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이뿐이랴. 정말 혀를 ‘끌끌’ 차게 할 수밖에 없는 장면들이 주변을 돌아보면 부지기수다. 오랜만에 만난 커플 같은데 한결같이 자기 스마트폰만 연신 들여다보고 각자의 세계에 갇혀 있는 커플이며 음악회든 영화관이든 심지어는 예배하러 와서도 스마트폰이 “나 좀 건드리고 만져주세요” 하면서 온몸을 떨면 여지없이 큰소리를 치며 나가는 이들과 마주친다. 안하무인 그 자체다.
모두가 자신의 선택만 옳고 자신의 의견만이 ‘가장 중요한 가치’이며 ‘궁극적인 가치’라고 소리 지르는 형국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자기 주장이 범위를 확대해 극단적인 공동체적 상대주의로 진화한 양상을 보인다는 점이다. 이른바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신념이나 양식에 입각한 논리와 내용만이 진리라고 한껏 목소리를 높인다. 자기 공동체의 방식으로 행동하고 말하는 것만이 참이기 때문에 타 공동체의 입장에 대해서는 이해하려는 자세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때로 정말 극단적인 자세를 보이는 공동체나 개인들의 경우에는 아예 자신이나 자기 공동체의 입장과 다른 것은 뿌리째 뽑아버려야 하는 대상으로 대하는 심각한 태도도 종종 발견한다. 일차적으로 자기중심성에 함몰돼 타인과 다른 공동체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그다음 차원인 협력이라든가 공동선 실천 같은 것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일인 것임이 분명하다.
오래전 한국 기독교계의 존경받는 원로 한 분으로부터 공동체가 발전하고 미래가 있으려면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에 세 가지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첫 번째는 상호이해, 두 번째는 상호협력, 그리고 두 가지를 바탕으로 한 상호실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따져보니 ‘이해·협력·실천’이라는 세 단계는 공동선을 추구하는 현장이라면 어디에서나 적용돼야 할 사안이라는 생각이 들어 크게 공감했었다.
사실 내 목소리가 크면 만족하고 그것이 바로 진리라고 인식해버리는 풍토 속에 자기 목소리를 높이기보다 먼저 자세를 낮춰 이해하고 협력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공통의 목적을 향해 한마음으로 달려가는 사랑의 자세를 갖는 것이 쉽고 녹록한 일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공동체 내에서 이 일이 선행되지 않는 한 그 공동체의 미래는 암담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몰이해, 의도적 거부, 실행 불가능할 것이 분명해 보이는 공약(空約)들이 난무하는 19대 대통령선거 과정을 보면서 그분의 말씀이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아파트 벽에 붙어 있는 선거후보 벽보를 마주해 ‘이해·협력·실천’을 진지하게 당부해보지만 사진 속 후보들은 그저 웃고만 있다. 이상화 드림의교회 담임목사·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사무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