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TUNE FEATURE|최대 규모 IT합병을 이끈 숨은 도박사들

THE GAMBLERS BEHIND TECH’S BIGGEST DEAL EVER

이 기사는 포춘코리아 2017년 4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컴퓨터 업계 거물과 사모펀드의 떠오르는 스타가 어떻게 Dell과 EMC 합병의 초석을 다졌는지 살펴보자.


휴가 친구들 : 2012년 하와이에서 이뤄진 마이클 델(왼쪽)과 실버 레이크 에곤 더반의 만남은 업계를 뒤흔들 동반자 관계 형성의 시작이었다.

텍사스의 모든 것은 크다. 심지어 기업 합병 규모도 그렇다.

자신의 이름을 딴 회사의 창업자이자 CEO인 마이클 델 Michael Dell에게 물어보라. DELL은 한때 미국 최대 PC제조사였다. 그는 지난 2013년 사모펀드 실버 레이크 파트너스 Silver Lake Partners와 함께 Dell을 비상장화했다. 244억 달러 규모의 이 거래는 대공항 이후 최대 기업담보차입매수(Leveraged Buyout) *역주: 사들이려는 기업 자산을 담보로 금융회사에서 자금을 빌려 해당 기업을 인수하는 M&A기법 였다. 2년 후 이뤄진 후속 인수 규모는 더욱 컸다. 델은 데이터 스토리지 분야 선두업체 EMC와의 670억 달러 규모 합병을 진두지휘했다. IT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합병이었다. 이 거래는 작년 9월 마무리됐다. 시장조사업체 IDC에 따르면, 지금은 델 테크놀로지 Dell Technologies라 불리는 Dell-EMC 통합 법인은 현재 스토리지 시스템 부문 세계 1위, 서버 부문 세계 2위, PC 부문 세계 3위에 올라있다. DELL의 인수 금융기법 때문에, 회사는 안장 주머니에 텍사스 크기 만큼의 엄청난 채무를 채우고 말을 타고 가는 형국에 빠져있다.

그렇다고 창업자가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한 건 아니다. 판돈이 크면 클수록 더 유리하다는 게 델의 생각이다. 게다가 이번이 그의 첫 로데오 경기도 아니다. 델은 소비자에게 PC를 직접 판매해 컴퓨터 산업의 판도를 뒤집었고, 수십 억 달러의 인수 합병으로 PC시대 이후 회사의 미래도 준비했던 인물이다. 델은 본사에서 20마일 떨어진 오스틴 Austin에서 가진 회의 기간 동안 진행한 인터뷰에서 “나는 사람들이 터무니 없다고 생각하는 일에 다르게 접근하는 것을 두려워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델(51)은 밝은 청색 단추가 박힌 셔츠와 검은색 바지 차림에 넥타이는 매지 않고 있었다. 실제 나이로 보이지도 않았다. 곱슬머리 속 흰머리가 귀 윗부분에만 드러나 있었다. 사람들은 그가 외모처럼 젊게 느끼고 있기를 바라야 한다. 그에겐 끌어모을 수 있는 모든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난 10년간 그의 경영 전략은 Dell의 ‘원스톱 IT숍 One Stop IT Shop’이 심각한 기술적 변화에 직면한 기업들을 상대로 시장을 장악할 수 있다는 신념에 근간을 두고 있었다. 그가 묘사했듯, 빠른 시장 파괴에 직면한 소비자들은 ’단순함‘을 원하고 있다.
그는 곧 자신의 베팅이 옳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거의 570억 달러의 채무를 안고 있는 그의 새 회사는 전반적으로 쇠퇴하고 있는 산업에서 성장동력을 찾아낼 것이다(PC, 서버, 그리고 스토리지 시스템 부문의 전반적인 판매가 최근 분기까지 매년 하락했다. 회사 매출은 합병 전인 2015년 581억 달러를 기록해 2012년 대비 6% 하락했다). 그러나 총 직원수 14만 명에 이르는 두 회사를 통합하는 건 ‘산을 옮기는 것’만큼이나 힘겨운 시도가 될 것이다.

