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활한 유라시아 대륙
“쫙!짝!!!!쫙!!찌익!!!!”2014년 겨울. 회사원 이진우 씨의 사표가 가차없이 찢겼습니다. 사표에는 ‘일신상의 사유’라고 적혀 있었죠. 직속상사는 네 번이나 이 씨의 사표를 찢었습니다. 그래서 비로소 솔직한 이유를 적어 냈습니다. ‘모터사이클로 세계일주’라고요.
상사 : 이녀석...감당할 수 없는 녀석....
그렇게 회사를 떠난 이 씨는 2015년 하반기에 약 5개월 동안 혼다 CRF250으로 유라시아를 횡단했습니다. 동해항을 떠나 러시아, 몽골을 거쳐 유럽까지 씌원하게 돌아주셨다네요. 우연히 이 분 블로그(링크)를 보게 된 저는 신기함과 부러움과 왠지 억울함(마치 나만 고양이 없는 것 같은 느낌)이 치받쳐 인터뷰를 요청했습니다. 마침 요즘 한가하셔서(?!) 흔쾌히 응해주시더군요.
횡단기 속의 그분은 매우 피폐하고 후줄근했지만, 실제로는 매우 멀쩡한 청년이셨습니다.
비포/ 러시아의 부랑자
애프터/ 서울특별시 스타벅스의 흔,,.아니 훈남
라이더라면 누구라도 마찬가지겠습니다만, 해외 바이크 일주는 꼭 이루고픈 꿈입니다. 나름 블로그를 정독했지만 궁금한 것도 많고 마냥 부럽더군요. 인터뷰도 수다 떨듯이 이어졌습니다. 아래 내용은 편의상 존댓말을 생략했습니다만 실제로는 무척이나 예의 바른 대화가 이뤄졌음을 밝혀봅니다.■기자 : 왜 떠났어?
이진우(이하 이) : 사실 회사를 그만두면서 비로소 생각나더라(그는 군대 시절 우연히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를 보고 모터사이클 세계일주를 꿈꾸게 됐다). 그래서 가기 전에 자주 들르던 센터에서 기본적인 정비 교육도 받았지. 엔진오일이나 타이어, 체인 교체 등등. 그리고 본의 아니게 러시아에서 많이 늘었다(…). 나중에는 배터리 교환, 클러치 유격조절 등도 자연스럽게 배우게 됐고.
백사장에서 스쿠터로 달려본 적도 있어. 나중에 사막에서 달릴 수도 있겠단 생각으로. 미친듯이 털리더라고, 헤헷.
여기서 그의 똘끼가 느껴졌다.
별 생각 없이 출발한 여정이었지만, 이 씨는 동해항에서 파티원 모집에 성공했습니다. BMW, 스쿠터 등을 몰고 온 일행 세 명을 만나게 된 거죠. 이들과는 2주를 함께 달리고 평생지기가 됐다 합니다. “다니다가 서로 삐지거나 한 적은 없냐”고 슬쩍 물어봤지만 아쉽게도 전혀 없었다네요. 다녀와서 다시 모이기도 했다고…서로의 ‘브라덜’이 된 거죠. 여행 초반 아직 해맑은 파티원들
러시아에서, 몽골에선 위기에 처할 때마다 귀신같이 누군가 나타나서 도와줬다고 합니다. 바이크가 부러지고 멈추고 가짜휘발유 먹고 피토하고, 별별 난리를 겪었지만 결국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건 그 분들 덕분이죠.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지인의 지인까지 뒤져가며 척척 바이크를 고쳐준 러시아 부자 스타니슬라브 아저씨라든가, 몽골 국경에서 집 한켠을 숙소로 내준 국경 직원 등등. 그리고 세르게이들, 안톤들…. 러시아 브라덜들
■기자 : 보기보다(음?) 인복이 있는 것 같네. 혼자 갔다면 어땠을까? 이 : 혼자 다녔으면 고독사했을 듯(…). 실제로 유럽에선 혼자 다녔는데, 정신적으로 황폐해지더라. 아무리 좋은 델 가도 구경하러 나가기가 싫어지고.
그래도 바이크로 다니면 좋은 게, ‘얘는 제대로 여행에 미친 애다’라는 인식 때문인지 사람들이 경계를 풀어. 러시아에서도 어딜 가든 사람들이 환영해줬지. 나중에는 연예인이 된 기분이 들 정도로(흐뭇). 오늘 처음 봤는데도 자기 집에서 자라며 마구 권하고.
전세계 라이더들과의 운명적인 조우
■기자 : 이타세(이륜차타고 세계여행)이란 카페에 님 같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더라. 한 시즌에만 한국인 열댓명이 유라시아를 달리고 있을 정도로 요즘 많이들 간다고. 이 : 유행처럼 많이들 하시는 것 같아. 각자 출발해도 만날 수밖에 없긴 해. 동해항에서 러시아로 가는 배가 일주일에 한 대밖에 없어서 자연스럽게 뭉치게 되거든. 그런데 위험한 상황에 부닥칠 수도 있다는 걸 꼭꼭 명심해야 해.
