대한 단서를 깔아두는 것을 즐겼다.

1533년에 프랑스가 보낸 영국 대사와 주교를 그린 그의 대표작 ‘대사들’에는 두 인물 사이에 골동품 선반과 각종 과학도구를 늘어 놓아 당대 지식인을 대표하는 그들의 면모를 과시한다. 왼쪽 대사가 손에 쥔 단검, 오른쪽 주교가 팔꿈치를 괸 책장에는 일부러 살피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게 이들의 나이를 적어뒀다. 선반 아래쪽에 놓인 악기는 목이 부러진 채 현이 끊겨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조화가 깨졌음을 암시한다. 그림 오른쪽 멀찍이서 봐야 해골임을 눈치챌 수 있게끔 바닥에 커다랗게 그린 왜곡된 형태는 인간사·정치사의 덧없음을 이야기한다. 왼쪽 모서리에 보일락 말락 그려놓은 커튼 뒤 십자가의 예수는 구원의 길을 고민하게 만든다. 이처럼 관찰력 뿐 아니라 통찰력도 뛰어난 화가였기에 홀바인의 인물화는 표현력이 좋지만 관객의 해독 능력을 필요로 한다. 꾸미지 않은 크리스티나의 뛰어남을 알아보고 치장한 안네의 볼품없음을 꿰뚫어야 하듯 말이다.

한스 홀바인의 1533년작 ‘대사들’. 프랑스의 영국대사 장 드 댕트빌(왼쪽)과 프랑스인 조르주 드 셀브 주교의 초상화. 207x210cm 크기로 영국 런던 내셔널갤러리가 소장하고 있다. /사진제공=내셔널갤러리

한편 ‘곤란한 남편감’ 헨리 8세를 거절한 크리스티나는 1541년 재혼하지만 4년만에 또 사별하고 외롭게 살았다고 한다. 남편이 없었기 때문일지는 모르겠으나, 남편이 없었음에도 68세까지 장수했다. 그녀의 선택이 달라졌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사람을 고르다 보면 꾸미기 좋은 말과 겉모습, 그를 둘러싼 배경에 현혹되기 쉽다. 중요한 사람일수록 주변을 다 걷어내고 인물 그 자체를 볼 줄 알아야 한다. 홀바인이 현재 한국에 살고 있다면 어쩌면 유력 대선 캠프에 이미지 컨설턴트로 위촉됐을지 모를 일이다. 그림은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에 속지 말아야 한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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