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서 큰 존재감은 없었던(...) 아라곤
비고 모텐슨은 1980년대부터 배우 생활을 했던 대기만성형 스타죠. 심지어 제가 좋아하는 알 파치노의 영화 ‘칼리토(1993년작)’에도 조연으로 출연했었다는 걸 최근에야 알았습니다. 어쨌든 반지의 제왕에서 얼굴을 제대로 알린 그는 이후부터 사랑스런 영화들에서 주연으로 본격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꼭 추천하고픈 영화 두 편, ‘폭력의 역사(2005년)’, ‘이스턴 프라미스(2007년)’가 대표적입니다. 둘 다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의 작품이기도 합니다.
폭력의 역사
이스턴 프라미스
두 영화는 일단 재밌습니다. 기승전결이 뚜렷하고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데다 피튀기는 격투씬도 비춰줍니다. 열등감 덩어리의 못난 마피아 두목 아들내미(;;;)로 분한 뱅상 카셀, 모터사이클을 타고 다니며 선한 의지를 관철하는 나오미 왓츠도 멋지구요. 두 영화는 너무도 제 취향인 데다가 노련하게 잘 만들어주셔서 볼 때마다 왠지 감독께 큰절이라도 해야할 것 같은 느낌마저 듭니다(?!).
저도 모터사이클 좀 타는데...왜 때문에 나오미 왓츠만 혼자 멋지단 말입니까...OTL
하지만 두 영화의 주인공이 비고 모텐슨이 아니었다면, 이토록 좋지는 못했을 것 같습니다. 과연 이것은 저만의 사심인 걸까요?
‘이스턴 프라미스’의 한 장면. 수트빨이 너무나 참했더랍니다.
물론 수트빨은 비고 모텐슨의 극히 일부분일뿐입니다(엄근진). ‘폭력의 역사’에서 그의 연기력은...쩔어줍니다.
두 영화에서 그는 소도시의 평범한 중년남자, 러시아 마피아 조직원을 연기합니다. 그런데 두 캐릭터 모두가 마치 타고난 피부처럼 비고 모텐슨과 너무 잘 맞는 거죠. 비고 모텐슨의 얼굴은 평범한 듯하면서도 자상하고, 반대로 끝도 없이 잔혹합니다. 그러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더 로드(2009년)’에서 절망적인 아버지에 빙의되기도 했죠. ‘더 로드’는 아쉽게도 원작의 아우라엔 못 미쳤지만 비고 모텐슨이 열일하며 별점 1개쯤은 더 얹어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반지의 제왕은 비고 모텐슨을 널리 알려줬단 의의는 있지만 사실 아라곤은 그냥 아무나 해도 되는 역할입니다. 실제로 원래 다른 배우가 아라곤을 맡을 예정이었지만 막판에 비고 모텐슨에게 ‘어쩔 수 없이’ 돌아간 것이기도 했죠. 하지만 그것은! 비고 모텐슨이란 배우의 중대한 낭비였다고! 저는 외쳐봅니다. 사심 잔뜩이라 죄송하지만요.
애정을 가득 담아, 최근작 ‘캡틴 판타스틱’도 챙겨봤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속세를 떠나 산 속에서 사는 그는 아이들에게 엄청난 지적·육체적 훈련을 시켜왔습니다. 덕분에 아이들은 크리스마스 대신 노암 촘스키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초끈이론(묻지 마세요 저도 모릅니다…)을 공부하고 모택동에 대해 토론하다가 단도를 쥐고 사슴을 사냥하며 맨손으로 암벽을 등반합니다.
아역 배우들도 매력이 넘칩니다
이 영화에서 비고 모텐슨은 야성미 넘치다가도 어느 순간 고민하고 흔들리는 아버지로 또다시 빙의합니다. 틈틈이 시, 사진, 회화 등 다방면에서 작가 활동을 이어 올만큼 지성파 배우인 비고 모텐슨은 ‘캡틴 판타스틱’ 시나리오를 받아보곤 영화의 문제의식에 깊이 동감하며 덩실덩실 좋아했다고 합니다. 너무 매력적이지 않습니까? 쓰다 보니 제 머릿속 ‘팬심의 방’에서 비고 모텐슨과 비슷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매즈 미켈슨이 떠오르네요. 저는 이만 매즈 미켈슨의 영화 ‘더 헌트’를 재감상하러 사라져 보겠습니다. 덕심 충만한 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유주희기자 ginger@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