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은 이정의 ‘삼청첩’ 중 ‘순죽’, 25.5x39.3cm, 간송미술관 소장 /사진제공=간송미술문화재단
껍질을 뚫고 나온 죽순(竹筍)에서 승천하는 용의 기세가 느껴진다. 그림 한 폭에 대나무의 생애가 모두 담겼다. 화면 맨 오른쪽이 갓 나온, 그래서 제일 야들야들한 죽순이다. 보통의 나무들은 커가면서 일 년 치씩 나이테를 만들지만, 죽순은 껍질을 벗으며 대나무 마디, 즉 죽간(竹幹)의 형태를 잡아간다. 죽순 시절의 껍질을 늘어뜨린 두 번째 대나무는 그 성장해 가는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리하여 추위가 몰아쳐도 홀로 꼿꼿함을 지키는 세한고절(歲寒孤節) 대나무의 틀을 잡아간다. 돋아난 댓잎이 싱싱한 전성기 대나무보다 실상 더 아름다운 것은 화면 아래쪽, 흙 밖으로 드러난 노죽(老竹)의 뿌리인 성 싶다. 작은 보석들을 알알이 박은 듯 굽은 마디마디에 뚫린 구멍들이 풍파를 견뎌낸 훈장처럼 빛난다.
조선 최고의 묵죽화가로 불리는 탄은(灘隱) 이정(李霆·1554~1626)이 검게 먹물들인 비단 위에 금가루를 개어 그린 순(筍) 나오는 대나무 그림, 즉 ‘순죽’이다. 두루 탁월한 이정의 대나무 그림 중에서도 눈앞에서 보듯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그려낸 ‘회화성’ 면에서 그중 제일로 꼽히는 작품이다. 탄은은 41세 되던 해 이 그림을 포함한 대나무 그림 12점, 대나무와 난이 어우러진 난죽 1점, 매화 그림 4점, 난 그림 3점 등 총 20폭 그림을 그리고 21수의 자작시를 써 ‘삼청첩(三淸帖)’을 만들었다.
탄은 이정은 세종대왕의 현손으로 왕실 사람이다. 39세이던 1592년 임진왜란이 터졌고 왕족의 신분이던 그는 왜적의 칼을 맞아 오른팔을 심하게 다친다. 거의 잘려나갈 뻔했다는 얘기도 전하지만 목숨을 보전했고 2년 남짓 지나 몸을 추슬렀다. 어렵사리 다시 붓을 들 수 있게 된 감격에 겨워 1594년에 그린 그림들이 바로 ‘삼청첩’을 이루고 있다. 금가루를 개어 안료로 만든 금니(金泥)는 비싸고 구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재료적 특성상 먹보다 표현하기가 더 힘겹기도 했으나 이정은 이를 자유자재로 구슬렸다. 고려 시대에는 먹물들인 검은 인견 바탕에 금니를 사용해 불경을 정성스럽게 베껴 쓰는 ‘사경(寫經)’ 제작이 많았으나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는 호사스런 재료의 사용을 자제하는 편이었다. 게다가 이정이 삼청첩을 완성할 당시는 전란이 채 가시기 전이라 물자가 턱없이 부족하던 시절이었다.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이 ‘삼청첩’을 전시하며 ‘칼을 이긴 붓’이라 칭한 백인산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은 “무리를 강행해서라도 비단과 금니를 사용한 것은 조형적 아름다움뿐 아니라 최상의 재료로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 전쟁 상흔을 이겨내고 내가 살아있음을 보여주겠다는 탄은의 강한 의지를 보여준다”면서 “임진왜란을 겪고 만든 삼청첩이 상징하는 것은 비록 지금의 우리가 물리적 힘은 왜군에 밀리지만 문화적 힘은 꿀리지 않는다는 것을 시서화의 문화적 기제를 통해 드러낸 우리 정체성과 자긍심”이라고 평했다. 고려의 팔만대장경이 몽고의 침입을 불심(佛心)으로 이기려 한 의지였다면 조선의 삼청첩은 선비정신을 상징하는 사군자를 담은 시서화로 오랑캐에 맞선 격이다. 그림으로 자신의 건재함을 알린 탄은은 이듬해 조선 중기 최고의 문장가로 추앙받은 간이 최립(1539~1612)을 찾아가 서문을 받고, 글씨로 으뜸인 석봉 한호(1543~1606)에게 글씨를 맡겼다.