반면 고객의 니즈는 빠르게 변하고 있다. PC와 전화기 같은 다양한 소형 기기와 기업 데이터용 스토리지 시스템의 작동을 관장하는 서버가 델 테크놀로지의 새로운 소득원이지만 그들은 개방형 클라우드(Public Cloud)로부터 엄청난 위협을 받고 있다. 기업들이 자체 데이터 센터를 설립하는 대신, ‘임대 가능한’ 데이터 센터에서 전산 및 데이터 스토리지 업무를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클라우드의 놀라운 성장으로 Dell의 매출 기반은 흔들릴 수도 있다. 심지어 회사는 아마존 웹 서비스 Amazon Web Services와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클라우드 선두업체에도 일부 장비를 제공하고 있다.
CEO 델은 규모를 키운 통합 법인이 클라우드 업체들의 주요 공급업체가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더욱 다양화된 제품 군과 여러 제품을 하나의 ‘고성능 패키지 솔루션’으로 통합한 이른바 ‘초집중(Hyper Converged)’ 시스템으로, 여전히 자체 데이터 센터를 설립하는 업체들에게 어필하길 바라고 있다. 하지만 협력사와 경쟁사 모두에게 어려운 싸움이 예상된다. 데이터 센터 메모리 제품 제조사 퓨어 스토리지 Pure Storage의 CEO 스캇 디첸 Scott Dietzen은 “데이터센터 시장은 요즘 목격하는 이런 식의 시장 파괴를 경험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Dell의 또 다른 경쟁사가 지적하듯, 이런 혁신의 속도는 전례가 없을 정도로 빠른 상황이다. 휼렛 패커드 엔터프라이즈 Hewlett Packard Enterprise(이하 HPE) CEO 멕 휘트먼은 포춘과의 인터뷰에서 “미래는 속도 싸움이라고 믿는다. 승자는 영리하고, 빠르며, 집중력이 높은 기업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마이클 델은 승자의 3대 요소가 ‘크고, 광범위하고, 경험이 있는’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다. 포춘이 이번 호에 처음 보도했듯이, 델의 인수합병은 10년 이상 공을 들인 신중한 기획의 산물이었다. 아울러 오랫동안 형성해온 필수적인 일부 인맥-하와이 휴가 커뮤니티에서 우연하게 형성됐다-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200억 달러 추정 순자산을 보유한 델은 재산도 불리고 다른 것들도 얻을 수 있었다. 그의 최근 베팅 덕분에 다시 최고경영자 자리로 복귀했고,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제품을 판매하는 회사의 유산을 지킬 수도 있었다. 그는 2015년 직원과 고객들에게 EMC 합병의 장점을 설명한 직후 “규모를 키우지 않으면 짐을 싸서 집에 가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세상의 모든 계획은 어느 정도 대담성이 없으면 무용지물이 된다. 그리고 델은 맥주를 주문할 나이가 되기도 전에 그런 점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비상장’을 단행한 CEO : 소식통에 따르면, 델은 회사의 비상장화 아이디어를 수년간 만지작거렸다. 월가의 감시 하에선 회사를 혁신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원래 휴스턴 출신이었던 델은 일찌감치 기술에 대한 애착을 갖고 있었다. 텍사스대 오스틴 의대 신입생이었던 1983년 가을부터 그는 기숙사 방에서 하드 드라이브를 갖고 놀기 시작했다. 델은 곧 PC 조립으로 방향을 틀었다. 도매로 부품을 구매하고 조립해 시장을 독점하던 고가의 IBM 컴퓨터보다 훨씬 싼 가격으로 제품을 판매했다.
그의 부모는 그가 머더보드가 아닌 책으로 둘러싸여 있기를 바랐다. 델은 “부모님들이 기숙사를 방문할 땐 룸메이트 욕조에 욕먹을 만한 컴퓨터 부품을 숨기곤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부모는 그 사실을 알아챈 후 델에게 컴퓨터 사업을 접고 학업에 전념해야 한다고 꾸짖기도 했다. 델은 “약 10일 동안은 (컴퓨터를) 딱 끊었다. 바로 그 시기가 이 일은 취미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 때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학기가 끝날 무렵, 델은 학교를 중퇴하고 회사를 창업했다. 그는 졸업장을 따기 위해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의사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해 아직까지 괜한 죄책감(Jewish Guilt) *역주: 일부 유태인들이 느끼는 가상의 죄책감 을 갖고 살고 있다”고 농담조로 말했다.

