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과장, 아직도 그걸 모르면 어쩌나.”
떠올려만 보아도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는 말들이 있다. 이런 상사의 말에 이전보다 더 민감하게 반응할수록 당신의 직장 스트레스 지수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신호다. 이럴 땐 제때 스트레스를 풀어야 건강한 업무 리듬을 되찾을 수 있는 법. 하지만 외부에서 취미 생활을 하자니 소소한 회사 이야기들을 하지 못해 아쉽다. 반면 회식 자리는 친목은 다질지 몰라도 다음날 “역시 남는 게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퇴근 후 동료들과 함께 자기계발도 하고 애환도 풀 수 있는 모임이 어디 없을까. 찾아보면 곳곳에 숨어있는 재미있는 ‘사내 동호회’가 많다. 독특하고 재기발랄한 직장인들의 퇴근 후 세계를 공개한다.
저녁 7시가 되자 퇴근 후 간단히 저녁을 해결한 사원들이 조금씩 테이블에 한 칸씩 둘러 앉았다. 캘리 선생님이 미리 준비한 갈색 포장지를 하나씩 손에 들고 선생님의 지시 사항을 기다렸다. 포장지 안에는 흰색 액자 한 개, 분홍 보라 등 꽃송이들, 직접 손글씨를 받아 쓸 도톰한 카드 10장, 그리고 본격적으로 손 그림을 그려줄 캘리그래피 붓펜이 들어있었다.
●선생님: “캘리그래피는 우리 일상 속에서 많이 볼 수 있어요. 본죽, 설빙, 한우집 등 주변에 간판 브랜드로도 많이 쓰이고, 라면패키지, 아침햇살, 튀김우동 등 식음료 표면에도 많이 봤을 거에요. 그 글씨체가 모두 캘리그래피인데 오늘은 그 기초를 한 번 배워볼게요”
캘리그래피는 서예를 기반으로 한 개성있는 아름다운 서체로 최근 그 개념이 광범위해져 붓을 포함한 여러 다른 재료를 사용하여 표현된다. 글씨를 쓰는 행위 자체가 취미로 받아들여지면서 태교나 악필 교정, 힐링을 목적으로 하는 문화·취미 생활로 많은 직장인들의 선택을 받고 있다.
예시로 적힌 글씨 모양을 한 글자 한 글자를 따라 쓰다 보면 같은 손에서 확연히 다른 모양의 글씨가 나올 수 있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삐뚤빼뚤 심지어 펜 끝에 떨리기까지 하는 글씨를 보다 전문가가 한 획으로 가열차게 쭉 뻗어내는 필체는 일반인이 단 2시간에 따라잡기엔 멀어도 너무 멀다.
선생님의 펜 끝엔 흰 종이 위에 문자가 춤을 추며 말을 걸어오는 듯한 희한하게 사람을 설레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슬프게 축 처지는 글씨가 있는가 하면 톡톡 건드려주는 점 하나에도 글씨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분명 같은 문장임에도 글씨가 드러내는 표정은 천차만별이었다.
문득 예전에 캘리그래피를 처음 봤을 때 생각이 났다. 어린 시절 도서관에 꽂혀있는 책 목록을 쭉 훑어 봤을 때 나름 책을 고르는 기준이 있었다. 책꽃이에 가지런히 꽂혀있는 책들 사이에서 필자 눈에 튀어 보였던 건 제목이 와 닿는 것도, 시대에 유행하는 책도 아니었다. 세로로 꽂혀 그 안에서 몸을 움틀고 있는 글자체, 그냥 컴퓨터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폰트가 아니라 다정하고 정감이 느껴지는 손글씨 폰트였다. 도대체 이런 손글씨는 어떻게 쓰는 걸지 궁금해하며 무심코 지나쳤던 그 캘리그래피. 이젠 하나의 미술 장르로 정착돼 직장인들의 힐링 도구가 되어 있었다
●이 선임: “아니 어떻게 된 게 내 글씨는 왜 이러지?”
●김 선임: “아… 내 글씨체가 이렇게 못생긴 줄 몰랐어!!ㅋㅋ”
●선생님: “줄 노트에 글씨를 쓰는데 가운데 센터를 맞춰서 글을 쓸 때 줄을 끊어서 윗 글씨와 아랫 글씨를 쓰다 보면 글자들 사이사이에 공간이 생길 수밖에 없어요. 그 사이 공간을 늘이고 줄여서 쓰는 걸 ‘테트리스화’한다고 해요. 글자들을 끼워 맞춰서 덩어리 감을 주면 글씨가 예뻐질 거에요”
덩어리감이 무엇을 의미하는진 모르겠지만 문자 윗선과 아랫선을 교묘하게 뒤틀며 무언가 덩어리처럼 보이게 애쓰려고 하니 선생님이 조용히 뒤에서 한 마디 덧붙인다.