(*실제로 일본인 라이더가 러시아를 횡단 중 살해당하는 사고도 벌어졌다고 합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한없이 정겨운 러시아 라이더들(납치당하는 상황 아님)
■기자 : 나도 유라시아 가고 싶은데. 아무리 의지와 라이딩 스킬과 체력이 있어도 여자들끼리만 괜찮을까. 평소엔 문제 없겠지만 아무래도 위험한 상황이 오면 답이 없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 : 가능해. 여자분들도 이타세에 좀 계심. 어떤 여자분 둘이서 PCX를 타고 유라시아 횡단을 마친 후 제주도에서 감귤농장을 하고 계신단 이야기를 들었지. (뭔가 도시전설 같지만…실화입니다. ‘티피와 채’의 블로그 링크 클릭)
인터뷰는 인터뷰일 뿐. 이진우 님의 블로그에서 매우매우 생생한 글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몽골에서 유심칩 쓰는 법, 러시아의 물가, 전체 투어에 필요한 예산 등등 깨알팁을 올려놓으셨거든요. 맛보기로 몇 가지만 적어 볼까요?
-바이크는 아무래도 일본 바이크가 좋다. 혼다, 스즈키, 가와사키 등은 전세계 많은 이들이 타기 때문에 부품을 구하거나 수리하기 쉽다.
-세나가 없으면 지루해서 사망할 위험이 있다(…)
-구글맵을 과신하지 말라.
-귀신 나올 것 같은 푸세식 화장실보단 대자연이 낫더라(…)
이정도 넘어짐은 예사.
■기자 : 돌아와서 반성한 점, 깨달은 점이 있다면. 이 : 다음에 가면 짐을 좀 더 줄일 수 있겠다 싶어. 속옷은 좀 더 많이, 공구나 부품 같은 건 현지 조달이 가능하니 빼고. 그리고 괜찮은 옷 한 벌을 갖고 갔으면 좋았겠더라. 맨날 라이딩 복장 아니면 허름한 옷만 입고 다녔으니(한숨). 이번 횡단의 절반 정도로 짐을 줄일 수 있을 것 같아.
어렵게 유라시아 횡단에 성공하고 나니까 자신감이 생겨.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가 본격 성장했다! 이런 것까진 없지만, 인생을 좀 더 즐기는 법을 깨달았다고 해야되나. 나는 앞으로도 또 여행을 갈 것이고, 여행이 일상처럼 될 수 있을 거라는 느낌. 반대로 일상을 여행처럼 살 수도 있겠지.
나도 회사 다닐 땐 일이 무겁게만 느껴지고 답이 보이질 않았어. 하지만 바이크 여행을 다녀온 지금은 그런 문제들을 겪더라도 더 가볍게 바라보게 되는 느낌이야.
포장 도로를 만났을 때의 감격
아마 그는 삶을 관조할 수 있는 여유를 찾은 게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봅니다. 일상에 치이다 보면 일터에서 들은 말 한마디, 지하철에서 마주친 낯선 이의 무례함에 쉽게 지치고 짜증을 내게 됩니다. 하지만 더 넓은 세계를 보고 오면 달라질 점이 있겠죠? ■기자 : 앞으로의 계획은.
이 : 책을 쓸 건데 구체적인 계획은 아직 고민 중이야. 그리고 이번에 돌아와서 깨달았지.
아, 나는 평생 바이크를 타겠구나….
앞으로 기회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음 번엔 캐나다 퀘백에서 출발해서 미국, 남미까지 일주하는 코스도 상상해보고 있어. 이번 횡단에서 만난 퀘백 출신 라이더가 본인 집에서 출발하라더라고.
유라시아 순회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이진우 님은 더 넓어진 시야로 창업에 도전했습니다. 긴 여행 경험을 살려 ‘윈디코너’라는 여행안전용품 브랜드를 만들었죠. 최근엔 지퍼락&RFID해킹방지 기능 등을 갖춰 여행지에서 털릴 위험을 낮춘 가방으로 크라우드 펀딩에도 성공했다 하시니 장난으로 하시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음?!). 꼭 번창하셔서 나중엔 모터사이클 투어 전문 여행사를 세우신 다음에 저에게 할인 혜택을 왕창 제공해주시길 기원하겠습니다.
언젠가 이런 풍경을...!!
인터뷰 후 한동안 유라시아 횡단러들의 블로그와 책을 탐독했습니다. ‘티피와 채’ 두 분의 블로그는 정말 감명깊게(잠시 훌쩍일 정도로요) 읽었고, 유라시아 횡단 후 여행기 출판은 이미 레드오션이란 사실도 알게 됐죠. 전세계 각지의 모터사이클 투어러들이 모이는 웹사이트(http://www.horizonsunlimited.com)는 앞으로 틈틈이 읽어볼 생각입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죠. 유라시아는 엄두를 못 내겠다고. 생각이 바뀔 수는 있겠지만, 저는 최소 100㎞, 200㎞마다 주유소와 편의점에 들를 수 있는 미국이나 유럽을 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화장실과 양치와 샤워와 침대를 포기하기 싫거든요. 그런데 그러려면 돈이 많이 드는데, 운 좋게 로또라도 당첨되지 않으면 불가능이겠네요? 아래 무한 루프에 이미 빠진 듯 불길합니다. 더 고민해봐야겠습니다.
무한루프
/유주희기자 ginger@sedaily.com
지금은 W800도 탑니다 데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