델이 가졌던 두 번째 ‘대박’ 아이디어는 PC를 중간 유통업체를 거치지 않고 고객들에게 직접 판매하는 것이었다. 그는 저렴한 직접 마케팅에 의존했다. 컴퓨터 잡지에 광고를 싣고, 고객들이 메일이나 무료 통화로 PC 주문을 하도록 했다(델은 나중에 인터넷을 같은 목적으로 사용했다). 그는 공급망 측면에서도 혁신을 꾀했다. 직접 판매로 축적한 풍부한 고객 데이터를 자신의 공급업체와 공유한 것이었다. 이는 전례가 없는 조치로, 델은 비용과 재고를 낮추면서 거의 실시간으로 컴퓨터를 배송할 수 있었다.
이 비즈니스 모델은 큰 성공을 거뒀다. 델은 1988년 연 성장률 약 130%와 1억 5,900만 달러의 매출을 달성하고 회사를 상장시켰다. 회사는 1992년 매출 5억 5,000만 달러를 기록하며 포춘 500대 기업에 처음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당시 27세였던 델은 순위에 오른 가장 젊은 CEO였다). 1999년에는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컴퓨터 제조업체로 발돋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파티는 오래가지 못했다. 2000년대 중반 휴대폰이 뜨자 투박한 컴퓨터는 사양화의 길을 걸었다. 저가의 중국 제조업체들도 큰 골칫거리였다. PC가 여전히 수익 창출원이었지만 수요는 줄고 있었다. Dell의 시장 점유율이 감소하며 1위 자리도 HP에 빼앗겼다. 결국 마이클 델은 2004년 CEO 자리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2007년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옛 자리로 복귀했다.
PC사업 의존도에서 벗어날 필요성이 분명해지자, 이 창업자는 훨씬 더 수익성 높은 시장인 ‘데이터 센터용 장비’ 쪽으로 궤도를 수정하려 했다. 먼저 회사는 기업 쇼핑에 나섰다. 라우터와 스위치를 만드는 포스 텐 네트웍스 Force10 Networks와 스토리지 장비 제조사 이퀄로직 EqualLogic 등 법인 고객에 집중하는 업체들이 인수 대상이었다.
회사 사정에 밝은 인사들에 따르면, 델이 처음으로 비상장화를 구상한 때는 2007년 무렵이었다. 그는 비상장화 시도를 처음부터 실버 레이크하고만 논의했던 건 아니었다. 델은 콜버그 크래비스 로버츠(KKR), 블랙스톤 Blackstone, 텍사스 퍼시픽 그룹(TPG) 같은 여러 사모펀드들과도 가능성을 타진했다. 그러나 논의가 진전되지 못했다. 하지만 기업 회생에 더 많은 시간을 쏟을수록, 델에겐 비상장화가 더욱 매력적인 방안으로 다가왔다. 단기 투자를 추구하는 월가의 감시 하에서 ‘궤도 수정’(그 과정에는 매출 손실이 수반된다)을 한다는 건 매우 힘든 일이었다. 2012년 회사 주가가 2007년 대비 반토막 수준에서 거래되자, 비상장화 조치가 점점 더 매력적으로 보였다. 오랫동안 유지해 온 인맥 덕분에, 델은 제대로 된 파트너를 찾을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1990년대 말 재산이 늘어나자, 델은 개인자산 관리를 위해 엠에스디 캐피털 MSD Capital이라는 회사를 설립했다(MSD는 ‘Michael Saul Dell’의 약칭이다). MSD의 첫 투자는 당시만 해도 잘 알려지지 않은, IT투자를 주로 하는 실버 레이크 Silver Lake라는 사모펀드였다. 때 마침 이 사모펀드가 첫 자금을 모집하고 있었다. 델은 펀드 창업자들-제임스 데이비드슨 James Davidson, 데이비드 루스 David Roux, 글렌 허친스 Glenn Hutchins, 그리고 로저 맥나미 Roger McNamee-모두를 알고 있었다. 델은 1980년대 말 회사의 기업공개 ‘로드쇼’에서 이들을 처음 만났다(당시 맥나미는 T. 로 프라이스 T.Rowe Price의 과학 기술 펀드를 운용하고 있었다). 델은 일부 실버 레이크 파트너들과는 ‘휴가 이웃(vacation neighbor)’이기도 했다. 그들도 델처럼 하와이 빅 아일랜드 Big Island의 외부인 출입 제한 주택지 쿠키오 Kukio에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 곳은 IT업계 거물들을 위한 ‘억만장자 휴양지’로 알려져있다(델은 근처 리조트와 골프장, 그리고 약 6,470만 달러 가치의 5,600평 규모 부동산도 소유하고 있다).
델은 실버 레이크가 실리콘밸리에서 영향력 있는 세력이 되었을 때에도 관계를 유지했다. 최대 성공 투자 중 하나는 2010년 스카이프 Skype를 이베이로부터 분리시켜 18개월 후 마이크로소프트에 50억 달러 자본 차익을 남기고 매각한 것이었다. 이 성공의 숨은 공로자는 펀드 대표 이사이자 떠오르는 스타인 에곤 더반 Egon Durban이었다.


