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규(오른쪽부터) 산업연구원장, 이희옥 중국연구소장, 리웨이펑 CCG 사무국장, 마키노 요시히로 아사히신문 서울지국장이 25일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 영빈관에서 열린 한중일포럼에서 의견을 나누고 있다. /송은석기자
동북아 3국은 최근까지 최악의 험로를 걸어왔다. 한국은 일본과 위안부 합의, 영토분쟁에서 비롯된 갈등을 겪고 있고 중국과는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로 인해 양국 국민의 감정싸움까지 벌어졌다. 일본과 중국의 관계도 역사·영토분쟁을 둘러싸고 삐걱대는 상황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으로 화해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지만 3국이 ‘공동발전’의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관계 개선을 서둘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서울경제신문은 지난 23일부터 사흘간 개최한 ‘서울포럼 2017’의 부대행사로 한중일 포럼을 마련했다. 3국의 정치·경제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정치·외교적 갈등 해소와 경제적 공동발전의 방향을 모색해보자는 취지다. 25일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 영빈관에 모인 참석자들은 정치와 경제적 사안에 각각 접근하는 투트랙 전략을 취하되 민간 차원의 협력을 중심으로 실질적인 행동에 나서는 것이 중요하다고 목소리를 모았다.
이날 포럼은 이희옥 성균관대 중국연구소장(정치외교학과 교수)이 진행을 맡았다. 토론자로 참석한 유병규 산업연구원장, 리웨이펑 중국과세계화연구센터(CCG) 사무국장, 마키노 요시히로 아사히신문 서울지국장은 이 소장이 던진 ‘4불 시대(불확실·불안정·예측불가능·불명확)’라는 화두에 깊은 우려를 표했다. “질서를 잃어버린 국제 외교 무대에서 3국 역시 각자의 정체성만 내세우며 협력의 방향을 잃어버렸다”는 것이 이 소장의 진단이다.
마키노 지국장은 “중국이 아시아의 새로운 리더로 부상하면서 일본과의 갈등이 심화한 것으로 보인다”며 “정작 일본 국민들은 역사 문제에 큰 관심이 없지만 일본 정부가 경제회복에 집중하면서 발생한 내부적 스트레스를 외부로 표출하는 양상”이라고 분석했다.
토론자들은 갈등을 풀기 위한 해법으로 ‘투트랙 전략’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 원장은 “정경분리의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며 “정치·군사·안보 분야에서 이해관계가 부딪치더라도 경제 등 비정치 분야의 협력은 반드시 이어나가야 한다”고 밝혔다. 과거에 연연하지 말고 미래지향적인 협력 방안을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리 국장은 “3국은 인종·문화·경제적 측면에서 끈끈할 수밖에 없는 관계”라며 “2015년 한중일 공용한자를 제정한 것처럼 3국의 문화적·경제적 일체화가 자연스럽게 가능하리라 본다”고 덧붙였다. “중국 역시 아시아에서의 교류 확대가 일관된 방침”이라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3국 간의 협력을 체계적으로 뒷받침할 묘안은 없을까. “아세안+3, 동아시아정상회의 등이 제 역할을 못 하는 사이 3국은 각각 동북아개발은행(한국)·아시아개발은행(ADB·일본)·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중국)을 내세워 경제협력의 주도권을 다투고 있다”는 이 소장의 지적에 대해 리 국장은 “전 세계 교역량의 4분의1을 차지하는 3국은 결코 독자적인 이익을 추구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대신 “중국식으로 표현하자면 ‘아래로부터의 개혁’, 즉 민간 차원의 경제·문화·인적교류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제도적으로는 세계무역기구(WTO) 같은 3국 간 무역협정을 추진해 16억명 이상의 초거대시장에서 서로 보완해주는 관계로 발전해야 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다른 토론자들 역시 민간부터 나서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했다. 유 원장은 민간 차원의 ‘한중일 경제사회협력포럼’ 출범을 제안했다. “자유무역협정(FTA) 같은 제도적 협력에 앞서 3국의 기업과 학계가 공동현안을 논의하고 실천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 소장도 “3국이 대규모 에너지 수입국인 만큼 에너지 구매협력을 통해 협력의 모멘텀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마키노 지국장은 이 과정에서 각국 리더가 포퓰리즘과 국익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내 여론이 따라주지 않더라도 국익을 위해 과감히 결단을 내릴 줄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리 국장은 “과거사 이슈에는 냉정한 태도를 견지해야 하고 서로 자주 정보와 의견을 교환하기 위해 연 한두 차례 회담에 그치지 않는 전방위적 소통에 나서야 한다”고 덧붙였다.
토론자들은 4차 산업혁명의 파고 속에서 3국이 손을 맞잡아야 한다는 점에도 의견을 같이했다. 유 원장은 “3국은 16억 인구와 거대한 시장, 세계적 수준의 제조업 등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할 수 있는 디지털 협업 기반을 모두 갖추고 있다”며 “새로운 성장 모멘텀을 찾기 위해선 특히 한중일이 먼저 세계기술표준을 제정하기 위한 협력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키노 지국장은 “일본은 FTA·환태평양동반자협정(TPP) 등도 내부적인 반대가 많았지만 4차 혁명은 피할 수 없는 흐름”이라며 “낙오자가 생기지 않도록 3국이 각각 사회적 안전망 구축에도 힘써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이 소장은 ‘다주소설(多做少說)’이라는 제언으로 한중일 전문가들의 토론을 마무리했다. ‘불필요한 말싸움을 삼가고 협력을 위한 행동에 집중하자’는 의미의 중국어다.
/유주희·이지윤기자 ginger@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