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초청장은 고객에게 직접 전달. ②화려하지만 천박하지 않게. ③가격보다는 품격을. ④돌아서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선물.
최근 서울 청담동 유명 카페에서 열린 A프라이빗뱅킹(PB)센터의 파티 지침이다. 초청장은 A센터에 맡긴 자산이 30억원 이상인 자산가들에게 직접 전달됐다. PB센터 한곳에 맡긴 돈이 30억원이라면 해당 자산가의 전 재산은 수백억, 수천억원에 달한다는 이야기다. 파티 장소는 재벌가 자제들도 즐겨 찾는다는 청담동의 한 카페.
참석자들과 PB들은 요즘 TV 출연으로 한창 유명세를 타고 있는 스타 셰프가 준비한 음식과 크루그 그랑 퀴베 등 빈티지급 고가의 샴페인을 음미했다.
눈도 즐거웠다. 명품 브랜드 B사가 신상 백을 국내 최초로 공개하는 패션쇼를 진행했고 국내 최정상 마술사의 공연도 이어졌다. 아이돌 가수들이 복면을 쓰고 등장해 분위기를 돋우기도 했다. 파티를 주최한 PB들은 참석자들의 귀갓길에 최근 가장 핫하다는 Y 작가의 작품을 선물로 건넸다. 언뜻 평범한 액자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작품당 100만원이 넘는데다 투자가치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작가다.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유명인사들을 수시로 만나는 PB들의 삶은 겉보기에 매우 화려하다. 실력 있는 PB들은 대기업 최고경영자(CEO), 문화예술인, 정치가인 고객들과 저녁에 함께 술잔을 기울일 만큼 친해지기도 한다. 원치 않아도 자연스럽게 자산가들, 그들만의 세상에 녹아들기도 한다. PB들은 자산가들과 신뢰를 쌓기 위해 금융뿐 아니라 정치·사회, 패션까지 최신 트렌드를 섭렵하고 인기 영화·드라마, 서적도 놓치지 않고 본다.
고객들과 만나는 장소는 대부분 PB센터 바깥이다. 고객의 직장·사무실이나 종종 커피숍에서 만나기도 하지만 가끔은 자택을 직접 찾아가는 경우도 생긴다. PB 경력 10년이 넘은 강남권의 한 PB는 고객인 톱스타 E의 자택에 초대받은 경험을 들려주기도 했다. “집 자체도 워낙 비싼 집이지만 그보다도 엄청난 규모의 와인 셀러를 갖추고 있어 놀랐다”고 귀띔했다. 물론 PB들은 입이 무겁다. 고객들과 나눈 이야기, 그들의 개인사는 철저히 비밀에 부친다. 또 다른 강남권의 15년 차 PB는 “연예인 고객이 몇 분 계시지만 누군지 알려줄 수 없다”며 딱 잘라 말했다.
상대적으로 평범한 자산가들도 있다. 대규모 재래시장이 성업 중인 지역에서 근무하는 한 PB는 관리하는 자산 규모가 강남에 비해서는 작다. 강남과 달리 5억원도 이 지점에서는 큰돈이다. 이 PB는 “이 지역 전체에 계란을 공급하는 상인이 내 최대 고객”이라며 “시장이 이 지역 상권의 중심이다 보니 시장 좌판에서 수십억원을 모은 할머니들도 찾아온다”고 설명했다. 그런가 하면 불법적인 수단으로 돈을 번 고객들을 마주치는 PB들도 있다. 성매매업소가 많은 지역에서 근무하는 또 다른 PB는 “업소 포주나 성매매 여성들도 종종 PB센터를 찾는데 굳이 직업을 알려주진 않아도 대화하다 보면 알게 된다”며 “적립식 펀드에 가입하는 등 투자 성향은 의외로 보수적”이라고 귀띔했다.