델과 더반은 2012년 7월 아스펜에서 열린 ‘포춘 기술 회의’에서 만났다. 그리고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바로 통했다. 델은 “우리가 서로를 보완해 준다는 건 확실하다”고 말했다. 눈에 띄는 공통점 하나는 불리한 여론 속에서도 두 사람 모두 대규모 베팅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연결 고리는? 둘 다 휴스턴에서 성장했다는 점이었다.
그들의 두 번째 주요 공통점은 지리적 연결성이었다.

더반 역시 쿠키오에 있는 델의 휴가 별장 이웃이었다. 그 해 8월 두 사람은 하와이에서 만나 델의 회사를 비상장화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그들은 그 후 몇 개월 동안 기업매수 방안을 매듭 지었다. 델은 자신의 회사 지분을 그 거래에 포함시키고-당시 그의 지분은 16%였고, 그 가치는 40억 달러 정도였다-추가로 5억 달러의 현금도 투입했다. 실버 레이크는 약 14억 달러의 현금 지분투자를 단행했다. 나머지 대부분은 채권 발행(Debt Financing)과 회사 보유 잉여금으로 조달했다. 이 거래를 통해 델은 비상장 회사 지분 70%를 갖게 되었다.
주주들도 이 거래를 승인했다. 그들은 보통주 1주당, 최근 평균 종가에 37% 프리미엄을 얹은 13.65 달러의 현금을 받았다. 주식매수 청구를 한 주주들의 요구를 들어준 셈이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더반의 말처럼 당시 많은 업계 관계자들은 실버 레이크가 PC 제조사 매수를 열망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더반은 캘리포니아 멘로 파크 Menlo Park의 샌드 힐 로드 Sand Hill Road에 위치한 화려한 대리석 사무실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우리를 클리브랜드에서 부동산을 매입하는 것처럼 이상하게 쳐다봤다. ‘매수해서 좋긴 한데 이해가 안 간다’는 식이었다”고 설명했다. Dell의 매출이 기업매수 선언 이후 더욱 떨어지면서 외부인들의 시선은 더욱 회의적으로 변해갔다.

