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 꽂힌 금융업계

자본시장 성장성 좋아 새로운 블루오션 부상 은행·증권·보험업계 동남아 전초기지 삼는다

이 기사는 포춘코리아 5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국내 금융업계의 베트남 진출이 속도를 내고 있다. ‘포스트 차이나’로 불리며 괄목할만한 경제 성장을 하고 있는 베트남 시장의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0년대 들어 본격 시작된 베트남 진출은 최근 국내 금융시장의 포화와 맞물리면서 더욱 활성화되는 모양새다. 베트남을 전초기지로 동남아 금융시장 확장을 꾀하고 있는 국내 금융사들의 현주소와 미래 청사진을 들여다보자.



“찌우 띠엔 라 똣니엣!(Tri.u Tien la t.t nh.t)”

몇 년 전 기자는 우연한 기회에 베트남 다낭을 간 적이 있었다. 지금은 동남아 대표 휴양지로 각광 받고 있지만, 당시 만해도 다낭은 ‘아는 사람만 찾는’ 관광지에 불과했다. 한국에서 다낭으로 가는 직항 비행기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미지의 도시를 방문한 기자를 반기는 건 뜨거운 햇살과 차도 위를 질주하는 엄청난 자전거 행렬, 그리고 숨이 턱턱 막히는 열기 뿐이었다. 그러나 반가운 것도 있었다. 도심 곳곳에 세워진 한국 기업 광고판이 속속 눈에 들어왔다. 공항에서 만난 가이드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기자를 향해 ‘찌우 띠엔 라 똣니엣’이라 말하며 엄지 손가락을 추켜세웠다. 그 말은 ‘한국이 최고’라는 뜻의 베트남어였다. 현지 가이드는 “여러분은 다낭이 처음이겠지만 저희는 그동안 수많은 한국 사람을 만나왔다”며 “지금 다낭에 설치된 도로, 전기, 배수 같은 주요 인프라 시설도 모두 한국기업의 작품”이라고 말했다.

다낭뿐 만이 아니다. 베트남 곳곳에는 한국 기업의 숨결이 살아 숨쉬고 있다. 지난 1992년 양국 수교 이후, 국내 기업들은 베트남 시장을 지속적으로 주목해왔다. 현지 시장 진출, 대(對) 베트남 무역활동 등을 통해 경제 교류를 이어왔다.


떠오르는 신흥 금융시장

베트남은 한국의 3대 수출시장이다. 코트라(KOTRA)에 따르면, 지난 2016년 상반기 기준 대 베트남 수출 규모는 151억 7,800만 달러(약 17조 2,800억 원)로 중국, 미국에 이어 3위를 기록했다. 전체 수출시장에서 베트남이 차지하는 비중도 매년 조금씩 커지고 있다.

베트남에 진출한 국내 기업들의 숫자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코트라가 밝힌 지난해 기준 베트남 진출 국내 기업은 약 5,000여 개다. 3,000여 개였던 2015년과 비교하면 의미 있는 수준의 증가세로 볼 수 있다.