탄은 이정의 ‘삼청첩’ 중 ‘월매’, 25.5x39.3cm, 간송미술관 소장 /사진제공=간송미술문화재단
혼탁한 세상에서 맑게 살아가는 세 가지로 매·죽·란을 꼽은 삼청첩은 당대 문화계 최고의 3인방이 합심해 만든 시화첩이라는 점까지 더해져 ‘일세지보(一世之寶)’라 불리며 꼭 봐야 할 귀한 보물로 여겨졌다. 세종대왕 때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가 그림 뒤로 22명의 감상글이 더해져 조선 초기 문화의 정수를 이뤘다면, 삼청첩은 조선 중기의 문화적 역량이 집결된 기념비적 작품이라 할 만하다.
달과 매화를 그린 ‘월매’는 오른쪽에서 기세등등하게 뻗어나온 매화 둥치 끝에 둥그렇게 달이 걸려 있다. 운치있는 구도로 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이른봄 밤의 청량한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금니의 농도를 바꿔가며 매화 줄기를 쳤고, 꽃은 윤곽선 없는 몰골의 점매법(點梅法)으로 그렸다. 백미는 단연 금니를 흩뿌리듯 찍어가며 그린 둥그런 달이다. 은은하고 그윽한 달빛이 눈을 사로잡더니 어느새 다가온 매화 향이 코를 간지럽힐 지경이다.
강인한 대나무와 부드러운 난을 함께 그린 ‘난죽’에서도 이정의 기량은 탁월하다. 한 꽃대에 여러 꽃이 달리는 혜란(蕙蘭) 한 포기가 바람에 날리는 모습을 그렸는데 부드러운 난잎이지만 찌를 듯 베일 듯 단단해 보인다.
탄은 이정의 ‘삼청첩’ 중 ‘난죽’, 25.5x39.3cm, 간송미술관 소장 /사진제공=간송미술문화재단
삼청첩의 마지막 그림은 다가올 추운 겨울을 대비해 잎을 떨궈낸 마른 대나무의 ‘고죽(枯竹)’이다. 날렵하게 처리한 댓잎이 예리하면서 강경하다. 말랐어도 기세마저 오그라들지는 않았음을 과시하는 모양새다. 화면 왼편에 이정의 인장과 함께 ‘의속(醫俗)’이라 적혀 있다. 속된 것을 고친다는 뜻의 ‘의속’은 소동파(1037~1101)가 “고기가 없으면 사람을 여위게 하고 대가 없으면 사람을 속되게 한다. 사람이 여위면 살을 찌울 수는 있으나, 선비가 속되면 그 병을 고칠 수가 없다 (無肉令人瘦 / 無竹令人俗 / 人瘦尙可肥 / 士俗不可醫)”라고 적은 글을 줄인 말이다.
탄은 이정의 ‘삼청첩’ 중 ‘고죽’, 25.5x39.3cm, 간송미술관 소장 /사진제공=간송미술문화재단
이정은 심기일전으로 완성한 삼청첩을 후대에 전해주고자 애썼지만 말년에 가세가 기울자 믿을만한 집안이라 판단한 선조(宣祖)의 부마 홍주원 가문에 넘겨준다. 그러나 이내 병자호란이 터지고 강화도 피난길에 함께 들려간 삼청첩은 화재로 앞쪽 표지 한석봉의 글씨 부분을 잃고 만다. 이정의 그림이 무사한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복원된 삼청첩에는 송시열 등 후세의 발문까지 더해져 문화의 켜가 쌓인다. 그러나 19세기 말 조선이 또다시 혼란을 겪으며 삼청첩은 일본으로 흘러 들어가고 만다. 이것을 되찾아 온 이가 바로 간송 전형필(1906~1962)이다. 간송이 어떤 경로로 사들였는지에 대한 명확한 자료나 증언은 없지만 상당한 금액을 치렀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현재의 삼청첩 표지는 맑은 푸른색이다. 그림 못지않게 글도 좋다. 백 연구실장이 풀어 해석한 한시 중에서도 49쪽에 실린 ‘화죽(畵竹)’이 묵죽 대가 이정에 대한 상찬으로는 제격이다.
“…용 뿌리 돌에 서려 죽순으로 솟아나고(龍根帶石金筋怒) /봉황 마디에 서리 머물러 옥골이 차갑구나(鳳節停霜玉骨寒) / 바람 소리에 음률인가 문득 의심했더니(風韻却疑生律呂) / 어두워지자 대나무 축축해지네(天陰最覺濕琅) /…독수도 그대에겐 너그러워 팔뚝을 자르지 못했으니(毒手饒君不折肱) / 하늘이 이겨내고 그대로 그리게 하신 것인가(天敎槃攘相仍) / 붓끝에 봄빛 있어 참모습이 활발하고(春在筆頭眞態活) / …삼절의 높은 재주 모두 다 기댈만하네(三絶高才可憑) ”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