다른 투자자들은 PC산업 전체가 사양길에 접어들었다고 여겼다. 그러나 더반은 숨겨진 기회를 살폈다. 그는 2015년 포춘 콘퍼런스에서 청중들에게 “대형 기술회사에서 현금흐름 1달러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평가”라고 말했다. 전체적인 판매량은 하락세였지만, PC사업이 현금을 창출하면서 델은 스토리지와 서버 같은 다른 유망 제품에 투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곧 델과 더반은 새로운 도전과제에 직면했다: 업계 1위에 오르는 것-그리고 급성장하는 클라우드 서비스 업체들의 위협은 물론, 최대의 적 HPE와 싸우는 것-은 회사의 당시 규모와 사업 범위로는 거의 불가능했다. 규모를 훨씬 더 키워야 했다.
마이클 델은 EMC 합병의 뿌리가 2001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말했다. 당시 이 두 거대 IT기업은 스토리지와 서버 기술을 공동 개발하고 판매하는 동맹 계획을 발표한 상황이었다(스토리지와 서버는 회사가 막 시작했던 사업들이었다). 델은 “드러나지 않았던 사실은 EMC가 우리의 최대 OEM 고객-다른 회사 제품을 자사 제품으로 판매하는 회사-이 됐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R&D와 공급망, 판매, 기업 문화 등에서 친구가 되었다.”


현금 역투자가 : 실버 레이크의 더반은 심지어 매출이 하락했을 때에도 Dell의 PC 사업을 다른 제품에 자금을 지원할 캐시카우로 인식했다.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은 또 다른 사실은 델이 2009년에 이미 EMC 인수를 고려했다는 것이다. 그는 “양사가 대형 컨설팅 회사들에 합병 가능성을 의뢰했다. 우리는 매출과 비용 시너지 분석을 했고, 조직 구성에 관한 수 백 페이지의 자료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논의는 부분적으론 금융 위기와 관련된 불안감 때문에 결국 무산되었다. 델은 “나는 평균 이상의 위험감수 성향을 갖고 있지만, 논의 참여자들 모두가 나와 같지는 않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회사가 비상장사가 된 후, 더 거대한 힘이 두 회사를 하나로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델과 더반은 법인 고객들에게 좀 더 완전한 제품군을 공급할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Dell과 EMC가 공동으로 비용 효율화를 꾀해 이 분야를 지배할 수 있다고 믿었다. 당시 매사추세츠 홉킨턴 Hopkinton에 있던 EMC는 난관에 봉착해 있었다. 37년간 스토리지 시스템을 제조한 이 회사의 매출 성장이 클라우드와 하드웨어의 범용화로 타격을 입고 있었다. 또한 EMC는 복잡한 기업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여러 회사들이 ‘연합’된 형태로, 가장 큰 규모와 기업 가치를 가진 회사는 가상화(Virtualization) 소프트웨어 제조사 VM웨어 VMware였다. 행동주의 투자자들은 EMC가 자산매각과 함께 새로운 CEO 임명을 추진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인기가 높은 EMC의 수장 조 투치 Joe Tucci에겐 확실한 후임자가 없었다.
그러나 이 같은 문제점들은 델과 더 반에겐 장애물이 아니었다. 비상장사가 된 지 1년이 채 안됐을 때 델은 투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내가 조에게 ‘우리가 함께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야기 좀 해봅시다’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2014년 여름 클라우드가 두 회사의 시장 점유율을 더 많이 잠식하자 양측은 절실하게 합병을 갈망하게 되었다.