●선생님: “자간 간격이 벌어지면 가독성이 깨진다는 걸 명심하세요. 글씨가 잘 읽혀야 하는게 본연적 목표기 때문에 각 세트의 개념을 생각해서 글씨는 쓰는게 포인트에요”
●박 선임: “선생님 제 이름도 하나 적어주세요. 이름으로 연습해보고 싶어요!”
선생님이 한 명에게 다가가 글씨를 적어주자 다른 사람들도 너도나도 자신 이름 석자를 써달라 선생님 주위로 몰려들었다. 흰 종이 위에 예쁘게 써 내려진 이름 석 자를 보고 있자니 평소에 늘 딱딱한 서류 위에 적혀진 이름과 달리 뭔가 자신이 소중해지면서 힐링되는 느낌이 들었다. 이름과 함께 일상에서 쉽게 듣지 못하는 오글거리는 문장들의 향연이 펼쳐졌지만 이상하게 거부감보다 이에 질세라 더 큰 간지런 문장들이 이어졌다. 선생님이 한 획 한 획 보여주는 붓글씨에 저마다 작은 탄성을 지르며 어느새 입가에 즐거운 미소가 띈다.
●박 선임: “아 실전 문장을 뭘로 쓰지? 좀 오글거리고 달콤한거 없나?”
●김 선임: “이거 어때? 나 이사람 작품 많이 봤었는데~ 난 복어야~ 네가 복어싶어~”
●이 선임: “꺄아~~ 오글거려서 못 듣겠다. 그럼 난 이거~. 난 문어야~ 널 너문어무 좋아해”
선생님: “이렇게 꽃을 위에 붙이고 그 아래 가로나 세로로 글씨를 써보세요. 색 펜으로 작은 포인트를 주면…어때요? 확 분위기가 더 살아나죠?”
처음 갈색 봉투에 들어있던 작은 카드를 꺼내 1장씩 글씨를 옮겨본다. 이곳 저곳에서 ‘아 망했어’, ‘선생님…’ 등 애타게 선생님께 SOS를 쳤다. 다들 원데이 클래스로 상점에 진열된 글씨를 연출하는 건 무리일 거라 생각하며 ‘비슷한’ 글씨라도 만들기 위해 노력 또 노력! 한 문장을 열 번 이상 쓰지만 쉽게 늘진 않아 힘이 빠져도 사실 즐겁다. 짧은 순간 자신에게 집중하고 묵힌 감성을 터뜨릴 수 있었던 것만으로 충분한 힐링이 된 것 같다.
거의 밤 9시 20분이 되어서야 모두 만족스럽다는 듯 수업이 끝났다. 예정시간보다 약 20분 더 늦어진 수업이었지만 피로가 확 풀린 듯 다수의 눈은 막 퇴근한 직후보다 초롱초롱 빛나 보였다. 다 모아진 캘리그래피 액자를 보고 있자니 일부 글씨는 바로 팔아도 될 것처럼 완성도 높은 글씨도 있었다. 완성된 캘리그래피는 회사 책상 위에 올려두거나 친구, 가족들에게 선물용으로도 줄 수 있다. 또 꽃을 가미해서 다른 모양의 종이 위에 써 책갈피를 만들거나 디지털화해 개인 홈페이지에 올리는 등 활용도도 높다.
캘리그래피는 빠른 시간에 본인의 글씨가 바뀌는 게 직관적으로 보이고 소품이 되니까 많은 직장인들이 선호하는 편이다. 일의 연장선이 아닌 상황에서 회사 동료들과 온전히 자신을 위한 시간을 쓰고 노래가사, 본인이 좋아하는 명언 등으로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보통은 퇴근 시간, 간혹 점심 시간 클래스도 있다.
대다수의 직장인들이 일에서 아쉬운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저녁 시간을 쪼개는 요즘. 당신은 자신의 강점을 잘 알고 있는가? 혹시 퇴근 후 강점을 찾아 자신의 새로운 가능성을 깨닫고 싶은가? 덩달아 만족스러운 직장 생활을 원하고 있나? 그렇다면 공통의 취미를 가진 동료들과 휴식도 취하고 친목도 도모할 수 있는 ‘직장 사내 동호회’를 오늘 당장 찾아보는 건 어떨까. 더 흥미롭고 열정이 꿈틀대는 직장인 자기계발 사내동호회 이야기, 다음 편에 계속된다.
/정수현·정순구기자 value@sedaily.com
◇‘직장人본색’은 일상에 지친 직장인들이 매일 빡빡하게 쌓인 보고서, 서류 등에서 벗어나 퇴근 후 업무의 재미를 찾을 수 있는 직장 내 ‘사내 동호회’를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대기업, 중소기업, 외국계기업 등 다양한 사내 동호회를 소개하고 직장인들이 어떤 취미생활 및 자기계발을 하고 있는지 저녁 일상을 들여다 볼 예정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