이처럼 한국 기업들의 베트남 진출이 계속되면서 자연스럽게 국내 금융기관, 특히 은행권이 베트남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한은수 유안타증권 애널리스트는 말한다. “국내 기업들이 베트남에 막 진출했을 당시, 가장 어려움을 겪었던 부분이 바로 금융 업무였습니다. 베트남이 사회주의 체제 국가여서 금융시장 성숙도가 상당히 낮았기 때문이죠. 베트남의 유일한 은행이었던 ‘중앙은행’도 정부 주도의 이른바 ‘계획경제’를 지원하는 역할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한-베트남 수교가 이뤄지기 불과 1년 전인 1991년이 돼서야 민영 상업은행 설립이 허용됐고, 이듬해에는 외국계 은행의 지점 개설도 가능해졌죠. 꽤 늦었다고 볼 수 있어요. 무엇보다 규모의 성장에 집중한 탓에 금융업체들의 전반적인 시장 이해도가 낮았습니다. 이 같은 문제는 베트남에 진출한 국내 기업들에겐 치명적이었습니다. 국내 은행들이 이런 상황을 모를 리 없었죠.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기업을 타깃으로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면 비교적 편안하게 현지 연착륙이 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물론 베트남 금융시장 자체의 숨은 잠재력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였다. 오래전부터 금융 선진국들은 베트남을 주목해왔다. 단지 사회주의 체제가 시장 진출의 장애물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다 지난 2006년 베트남이 세계무역기구(WTO) 가입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금융시장 개방이 가속화 하자, 글로벌 금융사들은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동남아시아 금융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베트남을 선택하기 시작했다. 국내 금융권 역시 마찬가지였다. WTO 가입 이후 열린 베트남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발 빠른 전략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금융전문가들이 베트남 시장의 잠재력을 높게 평가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숨은 돈’이다. 베트남 현지 사정에 밝은 금융업계 관계자 A 씨는 말한다.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베트남 현지인들은 자국 은행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은행을 이용했던 사람들이 베트남 전쟁 이후 수십 년 동안 피해를 입어왔기 때문이었죠. 은행에 맡긴 돈이 하루아침에 ‘국가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사라지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벌어졌으니까요. 이런 이유로 금융권 관계자들은 베트남에 ‘지하경제 자금’이 상당할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이 자금이 제도 금융권으로 들어오면 베트남 금융시장이 한 단계 더 성장하는 동력이 될게 분명했죠. 당시 베트남 국민 중 은행 계좌를 갖고 있던 사람의 비율이 얼마였는지 아세요? 불과 6%였습니다. 이 비율만 봐도 베트남 금융시장의 잠재력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죠.”





은행업계의 새로운 블루오션

국내 금융업계 중 가장 선도적으로 베트남 시장에 대응하고 있는 곳은 바로 은행권이다. 국내 은행들은 지난 1990년대 초중반부터 베트남 진출을 시작했다. 베트남 금융시장이 막 떠오르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가장 먼저 베트남에 진출한 국내은행은 신한은행이다. 1993년 베트남 현지 사무소를 개소한 신한은행은 본격적으로 베트남 금융시장 분석에 돌입했다. 그리고 2년 후인 1995년 호치민에 지점을 열고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기업과 교민을 대상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차곡차곡 현지 경험을 쌓은 신한은행은 1999년부터 본격적인 현지화 작업에 착수했다. 우선 제일은행과 베트남 국영은행 중 하나였던 ‘비엣콤뱅크’가 손잡고 설립한 ‘퍼스트비나’의 지분을 인수해 ‘신한비나은행’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영업에 착수했다.

신한은행 호치민 지점도 2009년 현지법인으로 전환하고 ‘신한베트남은행’으로 재출범시켰다. ‘신한베트남은행’은 국내 은행사 중 현지법인 형태로 은행을 설립한 국내 최초의 은행이었다. 베트남에 진출한 전체 글로벌 은행으로 범위를 넓혀도 HSBC, 스탠다드차타드(SCB), ANZ, 홍릉(Homgleung)에 이어 다섯 번째였다.

해외지점과 현지법인은 존재의 이유 자체가 다르다. 해외지점이 현지에 진출한 국내 기업을 대상으로 영업을 한다면, 현지법인은 한발 더 나아가 그 지역 개인과 기업을 고객으로 삼는다. 그런 까닭에 신한베트남은행은 출범 직후부터 현지 인력을 대거 확충했다. 선진 금융 노하우를 체계적으로 교육하며 금융 인재 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하지만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 것이 해외 사업이었다. 신한은행도 다양한 난관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장애물은 신한은행만이 봉착한 문제는 아니었다. 현지에 진출한 국내 은행들이 공통적으로 겪었던 어려움이었다.


무엇보다 외국계 은행에 대한 제약이 현지화를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지점추가, 예금거래 등에 제한이 있었다. 심지어 ATM기기 설치도 베트남 금융당국의 엄격한 통제 속에 이뤄지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신한은행은 현지 금융 네트워크를 적절히 활용해 영업망을 확대해 나갔다. 베트남 금융 당국과 현지인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기 위해 다양한 사회공헌활동과 고객서비스 강화에도 주력했다.

그 결과 신한은행은 현지시장 진출 20여 년 만에 베트남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외국계 은행 중 하나로 자리 매김할 수 있었다. 신한베트남은행의 당기순이익은 지난해 말 기준 약 537억 원이었다. 이는 현지에 진출한 외국계 은행 중 HSBC에 이어 2번째로 큰 규모였다.

