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욱진 ‘가족도’ 1972년작, 캔버스에 유채, 7.5x14.8cm,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소장 /사진제공=장욱진미술문화재단
유학 등 불가피한 이유로 가족들을 멀리 보내고 홀로 남아 생계를 책임지는 ‘기러기 아빠’가 일상어로 쓰이기 훨씬 전, 일찍이 ‘까치 아빠’를 자처한 이가 있으니 바로 화가 장욱진(1917~1990)이다. 통도사 암자 앞에서 만난 스님이 “뭐 하는 사람이오?” 묻자 “까치 그리는 사람”이라며 선문답을 주고받다 ‘비공(非空)’이라는 법명을 받은 일화에도 등장하듯 장욱진은 까치를 즐겨 그렸다. 까치 혹은 참새로도 보이는 줄지어 나는 4마리 새를 두고 부부와 두 아이, 혹은 네 명의 딸이라는 등 해석이 분분하지만 꼭 누구를 몇이나 그린 것인지는 중요치 않다. 화가는 식구가 다 모여 같은 곳을 보며 한 곳을 향해 날아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흡족했다.
네 가족이 들어앉자 어깨 돌리기도 힘들 만큼 꽉 차버린 작은 집 주변이 온통 붉은 것으로 보아 해질녘 노을을 같이 바라보는 모양이다. 동글동글한 식구들 얼굴이 태양처럼 붉다. 하얀 옷을 입은 아내 옆으로 좀 큰 아이는 아들, 빨간 원피스 차림의 작은 아이는 딸인 성 싶다. 뒤로 나앉은 콧수염 난 아빠는 장욱진이 분명하다.
장욱진 ‘자화상’ 1951년작. 14.8x10.8cm, 개인소장. /사진제공=장욱진미술문화재단
화가에게는 처자식을 한 품에 안을 수 있는 이 시간이 한없이 좋고 더없이 행복했다. 한국전쟁 당시 헤어졌던 상처가 큰 탓이다. 충남 연기군(현 세종시)이 고향인 장욱진은 6·25전쟁이 터지자 장남 정순과 장녀 경수를 어머니에게 맡긴 채 아내와 함께 부산으로 갔다. 핍진한 피란 생활에, 아이들을 멀리 떼어둔 아비는 폐인이 됐다. 심성 여린 예술가라 더 그랬을 터 빈속에 매일 술로 끼니를 때우다시피 했다. 보다 못한 아내 이순경(97) 여사가 “당신이라도 고향집으로 가라”며 등을 떠밀었다.
그렇게 돌아온 고향에서 다시 붓을 들 수 있었다. 이즈음에 그린 ‘자화상’은 황금빛 들녘을 가로지르는 붉은 길을 따라 세련된 연미복 차림으로 걸어온 신사를 앞세우고 있다. 장욱진의 또 다른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이 화사한 그림은 실상 처절할 만큼 반어적이고 지독하게 해학적이다. 발끝을 쫓아온 강아지도 있고, 머리 위로 새들도 날아다니지만 그는 외롭다. 부산에서 홀로 고향으로 달리던 그 길이 화가에게는 두렵고 끝 모를 고독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목가적이고 낭만적이라 칭송받는 이 황금들판은 전쟁통에 피폐해진 현실을 떨치고자 작가가 택한 반어적 풍경이다. 다가올 풍요로운 미래에 대한 작가의 꿈이기도 했다. 지금은 포탄이 넘나드는 하늘에 ‘우리 네 식구’를 닮은 까치를 그려넣어 다 같이 만날 날을 기약했다. 장욱진은 전쟁의 아픔과 불안과 혼란을 모조리 그림 안으로 숨겨 넣었다. 피폐하고 궁핍한 전쟁통에 예술이 줄 수 있는 유일한 해법, 희망을 담았다.
“1950년대 피란 중의 무질서와 혼란은 바로 나 자신의 혼란과 무질서의 생활로 반영됐다.…이 그림은 대자연의 완전 고독 속에 있는 자기를 발견한 그때의 내 모습이다. 하늘엔 오색구름이 찬란하고 좌우로는 자연 속에 나 홀로 걸어오고 있지만 공중에선 새들이 나를 따르고 길에는 강아지가 나를 따른다. 완전고독은 외롭지 않다.” (계간지 ‘화랑’ 1979년 여름호 중에서)
배경도 그렇거니와 한껏 차려입은 주인공의 옷차림이 눈길을 끈다. 그 시절 멋쟁이들의 필수품인 우산과 모자가 양손에 들렸다. 멋 부리고 나선 팔자걸음의 그가 배우 찰리 채플린을 떠올리게 한다. 이 호기로운 모습은 어쩌면 희극배우의 연기일지 모른다. 전쟁의 비극적 상황을 화가는 해학적으로 표현했고 멋을 부려 두려움을 지웠다. 동시에 양복 차림은 토속적인 농촌 배경에 완전히 섞일 수 없는 존재, 즉 전통과의 단절을 경험하고 자신을 성찰하고 있는 근대인의 단면을 보여준다. 이 그림이 시대정신이 투영된 성찰적인 작품이라 평가받는 이유다. 시대를 견뎌낸 젊은 화가의 고뇌가 처절하게 빛난다.
