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맨위 사진)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지난달 29일 광주 충장로 유세에서 엄지를 들어 보이고 있고 안철수(가운데 사진) 국민의당 후보는 지난달 24일 광주 전남대 후문 앞에서 인사를 하고 있고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는 1일 광주 송정역 광장에서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한민국 정치지형에서 호남은 40년 넘게 야도(野都)로 살아왔다. 5·6대 대선이 치러진 1960년대만 해도 호남은 야당 후보보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더 많은 표를 안겨다 줄 정도로 별다른 지역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집권세력이 불을 지핀 영호남 지역갈등으로 타오르기 시작한 호남 민심은 직선제가 부활한 13대 대선 이후 줄곧 호남 기반의 야권 정치인에게 몰표를 던져줬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될 때에도 호남에서만 90%가 넘는 득표율을 거뒀다. 비록 정권교체에 실패했지만 지난 17·18대 대선 역시 호남은 야당 후보에게 80~90%의 표를 몰아줬다.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이번 대선에서는 46년 만에 호남의 전략적 몰표가 사라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지지율 1·2위를 달리는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 모두 호남에 정치적인 뿌리를 둔 야권의 대선후보인 동시에 호남 출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유력 야권 후보에게 표를 몰아주던 호남 유권자들의 한결같은 표심에도 균열이 생기고 있다.
현장에서 만난 호남 유권자들 사이에서도 이 같은 분위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광주에 거주하는 50대 유권자 정모씨는 “예전 같으면 무조건 민주당 후보를 찍었을 텐데 이번에는 1번(문재인)과 3번(안철수) 중에 고민”이라며 “누굴 뽑을지는 투표 날이 돼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전했다. 이를 입증하듯 한국갤럽이 지난달 25~27일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아직 지지후보를 정하지 못했다’는 부동층은 광주·전라지역(18%)이 전국에서 가장 높게 나타났다.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한 일부 유권자들을 제외한 호남의 표심은 세대별과 지역별로 극명하게 엇갈렸다. 주로 도시지역에 거주하는 2040(20~40대)의 젊은 세대들은 단연 문재인 후보에 대한 지지도가 높았다.
광주에 거주하는 손모(34)씨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못다 이룬 뜻을 이어갈 적임자는 문 후보라고 생각했다”며 “언론에서 제기한 여러 의혹도 그렇고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안 후보의 학제개편안도 별로 믿음이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유권자들은 문 후보를 지지하는 이유로 수권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담양에 사는 한 40대 유권자는 “문 후보는 노 전 대통령과 국정을 함께 운영한 경험이 있어서인지 뭔가 든든해 보인다”며 “더욱이 지금 같은 비상시국에서는 원내 제1당의 후보를 찍는 게 국정 안정에도 도움이 될 것 같다”고 전했다. TV 토론은 젊은 층 사이에서 후보 선택을 가르는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는 듯했다. 20대 대학생들은 목포역 광장의 안 후보 유세차를 보고는 “MB 아바타가 온다”며 비아냥대기도 했다.
하지만 60대 이상 장년층 사이에서는 문 후보의 발목을 잡아온 ‘호남 홀대론’과 ‘반문 정서’가 여전했다. 목포에서만 60년 넘게 살아온 유모(72)씨는 “노무현한테 표를 몰아줘 대통령을 만들어줬지만 전라도랑 목포에 뭐 하나 해준 게 없다”며 “밤낮으로 자꾸 말 바꾸는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면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옆에서 그 말을 듣던 60대 여성도 “나도 문재인 찍겠다는 우리 자식들하고 한바탕 싸움을 했다. 안철수가 안 되면 이곳에 좋은 직장들도 안 들어오고 결국 전라도는 거지가 될 것”이라며 맞장구쳤다. 반면 안 후보는 ‘정치인 때가 덜 탔다’ ‘참신하고 깨끗하다’는 이유로 장년층의 높은 호감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일부 유권자들은 “주변에 안철수 지지자들이 많은데 이상하게 여론조사 결과는 낮게 나온다”며 여론조사에는 잡히지 않는 ‘샤이 안철수’들이 적지 않다고 전했다.
팽팽하던 양강 구도에서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와 심상정 정의당 후보는 이번 대선의 새로운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홍 후보가 최근 대구경북(TK) 지지를 등에 업고 가파른 상승세를 이어가면서 견제 심리가 발동한 호남 표심이 차츰 문재인 지지로 무게중심을 옮겨가는 분위기다. 전주에서 만난 40대 택시기사는 “요즘 손님들의 얘길 들어보면 다시 문재인 지지로 쏠리고 있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20~30대를 중심으로 양강의 틈새를 파고들고 있는 심 후보도 호남 표심을 가를 또 다른 변수로 지목되고 있다.
/광주·전주·목포·담양=김현상·빈난새기자 kim0123@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