장애물은 결국 돈이었다. EMC의 엄청난 시가총액(2015년 당시 550억 달러)과 Dell의 과도한 채무상태는 합병에 드는 비용을 대부분 채무(500억 달러 이상)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자금조달 과정에서 그들은 1년 간의 잠 못 이루는 밤들과 은행과의 비밀 회의를 거쳐야 했다. 뒤늦게 나온 한가지 주요 해결책은 신용 기관들이 이론적으로 합병된 회사에 높은 신용도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더 많은 은행들의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델과 더반이 EMC와 처음 만난 지 1년 후인 2015년 가을, 결국 합병 비용이 마련되었다. 제이피모건체이스와 골드만삭스를 포함한 9개 은행이 동참했다. 그렇게 2015년 10월 12일 합병이 발표되었다. 델과 더반은 자신들이 전례 없는 대사건에 막 진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합병이 마무리 되기까지는 11개월이 더 걸렸다. 마이클 델은 그 기간 동안 EMC 출신 1명과 자사 경영진 중 1명, 총 2명의 임원을 선임하는 등 통합을 이끌기 위한 준비 작업을 진행했다. 그는 양측에서 선발된 임원진을 발표하고 역할을 정리했다. Dell의 최고마케팅책임자이자 유일한(과거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여성 임원인 캐런 퀸토스 Karen Quintos가 신임 최고고객책임자로 임명되었다. EMC 제품·마케팅 총괄본부장 출신 제러미 버튼 Jeremy Burton은 통합 법인의 최고마케팅책임자로 선임되었다. 데이비드 굴든 David Goulden 전 EMC 인프라 그룹 본부장은 델 테크놀로지에서 과거와 성격은 비슷하지만 훨씬 더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합병이 완료된 2016년 9월 7일에는 조직이 탄탄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통합 법인의 다음 단계는 지금보다 훨씬 더 희뿌연 상황이다. 거대한 영업팀과 지원 시스템이 완전히 통합하려면 몇 년은 더 소요될 것이다. 자연스럽게 해고도 뒤따랐다. 약 3,000명의 직원들이 해고통지서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회사는 해고자 수를 확인해주지 않았지만, 머지 않은 미래에 추가로 수 천명을 고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일부 고위 임원들도 합병 선언 후 회사를 떠났다. 그 와중에 아밋 요란 Amit Yoran 보안사업부문(RSA cybersecurity) CEO도 지난해 12월 중순 사임을 했다.
회사 조직도 ‘감축’을 통해 변화할 가능성이 크다. 채무 축소의 필요성 때문에, 델과 더반은 현금 창출을 위한 사업부 매각 압박을 받고 있다. 합병 마무리 5일 만에 기업용 콘텐츠 관리 사업부-회사의 내부 서류 정리 소프트웨어를 제작한다-를 16억 2,000만 달러를 받고 캐나다 소프트웨어 회사 오픈텍스트 OpenText에 매각했다. 회사는 합병 마무리 시점부터 12월 초까지 총 58억 달러의 채무를 줄였다고 발표했다.

이처럼 파괴적인 구조조정 와중에서도, 델과 더반은 서버와 스토리지, PC 세 분야의 시장 점유율을 적극적으로 높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드웨어, 서버 관리 소프트웨어 같은 다양한 IT 부품들을 번들과 고객 맞춤용 패키지 형태로 판매하는 ‘집중 시스템(converged systems)’ 시장도 장악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이런 제품들을 자신의 전통적인 시장을 갉아먹는 클라우드 회사들에게 판매하는데 성공해야 한다. 아마존과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기업들이 다른 기업들에게 전산 능력을 대여해주기 위해선 서버와 스토리지 시스템이 필요하다. Dell과 EMC는 이 분야의 주요 공급업체들이다.

