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만명의 주민들이 이때 배를 타고 북한을 탈출했다. 그러나 철수작전 마지막 날인 12월23일까지도 많은 피란민이 부두에 남아 있었다. 남은 배가 거의 없어 절망한 피란민들에게 손길을 내민 마지막 배가 있었다. 화물선 ‘메러디스빅토리호’였다. 화물들은 버리고 민간인들을 싣기로 한 것이다. 당시 레너드 라우 선장의 결단으로 1만여명의 피란민이 추가로 생명을 건졌다. 그때는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크리스마스 전날 ‘흥남의 기적’이 67년 뒤 대한민국 역사 전환점의 발단이 됐다는 사실을. 2017년 5월9일 대한민국의 제19대 대통령에 당선된 문재인의 부친과 일가족이 메러디스빅토리호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학창 시절.
△가난한 피란민의 아들, 빈부격차 문제에 눈을 뜨다
흥남 출신 문용형씨 일가가 메러디스빅토리호를 타고 3일간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곳은 경남 거제도 피란민 수용소였다. 문씨는 청년 시절 지역 명문이던 함흥농고를 나온 수재였다. 일제와 북한 공산당 치하에서는 흥남시청 농업과장을 지낸 엘리트였다. 그러나 연고도 없던 거제도에서 그가 구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수용소 노무직뿐이었다.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자 아내 강한옥씨는 행상에 나섰다. 거제에서 부산까지 계란 등을 머리에 이고 나가 팔고는 했다. 문재인은 일가의 피란민 생활 3년째인 1953년 태어났다. 본적은 부산으로 돼 있지만 실제 태어난 동네는 거제군 거제면 명진리였다고 한다.
문용형씨 일가는 부산으로 이사했다. 이곳에서도 문재인의 유년기와 청년기는 불우했다. 부친이 노무 일을 그만두고 양말 도매업에 뛰어들었는데 부도를 내 빚더미에 앉게 됐다. 모친이 옷가지를 팔거나 연탄배달 장사도 해봤지만 가난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문재인은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재학 시절 인근 성당에서 나눠주는 분유·옥수수가루 등 미군의 무상원조 식량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처지였다고 한다.
초등학교 5학년까지도 성적표에 ‘우’ ‘미’ ‘양’ 투성이던 문재인이 수학에 두각을 나타낸 것은 6학년부터였다. 당시 부산 명문이던 경남중학교에도 합격했다. 입학 후 문재인은 한층 더 빈부격차를 절감했다. 경남중 재학생들이 대체로 잘사는 동네에 있어 씀씀이가 가난한 집 아이들과는 달랐던데다 대부분 입학 전 학원에서 영어를 배워 문재인과는 학업 격차가 컸다. 기가 죽은 문재인은 동급생들과 어울리기보다는 학교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기를 좋아했다. 덕분에 책 읽는 재미를 알게 됐다고 한다. 점차 탐독의 영역이 확대돼 지식인들이 애독했던 월간 잡지 ‘사상계’를 읽고 사회의식에 눈을 뜨는 단계에 이르렀다.
문재인(뒷줄 가운데) 대통령 학창 시절.
△문제아, 재수생, 시국사범...방황하는 청년 수재탐독으로 생각도 깊어지던 문재인이 방황기에 접어든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무렵이었다고 한다. 음주와 흡연을 시작하고 이른바 ‘노는 친구’들과도 어울리게 됐다. 결국 학내에서 문제아로 찍히고 만다. 성적은 상위권이었지만 일반 독서나 교우관계를 중시하다가 입시준비는 뒷전이 됐다. 그 결과 상위권 대학의 법대 등을 겨냥했던 입시에서 낙방하고 만다.
마음을 다잡은 문재인은 재수를 준비했다. 한 명문학원에 1등으로 입원했는데 어느 날 경희대 측으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다. 4년 전액 장학금의 약속이었다. 가난했던 문재인은 여기에 응해 1972년 법대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그러나 학업에만 정진하기에는 시절이 하수상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장기집권을 위한 3선 개헌 유신을 선포한 것이다. 유신체제는 기존의 법 체계를 무력화했다. 문재인은 법학에 대한 회의에 빠져들며 사회적 저항의식을 키우기 시작했다. 특히 그 무렵 리영희 한양대 교수가 쓴 ‘베트남전쟁’ 논문을 읽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베트남전과 월남 패망을 둘러싼 초강대국의 숨겨진 역학을 보여준 그 논문을 읽은 후 사회과학을 탐독하게 됐고 ‘의식화됐다’고 문재인은 저서 등을 통해 술회하고 있다.
유신에 반대하는 학생운동에 본격 투신한 문재인은 1975년 구속·투옥되고 학교에서 제적당했다. 학교 측의 복학처분은 1980년이 돼서야 이뤄졌다.
문재인(앞줄 가운데) 대통령이 경희대 재학 시절 친구들과 찍은 사진.