PB들이 상대하는 고객들 중 벼락부자나 졸부는 드물다. 수십년간 직접 거액의 돈을 굴리며 시장의 풍파를 헤쳐온 베테랑들이다. 이들을 상대하는 업무는 엄청난 압박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잠실 지역의 한 PB는 “유학파 기업인들은 주요 일간지와 경제지뿐 아니라 블룸버그·월스트리트저널까지 매일 챙겨보고 여러 증권사 PB들로부터 투자 조언을 듣는다”며 “어설프게 대했다간 성격 급한 고객들로부터 대놓고 면박을 당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PB들은 쉬는 날에도 공부를 거르지 못한다. VIP 마케팅 동호회, 각종 금융투자 세미나 등에 참석하는가 하면 중국어는 물론 요즘은 베트남어까지 공부하며 자기계발에 매진해야 하는 직업이다.
사람을 대하는 일인데다 거액의 돈까지 걸려 있다 보니 잡음이 발생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강남과 강북의 여러 지점을 거친 또 다른 PB는 수년 전 ‘진상 고객’을 만나 된통 고생한 경험이 있다. 이 고객은 PB 말대로 투자했다가 손해를 봤다며 지점을 찾아와 고성을 지르며 협박을 하기도 했다. 저녁에는 해당 PB에게 전화를 걸어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퍼붓기도 했다. 또 다른 PB는 “화가 난 고객이 담당 PB의 책상에 칼을 꽂는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경력 10년 차의 PB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일임매매 등으로 손실을 발생시키는 PB들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라면서 “하지만 요즘 젊은 PB들은 전문성과 업무의 영역 구분이 명확해 책임질 일을 하지 않는다”고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대부분의 자산가는 여러 증권사 PB들과 거래하면서 두루 상담을 받지만 최종 결정은 본인이 내린다.
22년 만에 속편이 나온 영화 ‘월스트리트’의 부제는 PB들을 대변한다. ‘Money never sleeps(돈은 잠들지 않는다)’. 잠들지 않는 돈을 좇으며 PB들은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린다. 자산가들과 만나다 보면 1억, 2억 정도 벌기는 한없이 쉬워 보인다. 하지만 PB들도 평범한 월급쟁이다. A증권사 G지점의 막내 PB인 H씨는 “눈이 높아져서 명품 시계나 럭셔리카를 기웃거리게 되지만 통장이 따라주질 않는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산가들처럼 돈을 모으기 어렵다는 점도 PB들을 괴롭게 만든다. 대부분의 PB는 “우리나라 자산가들 절대다수가 사업보다는 부동산으로 돈을 번 사람들”이라고 단언했다. 예전만큼 부동산 가격이 상승하기 어려운 시대에는 더 이상 새로운 부자가 탄생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PB들은 “우리 사회의 부(富)는 정체돼 있다”고도 분석했다. 10~15년 차 경력의 PB들에게 “최근 수년간 새로 고객이 된 신흥 부자들은 어떤 이들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자 모두 고개를 저었다. “기존 고객의 자녀가 재산을 물려받아 찾아오긴 해도 새로 부자가 돼 나타나는 고객은 못 봤다”는 답변이다. 워킹맘인 한 PB는 “출발선이 다른 ‘금수저’들과 얼굴을 맞대다 보면 아등바등 사는 스스로가 가끔 초라하게 느껴진다”고 고백했다.
다만 PB들은 자산가들로부터 배울 점이 많다고 입을 모았다. 첫 번째는 자산가들의 투철한 절약정신이다. 수억원짜리 투자는 화통하게 결정하면서도 인터넷뱅킹 수수료 500원은 기를 쓰고 아끼는 식이다. PB가 사무실에서 뽑아온 투자보고서를 받아보자마자 “이면지에 인쇄해오지 그랬냐”며 안타까워하는 부자도 있다.
PB들은 모험을 싫어하는 자산가들의 투자 방식에서도 교훈을 얻는다. 서울 F지점의 한 PB는 “연 수십% 수익을 꿈꾸며 이상한 테마주를 사들이는 자산가는 없다”며 “기본적으로 우량자산에 투자해 오를 때까지 기다리는 게 원칙”이라고 설명했다. 이 PB는 “물론 당장 생활비가 빠듯하면 돈을 묻어놓고 기다리기 어렵긴 하지만 최대한 그들처럼 투자해 재산을 불릴 수 있었다”고 귀띔했다. /유주희기자 ginger@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