신한은행은 최근 베트남 중앙은행으로부터 성장성과 안정성 등을 인정받아 4개 지점 추가 설립을 허가받기도 했다. 올해 내에 이 지점들의 설립이 완료되면 신한은행의 베트남 지점 수는 총 22개로 늘어나게 된다. 현지 외국계은행 중 자산규모가 가장 큰 HSBC(15개)와의 격차도 더욱 벌릴 수 있게 된다.

무엇보다 신한은행에겐 새로운 금융 영역에 도전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 고무적이라 할 수 있다. 최근 신한은행은 금융당국으로부터 펀드 자산 보관, 자금 결제 등을 제공하는 수탁업무 인가를 취득했다. 신한베트남은행은 이를 통해 베트남 주식이나 펀드 등에 투자하려는 고객들에게 종합 서비스를 제공하는 새로운 비즈니스를 시작할 수 있다.

신한은행 관계자는 이에 대해 “베트남 금융당국이 신한은행의 성장성, 안정성, 현지화 전략을 높게 평가한 결과”라며 “앞으로도 현지 영업력을 강화해 베트남 고객들에게 사랑받는 은행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는 신한은행에 국한된 얘기는 아니다. 국내 다른 은행도 베트남 진출에 적극성을 보이고 있다. 신한은행에 이어 두 번째(1997년)로 베트남에 진출한 우리은행은 지난해 하노이 지점을 법인으로 전환해 본격적인 현지 영업력 강화에 나서고 있다. 올해 3곳의 신규 지점 개소를 시작으로 향후 3년 간 20개 이상 지점을 추가 설립해 빠른 시일 안에 신한은행을 위협할 만한 수준으로 경쟁력을 끌어올린다는 계획이다.

KB국민은행의 경우, 윤종규 KB금융 회장이 직접 나서 베트남 시장을 챙기고 있다. 현재 KB국민은행은 호치민 지점과 하노이 사무소 2개의 현지 네트워크를 보유하고 있다. 윤 회장이 지난 2월 웅우엔 쑤언 푹 베트남 총리를 직접 만나 KB국민은행 하노이 사무소의 지점 전환과 금융사업 확대에 대한 베트남 정부의 협조를 요청하기도 했다. KB금융그룹은 경쟁 금융사보다 한발 늦게 베트남 시장에 도전장을 던진 만큼, 카드나 증권 같은 분야에도 진출하겠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

지난해 베트남 국내 은행 점포에서 거둬들인 당기순이익은 총 7,230만 달러(한화 약 820억 원)로, 전년 대비 54.7%나 증가했다. 전문가들은 지금의 추세가 이어질 경우, 올해는 총액이 1,000억 원에 육박할 것이라 전망하고 있다.


신한베트남은행 출범식 당시 관계자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


우리은행 베트남 현지 법인 출범식에 참석한 이광구 우리은행장(오른쪽).

베트남 증권·보험시장도 주목

은행에서 시작된 국내 금융권의 베트남 시장 진출은 이제 증권, 보험 등 전방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지난해 베트남 정부가 자본시장을 통한 국영기업 민영화 계획을 밝히면서, 국내 증권사들의 베트남 시장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지고 있다. 오는 2018년까지 약 200여 개의 베트남 공기업이 민영화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현지에 진출한 국내 증권사들의 행보가 더욱 분주해지고 있다.

국내 증권사들이 베트남 시장의 성장 가능성을 눈여겨 보기 시작한 건 2007년 무렵부터였다. 국내 시장이 포화 상태에 도달하면서 대형 증권사를 중심으로 신흥 자본시장을 찾기 시작했다. 그 중 베트남이 자본시장 성장 가능성 측면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아 유력 후보로 떠올랐다.

