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은영의 독무대]불혹에 이른 세종문화회관 파이프 오르간

체제·亞 주도권 경쟁 속 탄생
JP "日 보다 더 크게 지으라"…당시 동양 최대 규모로 지어
韓 연주자로는 윤양희 씨 최초로 연주
오는 15일 유럽 대표 오르가니스트 칼레비 키비니에미 초청…제10회 오르간 시리즈 선봬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우측면에 설치된 파이프 오르간은 설계 당시에는 없었다가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지시로 갑작스럽게 설치됐다. /사진제공=세종문화회관
이번 ‘서은영의 독무대’에서는 세종문화회관의 파이프 오르간 이야기를 살펴봅니다. 세종문화회관의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된 해는 1978년. 사람으로 치면 올해 불혹입니다. 1972년 불에 탄 시민회관 자리에 6년 뒤 세종문화회관을 건립하면서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의 지시로 애초 설계에도 없던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된 일화가 유명한데요. 세종문화회관이 10년간 꾸준히 선보여온 파이프오르간 기획 시리즈 X 공연(15일)을 앞두고 국내 연주자 가운데서 최초로 세종문화회관의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한 1세대 오르가니스트 윤양희(72) 씨로부터 그 역사와 파이프 오르간의 매력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당시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일본 NHK콘서트홀의 파이프 오르간보다 하나라도 더 많게 지으라며 6단짜리 파이프 오르간을 설계했다고 한다. /사진제공=세종문화회관
하나. 북·일과의 경쟁 속에 탄생한 동양 최대 파이프오르간

북한과 체제 경쟁이 한창이던 1960∼70년대.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은 북한에 가장 뒤진 부분이 남측의 문화시설이라고 생각했답니다. 북한의 만수대 예술극장 같은 대공연장에 맞서는 시설을 세우고 싶어 했고 이 과정에서 탄생한 게 4층 규모의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 자리)이었죠. 1972년 12월 2일 ‘MBC 10대 가수 청백전’이 열리던 중 큰 화재가 발생하면서 불탄 시민회관 자리에 세종문화회관이 들어선 것은 6년 만인 1978년이었습니다. 개관일은 4월14일, 김일성 주석의 생일(4월 15일)보다 하루 앞선 개관으로 김을 빼려는 속셈이었다고 합니다.

8,098본에 이르는 파이프 /사진제공=세종문화회관
특기할 것은 원래 설계도에도 없던 파이프 오르간을 설치하기로 한 인물이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였다는 거죠. 김종필 전 총리 역시 ‘증언록’을 통해 세종문화회관에 파이프 오르간을 장치한 건 자신의 오래된 자부심이라고 소개합니다. 설치 비용만 6억1,300만원으로 당시 피아노 1,700여대 값에 맞먹는 수준이었다고 하는데요. “가난한 사람 수십만 명을 먹여 살릴 돈을 쓸데없는 데 낭비한다는 시민단체의 반대를 무릅쓰고” 6단 건반에 8,098본의 파이프뿐만 아니라 32개의 한국식 범종, 프랑스식 종 40개를 첨가하며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을 설치한 데는 정치적 배경이 있습니다. 윤양희 씨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김종필 총재가 일본 NHK 콘서트홀의 건반 5단짜리 파이프오르간(직전 동양 최대)을 보고, 그것보다 하나라도 더 많게 지으라고 해서 6단짜리 파이프오르간을 설계했다”고 합니다. 일본 산토리 홀 등에 1만 개 이상의 파이프를 거느린 초대형 파이프오르간이 등장하면서 현재는 한국 최대 파이프 오르간으로 만족하고 있지만 당시로선 세계적으로도 이슈가 될 정도로 상당한 규모였다고 합니다. 윤 씨는 “당시 NHK홀 파이프 오르간을 ‘가루스케’가 설치했다는 이야기만 듣고 이 회사를 찾아내라는 특명이 떨어졌는데 결국 이 회사가 독일의 ‘칼슈케’라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급하게 설계를 의뢰했다는 일화도 있다”고 소개했습니다.

