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울의 언어정담] 모든 것이 빛나니, 하나도 버릴 게 없구나

작가
"(시든 꽃도) 하나도 버리지 말어"
'소나기' 속 소녀 대사 가슴 울려
하나 버릴 것 없는 아름다운 세상
많이 잊고 무감한 생 사는 건 아닐까

정여울 작가
감동적인 문학작품 속의 아름다운 언어는 영원히 늙지 않는다. 어쩌면 시간이 갈수록 더욱 푸르른 젊음을 유지하는 듯싶다. 독자는 나이 들어가지만 작품 속 주인공은 영원히 젊으니까. 얼마 전 황순원의 ‘소나기’를 다시 읽으며 새삼 전율을 느꼈다. 어린 시절 읽은 것보다 몇 배나 짙은 감동이 느껴졌고 ‘그때는 보이지 않았으나 지금은 보이는 것들’에 마음을 빼앗겼다. 소녀가 소년이 따다 준 노란 마타리꽃을 양산 받듯이 머리 위에 써 보이자 소년은 신이 났다. 소년은 소녀에게 예쁜 것만 골라주고 싶은 마음에 시들시들한 마타리꽃은 버리고 싱싱한 꽃가지만 골라 건네준다. 그때 소녀가 던지는 말이 의미심장하다. “하나도 버리지 말어.” 이 순간 나는 소녀에게 홀딱 반했다. 사려 깊은 이 소녀에게는 시든 마타리꽃과 싱싱한 마타리꽃의 구별이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세상에 너무 짧게 머물다 간 이 작은 소녀에게 소년과 함께한 시간은 ‘하나도 버릴 것 없는 시간’으로 남지 않았을까. 소녀는 소년과 함께한 모든 자잘한 순간을 머릿속에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




중학교 시절 ‘소나기’를 배운 그때도 미친 듯이 설레었지만 지금은 더 가슴 아리게 다가오는 문장도 있다. 소녀가 갈꽃을 안고 단발머리를 나풀거리며 갈밭으로 달리는 장면. 갈대밭이 워낙 무성해 소녀가 보이지 않다가 한참 후 다시 나타난다. 소년에게는 소녀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 이 짧은 시간이 영원처럼 길고 지루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막막한 기다림의 시간이 끝나고 드디어 소녀가 나타났다. “저쪽 갈밭머리에 갈꽃이 한 옴큼 움직였다. 소녀가 갈꽃을 안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천천한 걸음이었다. 유난히 맑은 가을햇살이 소녀의 갈꽃머리에서 반짝거렸다. 소녀 아닌 갈꽃이 들길을 걸어가는 것만 같았다.” 소년은 이 갈꽃이 아주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가만히 서 있다. 달려가 말 걸지 못하고, 먼발치서 하염없이 누군가를 바라보는 자의 막막한 고통을 소년은 너무 일찍 알아버린 것이 아닌지. 사랑에 빠지는 순간의 아픔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그 사람을 멀리서 바라볼 수만 있어도 그저 좋은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 가까이 가서 말 걸지 못하고 먼발치서 아련하게 바라만 보며 그와 나 사이의 아득한 거리감을 가만히 곱씹는 것.

이렇게 서로 아득히 멀었던 서울 소녀와 시골 소년을 불현듯 가깝게 만들어준 것은 바로 여름날 갑자기 닥친 소나기였다. 비를 긋기 위해 수숫단 속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나란히 포개 앉아 서로의 온기를 나눈다. 분홍색 스웨터에 남색 스커트를 입었던 소녀는 자기 옷에 검붉은 진흙물이 들어 지워지지 않는다며 어디서 이 물이 들었는지 기억을 더듬는다. “내, 생각해냈다. 그날 도랑을 건너면서 내가 업힌 일이 있지? 그때 네 등에서 옮은 물이다.” 소년은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가세가 기울어 어쩔 수 없이 이사를 가는 소녀에게 ‘이사 가기 전에 개울가로 한 번 나와달라’는 말을 미처 꺼내지 못한 자신을 한없이 자책하는 소년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온다.

“이번엔 꽤 여러 날 앓는 걸 약도 변변히 못 써봤다더군. 지금 같아서는 윤초시네두 대가 끊긴 셈이지……. 그런데 참 이번 계집애는 어린 것이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어. 글쎄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지 않아? 자기가 죽거든 자기 입은 옷을 꼭 그대루 입혀서 묻어 달라구…….” “어린 것이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어”라는 대사가 없었다면 ‘소나기’의 피날레가 이토록 기나긴 여운을 남길 수 있었을까. ‘잔망스럽다’는 ‘얄밉도록 맹랑한 데가 있다’는 사전적 의미에 멈추지 않고 몹시 연약하고 가냘프게 보이지만 뜻밖의 강인함을 품어 안은 소녀의 평소 성품을 강렬하게 축약시킨 절묘한 형용사다. 누군가를 그토록 일찍 마음에 두고 남몰래 간직한 소년. 누군가를 그토록 창졸간에 잃어버린 자의 고통을 너무 일찍 깨달아버린 소년. 소녀가 떠나버린 세상에 홀로 남은 소년의 슬픔을 가슴 깊이 간직한 채 우리는 어른이 돼버렸다. 우리는 너무도 많은 것을 잊고, 버리고, 떠나온 것이 아닐까. 알고 보면 하나도 버릴 것 없는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돌이켜 보면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이 눈부신 첫사랑의 기억으로부터, 너무 멀리 도망쳐 온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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