지난 2007년 베트남 국가증권위원회로부터 종합증권사 설립 인가를 획득해 호치민에 ‘미래에셋증권 베트남법인’을 설립한 미래에셋증권(현 미래에셋대우)는 2009년 하노이에도 지점을 설립해 베트남 시장 선점에 나서고 있다. 한국투자증권과 신한투자금융은 현지 법인 지분을 인수해 각각 ‘KIS베트남’과 ‘신한금융투자 베트남’을 설립했고, NH투자증권도 하노이에 법인을 설립해 온라인 브로커리지(주식 위탁매매) 업무를 중심으로 영업을 강화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들은 베트남 증권시장의 성장이 앞으로도 꾸준히 이어질 것이라 예상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공기업 민영화 외에도 금융당국이 증권시장 활성화를 위한 정책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핵심 키워드는 ‘증시 선진화’와 ‘개방’이다. 김진회 하나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말한다. “지난해 베트남 국가증권위원회가 본격적인 ‘증시 선진화’ 정책의 시행을 선언했습니다. 증권사 대상 외국인 투자자 지분율 한도를 기존 49%에서 100%로 올렸고, 부실한 현지 증권사 구조조정을 통해 외국인 투자자금 유치 확대하고 있죠. 투자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호치민과 하노이에 분산돼있던 거래소를 통합하기도 했습니다. 다양한 상품개발로 베트남 주식시장 활성화를 위한 기반도 닦아 놓았죠. 이 같은 정부 주도의 주식시장 활성화 정책은 국내 증권사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증권 뿐만이 아니다. 보험업계도 호시탐탐 베트남 시장 기회를 엿보고 있다. 베트남 보험시장은 지난 2009년 이후 연평균 19~20% 수준의 고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가장 선도적으로 베트남에 진출한 한화생명의 경우, 지난해 4억 5,000만 원의 당기순이익을 기록했다. 이는 지난 2009년 호치민에 현지법인을 설립한 이후 7년 만에 이뤄낸 ‘흑자’ 달성이었다.

호치민 법인을 중심으로 대도시에는 직영지점, 지방에는 전속 대리점 위주의 영업망을 구축한 한화생명은 현재 베트남에 전국 네트워크를 갖춘 몇 안 되는 외국 생보사로 자리를 잡은 상황이다. 한화생명 뿐만 아니라 삼성생명, 신한생명 등도 현지 사무소를 개설하고 베트남 진출을 위한 준비를 착실히 진행가고 있다.


베트남 금융당국 관계자와의 면담 차 베트남을 방문한 황영기 금융투자협회 회장.

인력고도화로 경쟁력 키워야

베트남은 현재 국내 금융업계의 새로운 블루오션이자 동남아 시장의 전진기지로 자리를 잡고 있다. 그렇다면 국내 금융사들이 베트남에서 더 강력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선 어떤 노력이 수반돼야 할까? 대다수 전문가들은 현지인력의 고도화를 첫 번째 열쇠로 꼽고 있다. 경제 성장이 예견된 상황에서 ‘인재가 곧 힘’이라는 진리는 금융시장에서도 고스란히 적용된다는 것이다. 전수길 한양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말한다. “현지에 진출한 은행, 증권사들은 대부분 국내 대형 금융지주사의 계열사들입니다. 은행과 증권은 상호 연관성이 높기 때문에, 각각의 영역에서 전문 지식을 가진 인재가 지주사 내부에서 자유롭게 교류한다면 분명 시너지 효과가 나타날 수 있을 겁니다. 현지 법인에서 근무하고 있는 베트남 현지인들의 역량을 최대한 끌어올려 인력 선순환을 꾀한다면 한국 금융사의 경쟁력을 더욱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베트남 시장의 전반적인 산업 트렌드를 꾸준히 분석해 이와 연관된 금융상품과 서비스를 꾸준히 선보이는 것도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국내 금융사가 가진 강점 중 하나인 독보적인 IT 기술을 최대한 활용해 아직 초기 단계인 베트남 핀테크 시장을 선제 공략하는 것도 또 하나의 열쇠가 될 수 있다.

고무적인 점은 한국 금융사를 바라보는 베트남 현지의 시선이 매우 긍정적이라는 것이다. 베트남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한 사회공헌활동과 금융당국과의 꾸준한 스킨십은 현지 고객과 정부 당국 모두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놓았다. 그렇다면 국내 금융사들은 이런 측면을 지렛대로 활용해 앞으로도 베트남 시장에서 가파른 성장 가도를 달릴 수 있을까? 동남아시아 금융의 전진기지, 베트남 시장을 흥미롭게 지켜봐야 하는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다.


서울경제 포춘코리아 편집부 / 김병주 기자 bjh1127@hmg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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