△평생의 반쪽을 만나다문재인은 경희대 3학년생 시절 평생의 인연을 만난다. 경희대 음대생 김정숙씨다. 2년 후배였다. 첫 만남은 5월 법대 축제에서였다. 축제 파트너가 된 김씨에게 호감을 갖게 된 문재인이었지만 곧바로 구애하지는 못했다. 당시에는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고 한다. 가끔 교내에서 눈인사를 나누는 사이로 지내던 두 사람은 1975년 4월 경희대 비상학생총회를 기점으로 가까워진다. 당시 문재인이 총회 후 교내시위를 하다가 최루탄에 맞아 실신하자 김씨가 달려와 얼굴을 닦아주며 정신을 차리게 도와줬다고 한다. 얼마 뒤 구치소에 수감된 문재인을 김씨가 면회를 왔다. 문재인이 야구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찾아와 신문 야구 기사를 보여주며 위로해주던 김씨에게 문재인은 ‘귀엽다’고 느끼며 한층 더 가까운 사이로 발전하게 됐다.
문재인(왼쪽)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가 연예하던 학창 시절.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숙 여사와 결혼식을 치르는 모습.
문재인 대통령이 부인 김정숙 여사, 자녀들과 단란한 한때를 보내던 시절.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가 경남 양산에서 단란했던 한때를 보내는 모습.
두 사람의 연애는 그야말로 ‘면회 데이트’ 연대기라 할 만했다. 김씨는 문재인이 출소 후 강제 징집돼 입대하자 군부대로, 전역 후 전두환 정권에 맞서다 다시 투옥되자 구치소로 면회를 다니며 장거리 연애를 했다고 한다. 그렇게 인연을 쌓은 두 사람은 문재인이 사법연수원 연수생 시절 백년가약을 맺었다. 현재는 아들 준용씨, 딸 다혜씨를 슬하에 두고 있다. 전두환 정권 시절 강제징집된 문재인(오른쪽) 대통령이 특전사 동료들과 기념사진을 찍은 모습
강제징집 당했던 문재인 대통령이 특전사 시절 완전군장을 한 모습.
△옥중 사시합격, 인권변호사로 첫발, 노무현과 ‘운명’적 만남문재인이 사법시험 2차 관문을 넘은 것은 1980년 옥중에서였다. 그해 사시 2차 시험을 치른 문재인은 얼마 후 정두환 정권이 선포한 계엄령 등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유치장에 갇힌다. 그런데 구속 후 20여일쯤 됐을 무렵 사시 합격 소식을 접한 것이다. 다행히 미결수 신분이어서 군사재판에 회부되기 전 석방돼 2차 시험 합격 취소를 면할 수 있었다. 당시 육사 1기 출신의 경희대 대학원장 김점곤 교수가 적극적으로 구명 운동을 해준 덕분에 석방이 됐을 것으로 문재인은 회상했다. 이후 3차 시험도 통과하면서 사시 22회로 법조계에 등단한다. 동기 합격생으로는 박원순 서울시장, 조배숙 국민의당 의원, 이귀남 전 법무장관, 박시환 전 대법관, 송두환 전 헌법재판관, 고승덕 전 한나라당 의원, 이한성 전 새누리당 의원, 함승희 강원랜드 대표 등이 있다. 동기들 간 사이가 돈독하다고 한다.
문재인은 사법연수원 시험에서 차석을 차지했다. 연수원생 시절 법무부장관상도 받았다. 그런데도 지망했던 판사직에 임용되지 못했다. 학생운동권이라는 딱지 때문으로 추정된다. 다만 임용이 좌절된 것은 “외압 때문은 아니었다”고 문재인은 되짚었다. 단지 당시 대법원의 시대에 뒤처진 결정이었다고 그는 평가하고 있다.
사법연수생 시절 문재인(왼쪽) 대통령이 사시 22회 동기인 박원순 서울시장과 나란히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문재인은 연수원 생활을 마친 후 연수원동기인 고 조영래 변호사의 주선으로 ‘김앤장’ 등 유명 법무법인을 소개받았다. 그러나 부산으로 귀향하기로 하고 현지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며 민변의 일원으로도 활동했다. 부산에서 당시 변호사로 활동하던 고 노무현 대통령과 인연을 맺게 된다. 두 사람은 함께 법률사무소를 운영하면서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다. 30여년 인연의 시작이었다. 문재인을 훗날 저서에서 “나를 변호사로 되게 한 그 모든 과정들이 결국은 노무현 변호사를 만나기 위해 미리 정해진 운명적 수순처럼 느껴진다”고 술회했다. 문재인(왼쪽) 대통령의 변호사 시절 모습.
△참여정부 1호 민정수석, 그리고 마지막 비서실장“당신들이 나를 정치로 나가게 했고 대통령을 만들었으니 책임져야 할 것 아니요.”
