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보영은 지난 17일 서울시 강남구 논현동 한 카페에서 ‘힘쎈여자 도봉순’ 종영 인터뷰를 진행했다. 2년 전 tvN ‘오 나의 귀신님’에 이어 이번 ‘힘쎈여자 도봉순’까지. 지상파가 아닌 곳에서 놀라운 시청률 역사를 쓴 장본인이지만, 겸손함은 여전했으며 신중함은 더 깊어졌다.
배우 박보영이 17일 jtbc드라마 ‘힘쎈여자 도봉순’ 매체 인터뷰에 앞서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사진=지수진 기자
JTBC 금토드라마 ‘힘쎈여자 도봉순’은 선천적으로 어마무시한 괴력을 타고난 도봉순(박보영 분)이 세상 어디에도 본 적 없는 똘끼충만한 안민혁(박형식 분)과 정의감에 불타는 인국두(지수 분)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세 남녀의 힘겨루기 로맨스. 박보영은 극중 모계 혈통에 의해 선천적으로 괴력을 타고난 도봉순 역을 맡아 인생 캐릭터를 경신했다.드라마의 주역인 만큼 그동안 책임감도, 부담감도 컸을 터. 아니나 다를까, 박보영은 결국 종방연 현장에서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고. 스태프들이 말을 안 할 줄 알았는데 결국 다 퍼졌다며 머쓱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특유의 환한 웃음으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원래 작품 끝나고 우는 편은 아니라 안 울 줄 알았는데 울었어요. 다 같이 방송 보고 나서 김원해 선배님이 촉촉한 눈빛으로 안아주시는데 울컥하는 거예요. 작가님도 절 안고 우시고, 또 저 항상 도와주시는 대역 언니도 고생했다고 안아주더라고요. 저도 모르게 서러웠나 봐요. 울면서 집에 가느라고 마무리를 잘 못한 기억이네요.”
왜 그리도 서러웠을까. 아마도 도봉순에게서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리라. 박보영은 본인을 두고 자존감 없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드라마 초반, 자존감 없는 봉순이가 저 같아서 안아주고 싶었다고. 호감 가는 얼굴에 능숙한 연기력까지, 어느 작품을 고르든 자신만만할 것 같았는데 실제 박보영은 생각보다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제가 계획을 세울 때 추상적으로 하는 편이에요. 올해는 ‘나를 좀 더 믿고 사랑해주자’라고 계획했는데 사실 잘 안돼요. 새로운 작품을 받게 돼도 ‘잘 할 수 있겠다’가 아니라 ‘하고 싶은데,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이런 부분이 부족해서 못할 거 같은데’라고 생각한 적이 많아요. 그래서 봉순이에게 더 마음이 쓰였나 봐요.”
걱정이 무색하게도, 이번 작품의 성공은 박보영의 말과 행동에서 일궈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JTBC를 넘어 종편 드라마 통틀어 최고 시청률인 9.668%(닐슨코리아 전국 유료플랫폼 가입가구 기준)를 기록했다. 마지막 회 시청률 역시 8.957%를 차지하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JTBC 내에서도 박보영은 복덩이가 틀림없었다.
“시청률이 잘 나와서 즐거웠죠. 중간에 JTBC 사장님께서 촬영장에 밥차도 주셨고요, 드라마 국장님께서 ‘사람인지라 더 바라게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맛있게 밥 먹으면서 ‘그것은 욕심이십니다’라고 말씀드렸죠. 시청률이 많이 나와서 그저 행복했어요. 감독님과도 서로 눈으로 이야기했죠. 하던 대로만 열심히 하자고. 끝날 때가 되니 아쉬운 게 아예 없지는 않았죠. 그래도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많이 사랑을 받아서요. 만족합니다.”
단순히 높은 시청률 때문에 드라마가 성공했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박보영은 ‘힘쎈여자 도봉순’으로 더 많은 인지도를 쌓았다. 이미 그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알아보는 연령층이 넓어진 것에 뿌듯함을 느낀다고. 이전에는 어르신들에게 ‘차태현이랑 나왔던 걔’, ‘이보영’, ‘박보경’이라고 불렸다면, 이제는 박보영이라는 이름을 정확히 듣게 됐다.
