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 기울어진 투표장

한영일 성장기업부 차장





얼마 전 정부 부처의 한 고위 공무원과 담소를 나눴다. 주제는 자연스레 며칠 남지 않은 19대 대선으로 옮겨갔다. 누가 당선될 것인지, 투표율이 어느 정도일지 등 소소한 방담을 이어갔다. 대선 때 쉬면서도 투표를 하지 않는 유권자들을 어떻게 투표장에 이끌어낼 수 있느냐 하는 아이디어도 나눴다. 투표소에서 투표 인증서를 받아 회사에 제출하면 유급휴일, 그렇지 않으면 무급휴일로 해야 한다는 나름 획기적인(?) 방안까지 내놓으며 서로 웃었다.


며칠 뒤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중소기업들의 ‘5월 황금연휴 휴무 계획’을 조사한 자료를 보고 공무원과 기자의 투표율 아이디어는 세상 물정을 모르는 ‘배부른 소리’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상당수의 중소기업은 이번주 말부터 최장 11일에 달하는 연휴를 제대로 쉬지 못할 지경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임시공휴일로 지정된 오는 5월9일 대선일에도 휴무하겠다고 밝힌 곳은 49%뿐이다. 중소기업 두 곳 중 한 곳은 5년에 딱 한 번 주어지는 ‘주인 될 기회’를 대기업 납품기일에 양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기업, 공무원, 사무직 근로자들은 ‘선거일=휴일’을 당연한 일로 여기지만 같은 시간 중소기업 공장은 쉼 없이 돌아간다는 얘기다.

국내 전체 근로자 중 88%가 중소기업에서 일한다. 어림잡아 1,500만명. 이 가운데 절반인 750만명은 대선이 치러지는 날에도 일터로 향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물론 정치의식이 뛰어나거나 애국심(?)이 넘쳐나는 일부 ‘중기씨’는 이른 아침에 소중한 한 표를 투표함에 넣은 뒤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일터로 향할 것이다. 하지만 이번 대선의 총유권자(4,239만명) 가운데 17%가 정상적인 투표권을 보장받지 못한다는 현실은 부정할 수 없다.

올해 대선은 주자마다 유난히 중소기업 정책을 경쟁적으로 쏟아내며 ‘중기 대통령’이 되겠다고 한다. 중소기업이 일자리 창출의 주역이자 4차 산업혁명의 선두에 서야 한다고 외친다. 중소기업부 설치부터 대기업과의 공정거래, 중소기업 임금 보전, 소상공인 권익 보호…. 일일이 손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중소기업용 공약이 후보들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중기인들은 환호한다. 가뜩이나 대기업과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불공정 게임을 하고 있다고 여기는 수많은 중소기업이 앞으로는 뭔가 바뀌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품을 법하다.

하지만 새로운 경제 시스템의 주역이라는 중소기업의 상당수가 대선일에도 투표 대신 공장을 돌려야 한다니.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자신과 관련된 정책을 목놓아 외치는 대통령 후보를 정작 당사자들이 아닌 대기업이나 공무원, 사무직 종사자들의 투표로 당선시켜야 하니 말이다. 자가당착이다. 차기 대통령이 누가 되든 중소기업이 처한 ‘기울어진 투표장’부터 바로 세워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차기 정부가 해야 할 중기 정책의 시작이다. hanul@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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