세종문화회관 직원들 사이에선 당시 파이프 오르간 설치가 갑작스럽게 결정되고도 일사천리로 이뤄진 탓에 ‘김 전 총리의 조카인 윤양희 씨가 조언하면서 김 전 총리가 파이프 오르간 설치를 주장했다’는 루머가 돌았습니다만 윤 씨는 “김 전 총리와 나는 친인척 관계가 아니”라고 일축했습니다.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세종문화회관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한 1세대 오르가니스트 윤양희 씨 /사진제공=세종문화회관
둘. 특명! 한국인 오르가니스트를 찾아라

동양 최대 규모의 파이프 오르간이 마련됐지만 문제는 마땅한 한국인 연주자가 없었다는 겁니다. 당시 정부 차원에서 세계 무대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오르가니스트들을 물색했고 그러다가 한국인으로는 미국, 유럽 등을 주 무대로 오르간을 연주했던 윤양희 씨를 찾아냈습니다. 세종의 오르간을 최초로 연주한 이는 1978년6월8일 첫 연주회를 연 오스트리아 태생의 오르가니스트 한스 하젤벡이었지만 그로부터 사흘 뒤 윤 씨가 무대에 올라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세종의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했습니다. 당시 미국에 살고 있던 윤 씨는 “나 역시 한국에 연주할만한 파이프오르간이 생겼다는 소식에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며 “정부 초청을 받고 기꺼이 한국으로 돌아와 무대에 올랐다”고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윤 씨는 세종문화회관에서 고 윤이상 작곡가의 오르간 연주곡을 선보이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윤 씨는 “미국에 체류 중일 때 한 독일인 오르가니스트를 만났는데 ‘한국인 이상 윤으로부터 오르간 연주곡 악보를 선물 받았는데 연주를 할 수가 없다고 하더라”며 “윤이상 선생께 직접 편지를 써서 악보를 보내주십사 요청했더니 나에게 직접 친필 사인한 ‘오르간을 위한 단편(Fragment)’ 악보를 보내주셨다”고 소개했습니다. 당시 동구권 음악가인 윤이상의 곡을 연주한다는 것은 국내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윤양희 씨는 한국인 작곡가가 연주한 오르간 곡을 국내 최고의 오르간으로 연주한다는 것이 의미 있다고 판단해 이를 밀어붙였다고 합니다.

핀란드를 대표하는 오르가니스트 칼레비 키비니에미 /사진제공=세종문화회관
셋. 파이프 오르간 시리즈 올해로 10년째

첫 연주 이후 윤 씨는 세종문화회관의 공연기획관 겸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하면서 해외 유수의 오르가니스트들을 국내에 초청하는 일도 맡게 됩니다. 윤 씨의 활약으로 프랑스를 대표하는 오르가니스트 제인 파커 스미스 등이 내한해 윤 씨와 듀오콘서트를 열기도 했습니다.

한동안 파이프 오르간 연주회를 열지 않았던 세종문화회관은 2008년 프랑스 출신의 파이프오르간 대가 미셸 부봐르 공연을 시작으로 기획프로그램인 파이프 오르간 시리즈를 매년 내놓고 있습니다. 데이비드 생어, 켄 코완, 나지 하킴 처럼 세계적인 오르가니스트의 독주, 듀오 연주, 오케스트라와의 협주, 합창단과의 협연, 심지어 5인의 오르가니스트 협연 등 다양한 기획의 파이프오르간 공연이 이어진 가운데 올해는 유럽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오르가니스트 칼레비 키비니에미(Kalevi Kiviniemi)가 무대에 오릅니다. 15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리는 이번 공연에서 키비니에미는 직접 작곡한 오르간 변주곡 연주뿐 아니라, 시벨리우스의 축제풍 안단테 등을 코리안 스트링스 오케스트라와 협연합니다. 윤 씨는 “파이프 오르간은 한 대의 악기로 오케스트라를 능가하는 풍성한 음향을 들려줄 수 있는 악기 중의 왕”이라며 “이번 연주회에서는 핀란드의 대음악가 시벨리우스부터 차이콥스키까지 폭넓은 레퍼토리를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서은영기자 supia927@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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