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대통령선거에서 군 복무 중 첫 투표권을 행사한 큰 애가 선거 전에 전화를 걸어와 기자에게 의견을 구했다. “OOO, OOO 두 후보 중에 누구를 찍어야 할지 고민인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잠시 머뭇거리다 이렇게 조언했다. “네가 공대 쪽이니 이과 전공자가 어떨까. 시대가 그쪽으로 흘러가니 트렌드에도 맞는 것 같고….” 돌아온 대답은 “그것도 괜찮은 기준일 것 같은데요”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고등학생 둘째가 퉁명스럽게 한마디 했다. “그래도 어차피 높은 자리는 문과생이 될 텐데요 뭐.” 나라를 움직이는 고위직은 대부분 인문계 출신이 차지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틀린 말이 아니어서 딱히 대꾸할 단어가 생각나지 않았다. 아마 기자도 문과여서 당연한 듯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작은 애의 예기치 않은 문제 제기에 그 후 새 정부의 인사를 유심히 살펴보는 버릇 아닌 버릇이 생겼다. 그것도 학교가 아닌 전공 중심으로. 지금까지 결과는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과거 정부와 별반 차이가 없다. 역시나 이공계는 몇 명 안된다. 청와대 수석비서관 중에 이공계는 도시공학을 전공한 김수현 사회수석 정도다. 국무총리 등 국무위원을 봐도 마찬가지다. 지난 21일에 이어 30일 단행된 행정자치부 등 4개 부처 장관은 모두 정치학 등 인문계 출신이다. 이런 분위기라면 이전 정권처럼 일부 부처에만 이공계 출신 장관이 기용될 게 분명하다.
국회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20대 국회의원 가운데 이공계 출신은 29명에 불과하다. 전체 의원 수의 9.7% 수준이다. 이전 국회에 비해 다소 많아졌다는 게 이 정도다. 그나마 각 당에서 과학기술계 배려 등의 구색 맞추기 차원에서 선택한 비례대표 10명을 빼면 19명이 고작이다. 90% 이상이 인문계 전공이라는 얘기다. 이 가운데 상위 5위권에 든 법학(64명), 행정학(32명), 정치외교학(29명), 경영학(21명), 경제학(17명) 전공자가 54%로 절반을 넘는다. 많은 이과생들이 전공과는 무관한 사시나 행시에 뛰어드는 것도 이런 ‘문과 후광효과’가 한몫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에 토목공학을 전공한 우원식 의원이 선출됐을 때 왠지 남다르게 느껴진 건 희소성 탓이었던 듯하다.
인문계 출신들을 정부 고위직에 대거 기용하고 국회의원 공천을 많이 하는 걸 뭐라 할 수는 없다. 인문계 특유의 감각과 능력을 발휘해 국사(國事)나 정치를 잘할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더라도 시대의 흐름에 맞는 변화가 필요하다. 4차 산업혁명 전쟁이 치열한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갈수록 차세대 산업을 선도하려는 국가 간 경쟁은 불을 뿜을 게 뻔하다. 관련 산업의 현실을 이해하고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인재의 등용이 중요해진다는 의미다. 이럴 때일수록 정책과 법안 이해도가 상대적으로 빠른 이공계 인재들의 전진 배치를 고민해야 한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여성 정치인이 부족하다며 법적·제도적 뒷받침을 한 덕분에 여성 국회의원이 50명에 육박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양성평등을 강조하며 국무위원의 30%를 여성으로 채우겠다고 한 공약도 비슷한 맥락이다. 융·복합 기술, 4차 산업혁명이 국가 경제의 새 먹거리로 떠오른 현실을 생각하면 이공계 인재에 같은 잣대를 대지 못할 이유가 없다. 우리 이공계의 사정은 수십 년 전과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공계가 유망하니 그쪽으로 진학하라고 학생들 등을 떠밀지만 정작 현실은 녹록하지 않다. 법조인·의사가 우대받고 금융권 등 고연봉 직장이 좋은 직업이라고 여기는 왜곡된 가치배분의 틀이 여전하다. 무엇보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관념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이를 바꾸려면 메아리 없는 말잔치보다는 가시적인 조치나 제도 마련이 필요하다. 이공계 국무위원 할당제나 의원 공천 시 가산점 같은 발상의 전환을 해보는 건 어떨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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