배우 박보영이 17일 jtbc드라마 ‘힘쎈여자 도봉순’ 매체 인터뷰에 앞서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사진=지수진 기자
“한 번은 버스정류장에서 촬영을 하고 있는데, 약국에서 일하시는 언니가 따뜻한 쌍화탕을 주시면서 ‘보영씨, 봉순이 너무 잘 보고 있어요’라고 해주시는 거예요. 제 이름을 아신다는 거에 감동 받았죠. 이 정도면 다 이룬 거 아닐까요.”기뻐할 것은 또 있다. 여성 팬이 훌쩍 늘어난 것. 원래는 성비가 9:1에서 8:2일 정도로 남성이 훨씬 많았다면, 이제는 7:3에서 6:4까지 여성 팬 비율이 올랐다. 모두 도봉순이라는 캐릭터 덕분이다. 도봉순은 수동적이지 않은, 자신의 힘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인물. 스스로를 약하다고 여기거나 남자들에게 기대지 않기에, 요즘 시대에 딱 맞는 캐릭터로 여성들에게 호응을 얻었다. 애초에 박보영이 도봉순을 선택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제가 워낙 체구가 작잖아요. 저도 모르게 실생활에서 느꼈던 것 같아요. 사람들이 약하게 보는 시선이요. 그래서 지금도 사람들이 도와주려고 하면 ‘제가 할게요’라고 혼자 해내려는 게 있어요. 악을 써서라도 하고 만다는 거죠. 시나리오를 보는데 너무 통쾌한 거예요. 치한을 무서워하지도 않고, 손가락 하나 부러뜨리고 멋있게 갈 길 가고. 지하철에서 나쁜 사람을 만나도 실제 제 힘으로는 혼내줄 수 없잖아요. 대리만족을 느꼈죠.”
현실에서 여성이 남성을 힘으로 제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박보영은 드라마를 통해 해냈다. 만화적 요소가 다분한 설정이다. 따라서 힘을 드러내는 방법에 있어서도 많은 고민이 따랐다. 시청자들이 ‘어? 웃기네?’하면 괜찮지만 ‘이게 뭐야’라고 하면 실패다. 적정선에 대한 논의가 많이 필요했다.
“어느 정도로 하실 거냐고 물었는데 감독님이 확실히 말씀하시더라고요. 주성치 영화처럼 했으면 좋겠다고, 확실한 B급으로 가자고요. 어중간하게 할 거면 차라리 확 가자는 뚝심이 있으시더라고요. 연기하면서도 그런 점이 도움됐어요. 처음에는 어느 정도로 날아가면 좋을지, 리액션을 어떻게 할지 많이 고민했죠. ‘이거는 힘 많이 안 들여도 되니까 그냥 갈게요’라고 하거나 ‘차 돌리는 거는 힘을 좀 써야 되니까 이만큼 힘 줄게요’라는 식으로요.”
드라마 단골 요소인 17:1 패싸움도 도봉순에서는 달랐다. 2배 가까운 수치인 30:1 싸움이 벌어졌다. 물론 도봉순이 1이다. 액션 전문 배우라기에는 체구가 작은 박보영은 ‘팔다리가 길어야 멋있는데 신체적 한계가 있어서 걱정을 많이 했다’며 ‘셀프 디스’를 선보였다. 물론 시청자 입장에서는, 짧은 팔 짧은 다리로 툭툭 치는데 악당이 날아가니 통쾌함이 두 배였다.
박보영은 단순히 캐릭터로서 힘이 센 것만이 아니다. 배우들 중 가장 많은 분량, 가장 큰 역할을 맡으며 타이틀롤로 당당히 섰다. 물론 부담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신보다 후배인 박형식을 다독거리면서 본인까지 위로했다. ‘부담은 모두 갖는 것이다’, ‘혼자가 아니라 다 같이 만들어 가는 작품이니 잘 해보자’며 토닥였다. 한편으로는 선배들에게 큰 도움을 받았다. 너무도 든든한 명품 조연들의 연기에 한 시름 놓을 수 있었다. 또한 선배들은, 까딱하면 해이해질 수 있는 상황에서 스스로를 채찍질하게 만들었다.
