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플의 최후



1453년 5월 29일 새벽 1시 반. 갑자기 밤의 정적이 깨졌다. 나팔소리와 북소리, 오스만 튀르크군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콘스탄티노플에서도 성당의 종들이 일제히 울리며 적의 공격이 시작됐음을 온 도시에 알렸다. 한때 100만이 넘는 인구를 자랑하며 번성하던 콘스탄티노플에 남은 인구는 불과 5만 여명. 비잔틴(동로마) 제국이 긁어모은 군대는 4,983명에 불과했다. 여기에 베네치아와 제노아 등 외국인 2,000여명 을 합쳐도 7,000여명 안팎. 반면 21세의 젊은 술탄 메흐메드 2세가 직접 지휘하는 오스만 튀르크군은 17만명이 넘었다.

콘스탄티노플의 병사들은 압도적인 병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살아날 수 있다는 기대를 품었다. 3면이 바다에 둘러싸인 천혜의 요지에 세워진 콘스탄티노플은 해자와 3중 성벽을 자랑하는 난공불락의 요새였으니까. 일찍이 경험한 23차례 대규모 침공에서도 늘 중과부적인 상태에서 싸웠다.* 이번에도 그랬다. 튀르크군이 공격을 개시한 게 4월 6일. 완전히 포위되고 주요 항구가 점령 당하면서도 53일째 버텨온 농성(籠城)에서 튀르크군의 본격 공격을 맞은 것이다.

튀르크 군은 사흘 전 대규모 공격 날짜를 정하고도 굳이 숨기지 않았다. 튀르크 군 진영에 있는 일부 그리스도교 병사들은 성벽에 정보가 담긴 화살을 날려 술탄의 계획을 알려줬다. 튀르크 군은 대놓고 해자를 메우고, 대포를 설치하며 투석기 등 공성 무기를 공격 위치에 배치했다. 예고했던 공격의 날 새벽 공기를 찢은 튀르크 군은 새벽 4시까지 파상 공세를 취했으나 소득이 없었다. 튀르크의 최정예 보병부대인 예니체리 병단이 출정할 즈음, 성 안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제노아 병력의 지휘관이 총에 맞자 후송하겠다는 제노아 용병들과 싸움이 한창이니 안된다는 그리스군과 의견 대립이 일어난 것. 튀르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격을 퍼부어 망루 하나하나를 점령해 나갔다. 두터웠던 성벽도 파괴돼 튀르크군이 쏟아져 들어오고 결국 콘스탄티노플은 최후를 맞았다. 로마제국의 새로운 수도를 찾던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건설(330년)된지 1,123년 18일 만에 콘스탄티노플과 동로마제국은 멸망했다. 광대했던 영토가 쪼그라들며 콘스탄티노플 하나만 달랑 남아 사실상의 자유무역항으로 전락했지만 난공불락이라던 성벽은 왜 붕괴됐을까.

콘스탄티노플은 안에서 무너졌다. 황원호 명지대 교수(사학과)의 연구논문 ‘중세 비잔티움 귀족 집단의 쇄신과 변천(7세기~12세기)’에 따르면 능력 위주의 인사 시스템이 망가진 상태였다. 비잔티움 상류사회는 적어도 11세기까지 외국 출신에게도 승진과 출세 문호를 개방했으나 이후부터 폐쇄된 특권 집단으로 전락해 제국도 활력을 잃었다. 부유층과 대신들의 자식들이 병역을 기피하고자 대거 외국 유학과 이민을 떠나고 무역 목적으로 거주하던 베네치아와 제노아인도 걸핏하면 으르렁거렸다. 동서교회 간 예배 양식과 성화나 성물에 대한 인식도 달라 그리스인과 서구인들은 서로 원수처럼 여겼다.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1776)’에서 “동로마제국이 왜 멸망했나를 묻기보다 오히려 어떻게 그토록 오래 존속했다는 사실에 놀라워해야 할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결정적으로 일체의 성화나 성물은 우상이라며 서로마교회와 화해·통합을 반대하던 사람들이 떠난 게 화근이었다. 성화 반대파 1만 5,000여명은 튀르크군에 편입돼 콘스탄티노플에 창과 화살을 겨눴다. 최후의 방어전에서도 내부의 실수가 승부를 갈랐다. 그리스인과 제노아인들이 적전 분열해 튀르크군의 총공세를 받았지만 튀르크군 병사가 우연히 찾아낸 비밀 통로가 열려있지 않았다면 승부는 보다 길어졌을지도 모른다. 내부의 분열과 작은 실수가 제국의 명줄을 딴 셈이다.