장욱진 ‘가로수’ 1978년작, 30x40cm, 개인소장. /사진제공=장욱진미술문화재단
그런 고독과 성찰의 시절을 보냈기에 화가는 가족들이 한울타리 안에 모여 있는 시간을 소중히 여겼고 ‘가족’이라는 주제를 다양한 작품으로 남겼다. 1972년에 그린 이 ‘가족도’는 손바닥 만한 앙증맞은 크기의 그림이다. 작가 자신이 각별히 아껴 유족이 보관해오던 대표작인데, 올해 초 장남 장정순 씨가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에 기증했다. 화가는 팔로 부둥켜 안듯 벽을 둘러 가족을 꼬옥 끌어안았다. 두 손 모으고 앉은 아이들이 무언가를 간절히 기다리는 듯해 여러 번 더 눈이 간다.
김환기·이중섭 등과 더불어 근대 한국화단을 대표하는 장욱진은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지주 집안에서 태어난 덕에 교육 여건이 좋은 서울로 올라와 경성사범보통학교를 다니던 장욱진은 3학년 때 일본인 미술교사가 그의 그림을 전국 학생그림대회(일제 치하 ‘전일본소학생미전’)에 출품해 1등상을 받은 것을 계기로 미술에 빠져들었다.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성제2고등보통학교(현 경복중고교)에 진학해 미술반 활동을 했는데 일본인 역사 교사에게 대들다 3학년 때 퇴학을 당한다. 학교를 그만둔 게 화실에서 그림만 그릴 수 있는 구실이 됐지만 성홍열을 앓아 충남 예산의 수덕사로 요양을 떠난다. 이곳에서 우연히 만난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1896~1948)이 장욱진의 그림을 보고 “작가의 주관이 살아있는 좋은 그림”이라고 칭찬한 일화가 전해진다. 3년 수양 후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체육특기생으로 편입한 그는 4학년이던 1938년 전국학생미전에서 ‘공기놀이’로 최고상을 받았다. 수상을 계기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제국미술학교(현 무사시노미술대학) 서양화과에 진학했다. 학교 수업과는 별개로 하숙집에서는 고향을 소재로 줄창 그림을 그리던 장욱진은 졸업과 동시에 귀국해 광복을 맞았고 다시는 일본 땅을 밟지 않았다.
1945년 가을 그는 새로 생긴 국립박물관에 취직해 일제로부터 넘겨받은 유물을 분류하는 일을 했다. 2년 근무기간 조선 최고의 회화와 불상을 눈과 손으로 경험한 것이 작가의 그림에 밴 전통성의 밑거름이 된 것은 분명하다. 박물관을 사직한 그는 1947년 김환기·유영국·이중섭·백영수와 함께 ‘신사실파’를 결성했다. 아카데미즘이라 불리는 틀에 박힌 미술을 거부하고 서양식 기법으로 우리 전통의 요소를 현대적으로 해석해 보여주고자 한 모임이었다. 이후 장욱진은 서울대 미술대학 교수가 됐다. 술을 워낙 좋아하고 기분 내키면 어디서든 쭈그리고 앉아 그림을 그리곤 한 그를 서울대 경비원이 노숙인인 줄 알고 끌어내 쫓으려 했다는 전설같은 얘기가 전한다. 결국 6년 만에 학교마저 떨쳐낸 그는 문명이 장악한 서울을 뒤로하고 전기도 안 들어오는 덕소에 작업실을 짓고 그림만 그렸다. 남편을 대신해 생계를 맡은 부인은 역사학자 이병도 전 문교부 장관의 딸인데 ‘학자 집안의 딸이 아무 일이나 하면 안된다’고 해서 책방을 운영하며 1남 4녀를 키웠다. 평일에는 책방을 꾸리다 주말이면 반찬거리를 만들어 주렁주렁 아이들 손을 붙들고 시외버스를 타고 작업실로 향했다. 이 ‘가족도’가 바로 그 덕소의 어느 주말 풍경이다. 화가라는 천형(天刑) 때문에 그리운 가족과 떨어져 지내니 모두가 슬펐다. 그래서 한가득 행복한 이 그림 한 켠이 애잔하다.
“오직 그림과 술밖에 모르고 살아온 인생에서 그림은 내가 살아가는 의미요, 술은 그 휴식이었다”고 한 그는 시인처럼 함축적으로 그림을 그린 화가였고, 순진무구한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본 기인(奇人)이었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