2003년 1월13일 사직동의 한 음식점. 노무현 당시 대통령의 목소리가 울렸다. 배석한 문재인 등을 향한 발언이었다. 참여정부의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을 맡아달라는 노 대통령의 요청에 문재인이 답이 없자 노 대통령이 재차 종용한 것이다. 문재인은 대선 당시 민주당 당적 없이 부산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아 노 대통령의 당선을 도왔으나 정치에는 뜻이 없었다고 한다. 더구나 자신은 국정경험도 없는 터였다. 그래서 ‘민정수석 자리를 맡길 만한 사람이 당신 말고는 달리 없다’는 노 대통령의 요청에도 이날 즉답을 하지 않고 부산으로 돌아왔다. 장고는 일주일간 이어졌다. ‘군림하지 않는 청와대’를 만들기 위해 검찰을 장악할 의사가 없다는 뜻을 보이려는 게 노 대통령의 뜻이라고 헤아리게 됐다. 그래서 비검찰 출신인 자신을 민정수석으로 앉히려는 거라고 짐작하게 됐다. 의중을 알게 되고 나선 고사를 하기 어려워졌다고 한다. 그래서 1~2년만 하고 변호사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에 수락했다고 한다.
당시 노 대통령에게 문재인은 두 가지를 요청했다고 한다. “민정수석으로 (제 직분은) 끝내겠습니다” “정치하라고 하지 마십시오”.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민정수석 등을 거쳐 대통령실장을 역임하던 문재인 대통령 모습.
문재인 대통령이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참모로 보필했던 노무현 당시 대통령과 대화하는 모습
민정수석을 맡은 문재인은 검찰·국정원·감사원 등 권력기관 개혁에 집중했다. 4대 권력기관 중 하나인 국세청장에는 자신과 안면조차 없는 이용섭 당시 관세청장을 추천하는 결단을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약 1년 후 건강을 이유로 민간인 신분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실질적인 이유는 개혁에 반발하고 끊임없이 참여정부를 공격한 정치권과 언론 일각에 대한 회의감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지인들은 전하고 있다. 사임 후 국내외 여행을 다니며 심신을 회복하던 중 노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식을 듣게 됐다. 당시 네팔 카트만두를 여행하고 있던 문재인은 급거 귀국해 노 대통령을 돕기 위한 변호인단을 꾸려 간사를 맡았다. 탄핵 위기를 극복하고 나선 청와대로 복귀해 시민사회수석을 거쳐 민정수석을 맡았다가 2006년 5월 사임하고 당시 여당의 지방선거를 도우러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2007년 3월 노 대통령의 요청을 받고 청와대에 복귀해 마지막 비서실장으로 참여정부 임기를 마쳤다.
노무현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 때 상주를 맡아 장례식을 진행하는 문재인(왼쪽)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 서거, 불가피한 정계입문, 두 번의 대권 도전노무현 대통령이 2009년 서거하자 문재인은 상주를 맡았다. 이후 설립된 ‘노무현재단’에서는 초대 이사장인 한명숙 전 총리가 서울시장 출마로 물러나게 되자 불가피하게 이사장직을 승계하게 됐다. 노 대통령 서거 후에도 문재인은 한동안 정계 진출을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2009년 한명숙 총리가 명진 스님, 리영희 교수 등과 함께 문재인을 찾아 양산시 국회의원 재보궐선거 출마를 권유했다.
그런 그를 설득한 것은 참여정부와 인연이 있었던 지인들이었다고 한다. 이명박(MB) 정부에 정권을 넘겨준 후 민주진영의 재집권을 도모할 인물을 찾기 힘들게 되자 문재인은 지인들로부터 결단을 요청받았다고 한다.
새정치민주연합의 당 대표로 선출되던 당시의 문재인 대통령 모습
2012년 총선에서 당선 되기 전 선거운동을 하며 부산 사상구 일대를 누비던 문재인 대통령.
결국 2012년 문재인은 총선에 출마해 당선됐고 곧이어 대선에 출마했으나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후보에 3.53%포인트의 득표율 차이로 석패했다. 이후 새정치민주연합의 당 대표를 맡아 후신인 더불어민주당 대표로 지난해 1월 당직을 마쳤다. 지난해 11월 박근혜 당시 대통령에 대한 탄핵 국면이 시작되자 당의 상임고문으로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탄핵 인용 후에는 당내 대선후보 경선에서 안희정 충남지사, 이재명 성남시장, 최성 고양시장을 압도적인 표차로 제치고 대선 본선에 나와 5월9일 선거에서도 승리했다. /민병권기자 newsroom@sedaily.com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기 전인 지난 7일 충북 충주시 성서동을 찾아 대선후보로서 유세를 벌이는 모습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여사가 9일 당선되기 전 서울 연희로 제3투표소에서 서울 연희로 제3투표소에서 투표를 하고 나와 손을 흔들며 시민들과 인사하고 있다./송은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