과학기술 경시 풍토도 망국을 거들었다. 포신 8.2m짜리 ‘튀르크 대포’의 제작자 헝가리인 우르반은 당초 콘스탄티노플에 찾아와 이교도를 물리칠 대포를 제안했으나 쫓겨났다. 반면 이 소식을 들은 젊은 술탄은 우르반을 찾아내 원하는 금액의 4배를 주고 거대한 대포를 만들었다. 우르반의 튀르크 대포는 발사 속도가 느려 3시간 마다 한 발 밖에 쏠 수 없었지만 무게 609㎏의 포탄으로 견고한 성벽을 깨트렸다. 튀르크군은 배를 산으로 보내는 기발한 작전도 선보였다, 콘스탄티노플의 내항 격인 금각만(Golden Horn)을 보호하는 쇠사슬에 막혀 함대의 진격이 막히자 술탄은 산을 깎아 길을 내고 나무 침목을 깔아 전함들을 옮겼다. 산에서 내려오는 튀르크의 전투함은 콘스탄티노플의 전의를 꺾었다.

비잔틴제국, 동로마의 멸망은 역사의 반전을 낳았다. 오스만 튀르크의 등장으로 향료와 도자기의 육로 수입 길이 끊긴 상인들은 뱃길을 찾아 나섰다. 서양을 세계사의 중심에 올린 대항해시대가 이렇게 열렸다. 콘스탄티노플을 탈출한 학자들도 르네상스에 불을 붙였다. 두루마기 약 800 본 분량의 그리스 필사본을 베네치아로 옮긴 베사리온 신부를 비롯한 비잔틴 학자들이 갖고 온 고대 그리스·로마 고전의 번역판은 때마침 발명된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와 맞물려 지식을 빠르게 전파시켰다.

튀르크의 대포에 놀란 각국은 총포와 화약 연구에 몰두했다. 튀르크 예니체리 병단(기독교 소년을 뽑아 직업군인으로 양성한 상비군)을 모방한 상비군 체제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전제 왕권이 싹트고 유럽은 근대로 접어들었다. 이슬람과 동양에 대한 기독교의 보호막이던 콘스탄티노플의 최후가 서구의 발전을 자극한 셈이다. 단기적으로 최대의 수혜자는 합스부르크 가문. 중부 유럽은 발칸에 비해 오스만 튀르크의 위협을 덜 받았음에도 튀르크 위협을 과장하며 중부 유럽의 강국으로 지위를 굳혔다.

합스부르크 뿐 아니다. 온 유럽이 경쟁적으로 튀르크의 위협이 크다고 입을 모았다. 각국마다 내부의 불만을 튀르크라는 외부로 돌렸다. 보편적 인간애를 강조했던 에라스뮈스마저 ‘에라스뮈스의 대화집(the colloquies of Erasmus’에서 튀르크 혐오론을 남겼다. “…신앙이 흔들리고 있고 성찬은 의심받고 있으며 적그리스도가 다가오고 있다. 온 세상은 알 수 없는 재앙으로 가득 찼으며 튀르크 인이 이 세계를 정복하려고 위협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이 달성되더라도 결코 파괴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아기를 살해하는 튀르크군’ 삽화 등도 금속인쇄기로 널리 퍼지면서 이슬람의 이미지는 더욱 나빠졌다.

러시아도 영향 받았다. 루시(고대 러시아)의 블라지미드(978-1015)가 스스로 동방 정교로 개종하고 전 루시인들에게 세례를 받기 시작한 이래 500년 동안 변방에 머물렀던 러시아 교회는 비잔틴 멸망 이후 ‘제 3의 로마’를 자처하며 국가의 틀을 잡아나갔다. 비잔틴제국 최후의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병사들과 싸우다 전사했지만 황제를 상징하는 몇몇 기물은 우여곡절 끝에 러시아로 옮겨졌다. 러시아 황실은 비잔틴 제국의 혈통이 섞였다는 점을 자랑으로 여겼다. 근대국가로 자신감을 가진 러시아는 ‘비잔티움을 계승한 러시아 정교회가 동방 교회의 적통’이라며 교세를 넓혔다.

숙원이던 콘스탄티노플을 손에 넣은 술탄은 이름을 이스탄불로 바꿨다. 시내의 주요 성당은 모스크(이슬람 사원)로 변했다. 문제는 여기까지였다는 것.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이래 오스만 튀르크는 더 이상 뻗어 나가지 못했다. 승리에 취한 나머지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지 못하고 안주한 탓이다. 이슬람 형제들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쫓겨나고(레콩키스타, 1492년), 1차 비엔나 공방전(1529년)과 레판토 해전(1571년), 2차 비엔나 공방전(1683년)에서 잇따라 실패했어도 서구에 대한 우월감을 떨치지 못했다.

오스만 튀르크의 속도 병들어갔다. 다양한 구성의 제국 신민들에 대한 종교적 자유와 문화에 대한 관용이 사라지며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초기의 오스만 튀르크는 그렇지 않았다.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젊은 술탄 마흐메드 2세의 어머니도 서유럽의 그리스도교 노예 출신이었다. 이은정 서울대 교수(서양사학과)의 연구논문 ‘다종교·다민족다문화적인 오스만제국의 통치 전략’에 따르면 19세기 내내 시도된 중앙집권화와 어설픈 국민 통합이 제국 붕괴의 단초로 작용했다. 이슬람교도와 비이슬람교도가 서로 협력하여 문화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진보한 사회를 이뤘던 황금시대에 보편화했던 관용의 원칙이 사라지며 제국의 통치도 실패했다는 것이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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