새롭게 엄청난 규모를 갖추게 된 델과 더반은 최대 경쟁사인 멕 휘트먼의 HPE를 이길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판단하고 있다. 시장조사회사 IDC의 수석부사장 맷 이스트우드 Matt Eastwood는 “델의 통합 법인이 승리하기 위해선 반드시 시장 점유율을 빼앗아야 한다”며 “그것이 바로 HPE를 희생양으로 삼는 합병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시장 점유율을 빼앗는 것-다른 말로 사업을 키우는 것-과 자산 매각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매각하지 않을 것 같은 (그리고 델의 계획에 어느 정도 통찰력을 제공하는) 자산이 VM웨어다. 논쟁이 있을 수 있지만, 이 회사는 EMC 합병의 보석 같은 핵심 자산이다. VM웨어는 가상화 소프트웨어를 만든다. 이 도구는 동일한 ‘가상화’ 컴퓨터에서 다양한 운영 시스템과 기능을 구동시킴으로써 클라우드가 작동할 수 있도록 해준다. VM웨어는 EMC 지배 하에서처럼 통합 법인에서도 독자적인 상장회사로 남아있다. 하지만 지금은 델 테크놀로지가 대주주다. 새로운 Dell 왕국의 나머지 사업부들과 달리, VM웨어는 연 10%씩 성장을 하고 있다.
VM웨어 매각은 구미가 당기는 유혹이었을 것이다. 340억 달러 시가총액을 고려하면, 매각을 통해 Dell의 채무 상당 부분을 단번에 해결할 수도 있다. 하지만 통합 법인이 장기적인 미래를 본다면, 가능한 이 작은 성장 엔진을 붙잡고 있어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말은 Dell의 최대 위협인 HPE와 아마존을 최대 고객으로 계속 유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델은 기술을 구매하고 사용하는 기업들의 방식에 얼마나 큰 변화가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그는 “기술을 사용하는 방식이 얼마나 빠르게 변하고 있는가. 각 회사는 자체적으로 그 속도를 조절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의 진로와 관련해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많다는 건 분명하다. 그는 “비상장화와 EMC와의 합병은 내 커리어에서 1막과 2막이었다. 3막이 올라가면 나를 다시 인터뷰하러 와야 할 것”이라고 수줍게 말했다.
3막의 내용이 무엇이든, 그건 큰 무대에서 펼쳐질 것이다. 포춘이 오스틴에서 그를 인터뷰 했을 때, 델은 그곳에서 아마도 마지막이 될지 모를 직원-고객 콘퍼런스를 주관하고 있었다. Dell-EMC가 주관하는 다음 회의는 라스 베이거스의 훨씬 더 큰 컨벤션 센터에서 열릴 것이다. 그렇다! 통합 법인 델 테크놀로지는 텍사스에 머물러 있기에 너무 커 버렸다.



■ Dell의 추락과 부상
EMC와의 합병은 회사의 30년 여정에서 가장 최근에 일어난 일대 사건이다. 선구자적인 IT 기업 Dell은 경쟁구도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꾸준한 변화를 시도해왔다(항상 성공했던 건 아니다).

TIMELINE
1984년 : 마이클 델은 19세에 ‘PC 유한회사’를 설립하고 그후 ‘델 컴퓨터’로 사명을 변경했다.
1988년: 델 컴퓨터가 기업공개로 3,000만 달러를 조달했다. 당시 시가총액은 8,500만 달러였다.
1992년 : Dell이 포춘 500대 기업 리스트에 처음 진입했다.
1992년 델이 선 마이크로시스템즈의 빌 조이,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와 함께 한 모습

2001년 : 서버 판매를 시작한 Dell이 세계 1위 컴퓨터 시스템 판매사가 되었다.
델 디멘션 8200 데스크톱 PC

2003년 : Dell이 더 많은 제품군을 비즈니스에 반영하기 위해 사명에서 ‘컴퓨터’를 삭제했다.
2004년 : 마이클 델이 CEO에서 물러나 회장으로 회사에 남았다. 케빈 롤린스가 CEO 자리를 이어받았다.
케빈 롤린스(오른쪽)

2007년 : Dell 주가가 폭락하고 PC산업 전반에서 판매가 하락해 롤린스가 사임했다. 마이클 델이 회사의 최고경영자로 복귀했다.
2008년 : Dell이 스토리지 선두업체 이퀄로직을 인수했다. 제품군을 다양화해 통합 IT 회사로 키우기 위한 일련의 인수합병의 시작이었다. 회사는 이후 5년간 서버와 네트워킹, 소프트웨어, IT기기 분야에서 약 20건의 인수를 성사시켰다.
2013년 : 마이클 델과 사모펀드 실버 레이크 파트너스가 Dell의 비상장화를 진행했다. 실버 레이크의 에곤 더반과 함께 추진한 거래였다. 회사 경영진은 비상장화가 수 년간의 판매 하락 후 회사를 재정비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보고 있다.
에곤 더반

2015년 : Dell이 소프트웨어 및 스토리지 거대기업 EMC와의 합병을 발표했다. IT기업 합병 역사상 최대 규모인 670억 달러짜리 거래였다.
델이 EMC 임원 데이비드 굴든, 조 투치와 셀카를 찍고 있다




서울경제 포춘코리아 편집부 / BY MICHAL LEV-RAM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