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시대-문제는 정치다<3>] 정치권 "대기업은 곧 재벌"…'적폐 대상' 인식에 당연한듯 호통

■ 왜곡된 시선에 속앓는 기업들
지구촌 누비며 수출 끌어올려도
'재벌은 개혁 대상' 프레임 발목
선제투자·스타트업 인수 등 꺼려
중견·중소기업 육성 위해서라도
대기업 보는 정치권 시선 바꿔야



대통령 탄핵 사태와 중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보복으로 갈피를 잃은 한국 경제가 올해 들어 다시 기지개를 켜는 원동력은 반도체와 디스플레이의 힘이 절대적이다. 반도체 수출은 7개월 연속 증가하고 있으며 지난 4월에는 71억4,000만 달러의 수출액을 올리며 역대 2위 실적을 기록했다. 전년 4월과 비교하면 수출 증가율이 56.9%에 달한다. 산업 전반에서 중국의 추격이 거센 가운데 독점적인 ‘수출 한국’의 위상을 지켜주고 있는 대표적인 품목이 바로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다.

메모리반도체인 D램 시장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우리 기업들의 전 세계 시장점유율은 70%를 넘는다. D램 시장의 ‘치킨 게임’에서 승리한 국내 기업들은 전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다.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카메라 모듈 등 국내 전자 업체들의 차세대 품목들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대한민국 미래 먹거리를 책임질 수출 효자로 급부상하고 있다. 올 1·4분기 삼성전자 영업이익이 상장사 전체 영업이익의 3분의1에 달할 정도로 국내 경제는 대기업 의존도가 높다.

하지만 숫자로 보이는 이 같은 실적과 국내 정치권에서 삼성과 LG·현대차 등 대기업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괴리감이 크다. 박근혜 정권 출범 전부터 선거 표심을 잡겠다고 시작된 ‘경제 민주화’ 바람은 문재인 정부까지 이어지며 대기업들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재벌과 대기업을 동일시하고 총수를 청와대로 불러 돈을 요구하는가 하면 국회에 모아놓고 호통을 치는 것을 당연시하는 정치권의 인식은 대기업들의 행동 반경을 전방위로 제한하고 있다.


대통령 탄핵 사태를 계기로 문재인 정부가 출범했지만 대기업 사이에서 진취적인 ‘기업가 정신’은 회복되지 않고 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의 희생양으로 대기업 총수들이 줄줄이 검찰 수사를 받았고 일부는 기소당해 재판에까지 넘겨져 판결을 기다리는 중이다. 대기업의 이해관계를 대표하는 전국경제인연합회는 껍데기만 남았고 정부와 대기업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할 중재자도 보이지 않는다. 정부의 전직 고위관계자는 “문재인 정부 들어 기업들이 더 흥을 잃었다”며 “대기업을 적폐와 개혁의 대상으로 보는 정치권의 시각이 강하고 줄줄이 규제가 예고된 가운데 기업들도 긴장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대기업에 대한 왜곡된 시선이 정치권을 지배한 가운데 선제적 투자를 통해 한국 경제를 이끌어온 대기업들의 공은 수면 아래로 묻혔다. 리스크를 감수한 천문학적 투자를 통해 반도체 왕국을 이끈 삼성전자나 척박한 환경에서 글로벌 브랜드로 도약한 현대차 신화는 ‘그들만의 일’로 홀대 받는다. 이들 기업의 성공은 오너의 선견지명과 결단이 있었기에 가능했지만 현 정치권의 프레임은 ‘재벌=개혁대상’에 갇혀 있을 뿐이다. 이러다 보니 대기업들은 국내 경영활동에 몸을 사리고 대기업에서 중소 벤처기업으로 이어지는 투자 선순환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국내에서는 투자나 인수합병(M&A) 같은 돈 쓰는 경영 활동도 눈치를 봐야 하는 것이 대기업이다.

이경전 경희대 경영학과 교수는 “대기업이 벤처에 투자하면 신생 기업을 잡아먹는다는 시선이 팽배한 가운데 국내에서는 민간 투자 역량이 살아나지 않고 있다”며 “카카오나 쿠팡 같은 기업에 텐센트나 소프트뱅크 같은 외국 자본만 진출하고 국내 대표기업인 삼성전자는 미국 기업만 인수하는 사례가 그 단면”이라고 말했다. 실제 국내에서 가능성 있는 스타트업을 대기업이 인수해 세계적인 회사로 도약시키는 사례는 전무하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국내에서는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시선이 너무 강해 효율적인 인수합병이나 사업 재편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더 큰 문제는 ‘대기업 때리기와 중소기업 살리기’ 식의 정치 프레임이 말만 그럴 듯할 뿐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점이다. 한국 경제는 대기업의 수출 비중이 여전히 60%가 넘고 제조업 분야에서 중국의 추격을 따돌릴 기술 경쟁력도 대부분 대기업들이 확보하고 있다. 반면 중견·중소기업들의 영역인 소재부품 시장은 일본의 기술 경쟁력에는 못 미치고 중국의 가격 경쟁력에는 치여 고전한다.

재계 관계자는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시장의 호황은 장비 산업과 부품 산업으로 이어질 수 있고 중견·중소기업들에 새 먹거리를 창출해주지만 국내 정치권은 땅에서 솟아나는 식의 중소기업 부양만 외치고 있다”며 “대기업의 인프라와 노하우를 활용해 중소기업의 역량을 살리는 정책이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대기업을 적폐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정치권 시선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윤홍우·조민규기자 seoulbird@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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