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지렁이’ 절망 너머 희망을 응시하는 영화

학교 폭력·장애인 차별..해결의 시작은 ‘인간에 대한 예의’와 ‘경청’

[리뷰] ‘지렁이’ 절망 너머 희망을 응시하는 영화



윤학렬 감독의 영화 ‘지렁이’는 학교 폭력· 청소년 성범죄·장애인 차별 등 사회 이슈를 영화에 담아내 개봉 전부터 화제가 된 작품이다.

13일 언론시사회를 통해 베일을 벗은 ‘지렁이’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만들어진 영화가 아니다. 피해 학생을 딸로 둔 아비의 이야기로 볼 수도 있지만, 가해 학생과 피해 학생 모두를 방관하는 우리네 어른들 모두를 위한 영화로 다가왔다.

영화 ‘지렁이’는 집단 따돌림과 성폭행으로 유명을 달리했던 외동딸의 죽음 앞에 무기력할 수 밖에 없었던 뇌성마비 장애인이 겪는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물론 성폭력 피해자가 되어 결국 안타까운 죽음을 선택한 여고생 ‘자야’와 ‘자야’를 둘러싼 진실을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 아버지의 이야기이라는 기본 플롯이 새롭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약자의 진실에 귀 기울여주지 않은 현실을 뇌성마비를 지닌 아비의 눈과 입을 통해 보여준다는 점에서 여타의 영화와는 달랐다. 또한 주인공 자야와 가장 친한 친구의 시선을 우리의 거울처럼 담아내 방관하는 모든 이들의 마음을 요동질 치게 만들었다.


영화는 학교 내 집단 따돌림, 거대한 권력과 돈, 계층 차이, 비리 앞에 짓밟히는 진실들을 집요하게 우리네 얼굴 앞에 들이민다. 도를 넘어선 고등학생들의 실체를 서서히 알게 되면서 어른들은 피가 뜨겁게 끓기 시작한다. 이에 대한 답답한 분노는 고스란히 우리네 어른들의 몫이고 잘못 되가는 현실을 질끈 눈감아버린 대한민국의 아픈 손가락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절대 깨부술 수 없는 거대한 벽을 마주보고 있는 듯한 인상이 들기도 한다. 어른의 뒤통수를 갈기며 파고드는 두 얼굴의 청소년들이 계획한 악(惡)의 연결고리는 생각보다 교묘하고 치밀하다. 상식을 가진 관객이라면 분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연이어 일어난다. 자야가 성폭력의 희생자라는 것보다, 한 인간의 자존감이 무너지는 과정이 리얼하다 못해 서글퍼서 잠시 말을 잃게 된다. 이 모든 걸 ‘몹쓸 짓’이라는 말로 표현 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 치가 떨릴지도 모른다.

영화 제목인 ‘지렁이’와 같이 밟으면 꿈틀하는 약자는 늘 저 구석 한 켠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그들이 칼을 빼들고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대한민국의 민낯을 마주 할 것을 이야기했다.

13일 시사회 현장에선 뇌성마비 주인공 김정균에게 연기적 도움을 준 지인이 참석해 뜻깊은 말을 들려줬다. 실제 뇌성마비 장애우인 그의 이야기는 천천히 귀를 열고 들어야 할 만큼 정확한 발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어떤 이야기 보다 큰 깨달음을 줬다.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차별의 시각과 태도에 대한 일침이다. 그는 “장애인이다 아니다란 구분을 떠나서 우리는 같은 사람이잖아요. 같은 사람으로 대해주는 게 맞잖아요. 그런데 (말은 그렇게 해도)속마음까지 같은 사람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드물거든요”

맞다. ‘지렁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학교 폭력 문제에 대한 공분도 장애인 차별 문제에 대한 부끄러움도 아니었다. 기본적인 인간에 대한 예의, 더 나아가 경청의 자세가 필요함을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 영화는 ‘절망 너머 희망을 응시’ 하고 있었다.

뇌성마비 장애를 앓고 있는 아버지와 학교폭력에 시달리는 딸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지렁이’가 관객들의 공분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끝날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닌 채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준다면 작은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까.

뇌성마비 장애인 아버지 ‘원술’ 역 김정균, 그의 외동딸이자 청소년 성범죄의 피해자가 된 ‘자야’ 역 오예설 배우가 제 몫 그 이상을 해준다. 아비 김정균의 눈, 딸 오예설의 눈 속엔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깊이있게 반짝이고 있었다. 이 외에도 이계인, 윤순홍, 이한휘, 이응경, 최철호, 권영찬, 정운택, 김광식 등이 힘을 보탰다.

/서경스타 정다훈기자 sestar@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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