“촬영이 뒤로 갈수록 너무 지치니까 저도 모르게 ‘아 너무 힘들다’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김원해 선배님이 오돌뼈 연기를 하시면서 저에게 ‘보영아, 나 너랑 합 맞출 때 너무 신나고 재밌다’고 하시는 거예요. 속에서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왔어요. 당시에는 촬영을 해야 되니까 나름 잘 참은 것 같은데, 집에 가니 이 감정을 어찌해야 할 지 모르겠더라고요. 일기장에 ‘오늘 김원해 선배님이 이런 말을 해주셨다. 내가 얼마나 지친 줄 알고, 이 타이밍에 어떻게 이런 말씀을 해주셨을까. 선배님과 함께한 게 선물 같다’고 썼어요. 선배님께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배우 박보영이 17일 jtbc드라마 ‘힘쎈여자 도봉순’ 매체 인터뷰에 앞서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사진=지수진 기자
이 외에도 모든 장면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기본 진리를 되새기는 기회도 있었다. 박보영은 워낙 여기저기 안 나오는 장면이 없고, 가장 큰 역할을 해야 하기에 체력적으로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저도 모르게 중요한 장면과 안 중요한 장면을 구분하기 시작한 것. 체력소모가 너무 커서였지만 ‘오늘은 앞부분에 중요하지 않은 게 있어서 다행이다’라는 생각도 했다고.“그러던 중 김원해 선배님과 임원희 선배님 보면서 반성했어요. 그분들은 항상 아이디어를 가지고 오세요. 한 장면도 그냥 넘어가시는 게 없어요. 30:1로 싸울 때 임원희 선배님이 자주색 장갑을 끼고 나오시거든요. 선배님이 직접 준비하신 거예요. 싸우다가 당할 때도 뭔가 포인트를 주고 싶으셨던 거죠. 그걸 보면서 지금 내가 뭐라고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나누고 있나 반성했습니다. 데뷔 초에 하나하나 열심히 했던 걸 다시 생각하게 됐죠. 선배님들의 존재는 정말 커다란 힘이 됐고, 가르침도 많이 받았습니다.”
이제 박보영에게 남은 고민이 있다면 캐릭터 변신이다. 그동안 ‘시선 1318’, ‘미확인 동영상’, ‘피끓는 청춘’, ‘경성학교’, ‘돌연변이’ 등 다양한 장르와 역할을 했지만 대중들의 뇌리에 깊게 남은 ‘과속스캔들’, ‘늑대소년’, ‘오 나의 귀신님’ 때문인지 변신의 폭이 크지 않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번 ‘힘쎈여자 도봉순’의 성공으로 ‘러블리 로코’ 이미지가 굳어질 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있다.
“캐릭터 고민은 매번 해요. 없어지지는 않을 것 같아요. 제가 한순간에 성형수술을 해서 바뀌지 않는 이상은요. 한계는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어떤 한계를 가졌는지도 아니까, 이제는 그걸 받아 들여야 되는 것 같아요. 항상 안 해봤던 캐릭터를 해보는 게 목표라고 했거든요. 이젠 욕심인 것 같아요. 어떤 역할이든 내가 할 수있는 것을 하려고요. 시나리오가 많이 들어올 거라고 생각들 하시는데, 사실 그렇지 않아요. 할 수 있는 게 많이 없어요. 현실과 좀 타협할 때가 왔다는 생각도 가끔 들어요.”
그렇다고 고정된 역할만 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박보영의 말에 따르면 ‘정말 섹시한 캐릭터’는 본인에게 정말 어울리지 않지만, 그 정도만 아니면 할 수 있는 선에서 많은 장르와 캐릭터를 시도하고 있단다. 하면서도 ‘이건 안 맞는구나’, ‘이런 모습은 안 보고 싶어 하시는구나’하고 느끼기도 하고, 연기적인 부분에서 ‘이런 게 한계구나’ 실감도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도전하고 싶다고.
부족한 부분을 인정하는 박보영은 성숙하고 아름다웠다. 자존감이 낮다는 것도, 평소 부정적으로 생각한다는 것도 가감 없이 털어놨다. 달리 생각해보면, 결점을 드러낸다는 것 자체가 성장 동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채워야 할 부분을 직시한 배우이기에 이만큼 성장하고 성공할 수 있다. 도봉순에서 한 단계 더 성장한 박보영은 진정한 ‘힘 센 여자’의 길을 그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신의 배우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 사고방식을 전했다. 그와 인터뷰를 나눈 기자도, 인터뷰를 읽는 독자도 모두 마음속에 새길만한 마음가짐이다.
“제가 찾은 긍정의 해답은 ‘나의 시간은 천천히 간다고 생각하자’예요. 저에게 주어진 시간이 남들보다 조금 더 많다고 생각하자는 거죠. 예를 들어 10대에 할 수 있는 역할을 원래는 10년만 할 수 있다면, 저는 15년씩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어요. 저 혼자 조급해봤자 아무 소용없잖아요?”
/서경스타 양지연기자 sestar@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